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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109

왕명(王明)중독사건: 중공당사 최대의 미스테리사건 글: 지식도학잡료(知識都學雜了) 1943년은 연안정풍운동(延安整風運動)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그때 중공당내에는 제3자의 "좌경착오노선"에 대한 비판투쟁이 진행중이었다. 바로 이때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터진다. 즉 "왕명중독사건"이다. 이 사건은 점차 중공당사상의 최대 역사미스테리사건이 된다. 그리고 향후 수십년간, 중공당사를 추화(醜化)하고 오랫동안 국제적으로 엄청난 악영향을 끼지게 되는 사건이 된다. 1974년, 왕명은 죽기 전에 모스크바에서 이라는 회고록을 출판한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연안에서 중독된 사건을 언급하는데, 그는 그것이 모택동이 사람을 시켜 그에게 독을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나오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다. 왕명이 기록한 글은 속속 해외의 매체에서 전재되었다... 2023. 2. 6.
"홍기거(紅旗渠, 홍치취)"의 진상은...? 글: 주효휘(周曉輝) 연안에서 모택동을 참배한 후, 시진핑은 신임 정치국상위를 이끌고 다시 허난(河南), 안양(安陽) 린저우시(林州市, 옛 이름은 林縣)로 가서 또 다른 "홍색교육기지" 홍기거기념관(紅旗渠記念館)을 참관했다. 홍기거라는 이름에 대하여, 많은 중국인들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각종 '정신'을 창조하는데 뛰어나 정신병자라는 조롱을 받고 있는 중공은 일찌감치 1971년 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어 소위 '홍기거정신'을 대거 선전했다. 작년 중국당국이 내놓은 100부짜리 다큐멘터리 제36부에서도 역시 중공의 거짓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중국당국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홍기거는 1960년대, 현지인민들이 천수답의 열악한 생존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중공당국의 지지하에 태행산(太行山)의 산허리에 '인장입.. 2022. 10. 31.
최후의 국민당군대 글: 강녕지부(江寧知府) 2008년 7월 3일, 타이페이의 중정기념관(中正記念館)앞의 광장에 400여명이 집결했다. 그들은 백의(白衣)를 입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타이완주민신분을 획득하기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 함께 처량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후부터 심야까지 계속된 집회에서 현장의 질서를 유지하던 타이페이시 경찰은 '진정서'를 '입법원장 왕진핑(王金平)의 비처장에게 전달했다. 결국, 타이완의 내정부문책임자는 심야에 선포했다: 그들의 자수하는데 동의하고, 자수할 때 임시신분증명을 발급할 것이며, 이를 통해 취업과 거주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아마, 여러분들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들 타이완섬내에서 갈 곳이 없는 흑호(黑戶, 무호적자)들이 태국버마방면에.. 2022. 8. 9.
블라디보스톡의 중국인들은 어떻게 소멸되었는가? 글: 야우소풍(夜雨疏風) 2022년 7월 1일은 블라디보스톡 도시설립 160주년기념일이다(실제 할양시기는 1860년 11월이다). 즉, 우수리강 동쪽의 토지가 중국의 품을 벗어난지 160년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만, 이 토지위의 중국인들은 영토의 할양과 더불어 소실되지 않았다. 1938년까지 소련은 각종 수단으로 소멸시켰다. 1. 성황(盛況) 지금은 갈수록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블라드보스톡(중국명 海參崴)로 여행을 온다. 사람들은 이곳의 해산물을 맛보고, 성당의 앞에서 앞다투어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1세기이전에 이 번화한 상업거리를 건설했던 사람, 그리고 소유했던 사람이 중국인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들 중국인들이 얼마나 처량하고 피비린내나게 이 토지를 떠나야 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러시아는 18.. 2022. 5. 5.
민국시대의 12개 직할시 글: 역사망(歷史網) "직할(直轄)"을 고대에는 "직예(直隸)"라고 불렀다. 직예제도는 송나라때부터 시작된다. 북송은 "로(路)"를 설치하여 현재의 성급행정구역으로 삼는다. 23로외에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부(府)가 있었다. 예를 들어 북송의 경사소재지인 개봉부(開封府)이다. 1946년 민국정부에서 통과된 '헌법'에는 여러번 '직할시'가 언급되어 있다. 다만 제11장 '지방제도'에는 단지 '성(省)', '현(縣)'만 규정되어 있고, 직할시나 지방(서장)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 그리고 이후의 공문에서도 여전히 "원할시(院轄市)"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직할시"라는 명칭이 직접 시행되지는 못했다. 국민정부에는 일찌기 12개의 직할시가 있었다. 1921년 북경정부가 반포한 에는 경도시(京都市)를 내무부가 직.. 2021. 12. 24.
호적(胡適)의 천년일탄(千年一嘆) 글: 사상(史翔)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저 결과만 있을 뿐이다. 지금 70년전 장개석의 '창구학인계획(搶救學人計劃)'을 되돌아보면, 확실히 중공의 호구에서 '학인을 구해낸 것'이다. 대륙이 중공에 점령되기 전에 대륙을 떠난 지식인 호적, 부사년(傅斯年), 전목(錢穆)은 여전히 자유사회에서 자유사상을 전승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대륙에 남았던 걸출한 지식인들은 '반우' 문혁'으로 거의 모두 박해를 당했고, 환상을 깨지고, 악몽만 남게 되었다. 1948년 회해전역(淮海戰役)이 시작되었을 때, 국민당군대는 전투에서 불리했다. 장개석은 좋지 못하다고 예감하고, '창구학인계획'을 제정하기 시작한다. 명단에는 모두 국내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둔 걸출한 지식인들이었다. 그 때는 그들 주에 대다수는 의식하지 못했었다.. 2020.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