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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최후의 국민당군대

by 중은우시 2022. 8. 9.

글: 강녕지부(江寧知府)

 

2008년 7월 3일, 타이페이의 중정기념관(中正記念館)앞의 광장에 400여명이 집결했다.

그들은 백의(白衣)를 입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타이완주민신분을 획득하기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 함께 처량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시아의 고아>

오후부터 심야까지 계속된 집회에서 현장의 질서를 유지하던 타이페이시 경찰은 '진정서'를 '입법원장 왕진핑(王金平)의 비처장에게 전달했다.

결국, 타이완의 내정부문책임자는 심야에 선포했다: 그들의 자수하는데 동의하고, 자수할 때 임시신분증명을 발급할 것이며, 이를 통해 취업과 거주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아마, 여러분들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들 타이완섬내에서 갈 곳이 없는 흑호(黑戶, 무호적자)들이 태국버마방면에 고립된 국민당군의 후손들이라는 것을.

 

해방전쟁말기, 국민당군의 패퇴방향은 주로 3곳이었다:

동남연해의 여러 섬들.

광서-베트남국경지역

운남-버마국경지역

 

모두 알다시피 이오(李敖)가 조롱한 "일국지양성(一國只兩省)"은 복건성과 대만성을 가리키고, "일성지양현(一省只兩縣)"은 금문(金門)과 마조(馬祖) 두 현을 가리킨다.

기실 막 대만으로 패퇴했을 때는 장개석이 장악한 것은 이 두 개성만이 아니었다. 5개성의 기관을 보유하고 있었다.

위의 두 곳이외에 운남성, 절강성과 강소성 그리고 해남특별행정구였다.

 

가장 먼저 상실한 것은 강소성이다.

1949년 도강전투이후, 국민당의 강소성정부는 차례로 숭명도(崇明島), 승사열도(嵊泗列島)로 옮겨다녔으나 1년만에 편제를 폐지한다.

다음으로 사라진 것은 광동성, 해남특별행정구이다.

광동이 해방된 후, 국민당은 해남도를 포함한 남해의 여러 섬을 '해남특별행정구'로 지정한다.

1950년 5월 해방군이 해남도를 점령하면서, 국민당의 이 특별행정구정부도 운영을 중단하게 된다.

1979년 가오슝(高雄)시를 직할시로 개편하면서, 원래 해남특구가 관할하던 남해제도(동사도와 남사태평도)를 가오슝시가 대리관리하게 된다.

이어서 운남성이다.

1950년, 국민당의 패잔병은 그들의 '운남성정부'를 데리고 태국으로 옮겨간다. 이를 근거지로 하여 태국, 버마로 철수한 십여만의 고립된 국민당군은 다시 대륙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3년후인 1953년 4월, 유엔은 태국,버마에 고립된 국민당군으로 하여금 무장을 해제하고 대만으로 철수하도록 결의한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운남성주석 이미(李彌)에게 부대를 이끌고 대만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한다. 이때부터 명목상 국민당의 운남성정부는 없어졌다.

그러나, 암중으로 장개석은 일부 군대를 남겨두고, 육군중장 단희문(段希文)이 스스로 국민정부 운남성정부주석을 맡은 것을 묵인한다.

마지막은 절강성이다.

1949년, 국민당의 정강성정부는 대진군도(大陳群島)로 철수하고, 6년간이나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간다.

1955년 1월, 화동군구의 육, 해, 공군의 각 일부가 군구참모장 장애평(張愛萍)의 통일된 지휘하에 일강산도(一江山島)전투를 개시하여 전승을 거둔다.

일강산도는 대진도의 문호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장개석은 미국 제7함대의 도움을 받아 신속히 철수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동남연해(금문, 마조제외)와 해남도의 잔여병력은 모두 대만으로 철수했다.

동남연해방향과 비교하면 광서베트남국경선과 운남버마국경선을 넘어간 국민당군대는 운명이 더욱 고달펐다.

 

광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3시간이면 타이만의 푸꾸옥섬에 도착한다. 

푸꾸옥은 동남아의 유명한 관광섬이다. 베트남 끼엔장성 푸꾸옥시에 속하며, 캄보디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캄보디아는 자신들이 이 섬의 주권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진주와 생선소스가 많이 난다. 500여평방킬로미터의 섬에는 약 10만의 인구가 거주한다.

1950년-1953년, 일찌기 3만여명의 국군이 프랑스인에 의해 푸꾸옥섬에 연금된다. 대만측에서는 "해상소무(海上蘇武)"라고 불렀다.

도강전투이후, 100만이 넘는 국군패잔병은 동남연해와 국경방향으로 철수한다.

당시 계계(桂係)의 지위는 국민당정부내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백숭희(白崇禧)는 7개병단 50만대군을 장악하고 있어 국군의 마지막 카드라 할 수 있었다.

1949년 4월, "계계"의 우두머리인 이종인(李宗仁)이 비행기를 타고 계림으로 가서, 본거지인 광서에 다시 정부를 따로 세우고자 한다. 이렇게 하여 장개석과 결렬된다.

