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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103

손전영(孫殿英)의 마작상술(麻雀相術) 글; 문재봉(文裁縫) 손전영은 근대의 중국군벌중에서 소인물이다. 부하가 가장 많았을 때도 2,3만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실력과는 비례하지 않게 아주 크다. 이유는 대체로 그가 청동릉을 도굴해서 서태후를 관에서 끄집어 내고, 부장품인 보물을 모조리 훔쳐갔기 때문이다. .. 2014. 4. 4.
국민당의 곡씨(谷氏) 삼형제 글: 유계흥(劉繼興) 국민당의 "5대", "6대", "7대"회의에서 곡씨삼형제 - 곡정륜(谷正倫), 곡정강(谷正綱), 곡정정(谷正鼎)은 모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삼형제가 동시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된 것은 국민당 역사상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당시에 이런 말이 유행했다: "국문.. 2014. 2. 18.
소련은 왜 서안사변에 반대했는가? 글: 지효민(智效民) 2013년 12월 12일은 서안사변 77주년기념일이다. 77년전에 장학량(張學良), 양호성(楊虎城)이 장개석을 구금한 후, 연안에는 무대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공개재판을 통하여 장개석을 처형할 생각이었다. 다만, 왜그런지 2,3일후, 연안측에서는 장학량에게 장개석을 풀어주.. 2013. 11. 29.
황포군관학교의 4개 분교 글: 마려(馬麗) 제1차국공합작이 실현된 후, 국민혁명사업에 충성하기로 뜻을 세운 군사인재를 배양하기 위하여, 1924년 5월, 손중산(孫中山)은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주 황포에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1926년 3월에 중앙군사정치학교로 개칭함), 간칭 "황포군관학교"를 .. 2013. 11. 24.
9.18사변에서 누구를 가장 질책해야 하는가? 글: 정만군(程萬軍) 2013년 9월 18일은 "9.18사변" 82주년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9.18사변"은 "7.7사변"보다 더욱 큰 치욕이라고 생각해 왔다. 비록 전자로 잃은 영토가 후자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군대와 그 지도자들의 행동은 적국으로 하여금 완전히 무시하게 만들었기 대문이다. 이 사변에 .. 2013. 11. 11.
장정(長征)때 홍군은 왜 매복에 한번도 걸리지 않았는가? 글: 서염(徐焰) 장정기간동안 홍3군단장, 홍1방면군사령원을 지낸 팽덕회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홍군지휘관의 영용과 뛰어난 정찰업무덕분에, 전멸을 피하고 섬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리장정에서, 홍군은 시시때때로 중병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한번도 매복에 걸린 적이 없.. 2013. 11. 10.
군벌의 말로: 장종창 암살의 막전막후 글: 유전(劉典) 민국시대에 군벌혼전으로 시국이 어지러웠다. 많은 보잘 것없는 인물들이 기회를 잡아서 일어서서 한시대를 풍미하기도 했다. 장종창은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이 장군의 명성은 실로 사람들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국가와 민족에 재앙을 .. 2013. 11. 10.
구추백(瞿秋白)은 왜 <다여적화(多餘的話)>를 썼는가? 글: 정만군(程萬軍) 만일 그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의 열사(烈士) 이미지는 만대에 빛났을 것이다. 중국 홍색혁명의 두차례에 걸친 최고지도자로서, 그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반도(叛徒)"로 보이기를 원했지,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존경받기를 원하지 .. 2013. 11. 10.
장학량(張學良)에 대한 재판경위 글: 주운(周雲) 만일 1935년 이전에 장학량이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유언비어일 것이다. 당시의 장학량은 비록 9.18사변이후 권세가 약간 쇠락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중국정계의 중량급인물로, 손아귀에 중병을 쥐고 있고, 영수(장개석)과는 결의형제이다. 그는 말그대로 .. 2013. 10. 8.
양호성(楊虎城) 일가피살의 내막 출처: 봉황망역사 1949년 8월, 귀양(貴陽) 검령산(黔靈山) 아래의 기린동(麒麟洞)의 한 은밀한 사합원에서 머리카락이 절반은 하얗게 변한 전 국민당서북군장령이자 '서안사변'의 발기인중 한명인 양호성 장군이 허리를 구부리고, 어린 딸을 안고, 노인의 걸음걸이로 집안으로 가서 한켠의 .. 2013.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