기실 일찌기 <화담(和談), 1949>때, 중국공산당은 이종인에게 "계계반장(桂係反蔣)"방안을 제안한 바 있으나, 이종인은 망설이며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이번에 광서로 돌아간 것은 이종인이 아마도 그 방안을 다시 꺼내들 생각이었던 것같다. 2인자인 백숭희가 장악한 50만대군과 서남 몇 개성을 카드로 하여 중국공산당과 협상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큰형님이 장개석과 결렬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을 보면서, 백숭희는 확실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4월 29일, 백숭희는 비행기를 타고 무한에서 계림으로 날아가 이종인과 만날 준비를 한다. 

한편으로 큰형님의 '방안'을 듣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 큰형님이 반장(장개석에 반대)에 신중하고 또 신중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가 계림에 가까워졌을 때, 하늘에서는 돌연 폭우가 내렸고, 백숭희는 어쩔 수 없이 광주로 가야 했다.

그날 저녁, 장개석은 황포군관학교의 옛캠퍼스에서 백숭희를 만난다.

결국 장개석은 백숭희를 설득하여 협력하기로 한다. 이렇게 하여 이종인과 백숭희는 갈라서게 된다.

이전 수십년간, 매번 계계는 중대한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이종인이 결정하면 백숭희가 따랐다. 그러나 이번 마지막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종인은 백숭희(군복을 입은 사람)에게 경호한 바 있다. "계계는 대만으로 가면 쓸모가 없어진다", 그러나 백숭희는 대만으로 갈 것을 고집했다. 1954년 3월 10일, 장개석은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이종인을 파면하고, 백숭희도 두손을 들어 찬성한다.

1949년말, 제4야전군이 광서로 진입한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백숭희의 계계군은 대패한다.

계계의 잔여병력중 일부분은 해로를 통해 해남도로 가고, 나머지 일부는 베트남으로 들어간다.

1949년 12월 14일, 제4야전군의 대군이 진남관(鎭南關)을 점령하고, 광서 전체지역을 해방시킨다.

광서전투에서 패배한 후, 백숭희는 해남도로 날아간다. 베트남국경일대를 지키던 잔여병사들은 다시 제1병단으로 재편되어 황걸(黃傑)이 지휘하게 된다.

당시 동남군정장관인 진성(陳誠)은 황걸에게 밀전(密電)을 보내 지시한다: "먼저 베트남으로 들어가서 근거지를 확보한 후 다시 대륙으로 반격하라."

그리하여 황걸은 부대에 '경장분산(輕裝分散)'의 형식으로 베트남국경내로 들어가도록 명령한다. 이렇게 하여 해방군의 추격을 피한 것이다.

베트남은 당시 프랑스식민지였다. 해방군은 자연히 직접 베트남국경선을 넘어 프랑스군과 충돌하기를 원치 않았고, 국경선에서 추격을 멈춘다.

 

여기서 설명하고 지나갈 것은 당시 국군의 고위층인 진성, 백숭희등이 잔여병사를 베트남경내로 진입하게 한 것은 실제 해방군을 베트남경내로 유인하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대로라면, 국군과 프랑스군이 연합하여 호지명(胡志明)의 기반지역으로 진격하여 근거지로 삼고, 중국내전을 '국제문제화'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이 개입할 수도 있었고, 그건 더욱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해방군도 베트남국경을 넘지 않은 것이고, 전선을 군사측면에서 외교측면으로 전환하게 된다.

주은래 총리는 베이징에서 방송을 통해 프랑스가 국군부대의 베트남진입을 허용한 점에 대하여 비난하고, 외교성명을 통해 압박을 가한다.

프랑스식민지시절의 하노이

프랑스인들은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국군패잔병이 뜨거운 감자였다.

국군이 대거 국경을 당당하게 넘어들어오게 놔두면, 한편으로 중국정부의 비난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된다.

국군을 소탕하자니, 3만여명에 이르는 정규군이니, 프랑스군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래도 골치아프고 저래도 골치아프니, 협상을 시작한다.

1949년 12월 12일, 국군병단참모장 하죽본(何竹本)은 프랑스 주랑선(諒山)변방군 참모장 오리아와 만나 쌍방은 <치마협정(峙馬協定)>을 체결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프랑스는 국민당군이 베트남을 거쳐 타이완으로 간다.

- 국군의 무기는 프랑스측에 넘겨 보관하고, 정부간 교섭을 통해 반환한다.

- 연도의 경계는 프랑스측이 파견하며, 프랑스측이 식량공급을 책임진다.

 

12월 13일부터 행동을 시작하여 500명을 1개조로 하여 부녀자들이 먼저 국경을 넘는다.

'협정'이 달성된 후, 국군은 베트남경내에서 집결한다.

그동안 국군은 호지명의 베트콩과 충돌한다. 이동하는 동안 간간히 전투를 벌였다.

12월 24일, 프랑스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군인과 난민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을 보자, 신중국정부의 압박도 있어 국군의 진입을 허용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한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프랑스측은 '협정'을 파기하고, 강제로 국군의 무기를 회수하려 한다. 그리하여 쌍방간에 충돌이 발생한다.

국민당군과 프랑스군의 격전은 1950년 1월 6일까지 계속된다. 결국 탄약이 떨어진 국군은 프랑스군에 투항한다.

그후 프랑스군은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무장해제당한 국군을 베트남북방 '몽양(蒙陽)'과 '래무법랑(萊娒法郞)' 수용소에 구금한다. 그러나, 이곳은 황무지여서 국군의 막사도 국군 자신이 건설해야 했다.

 

1950년봄, 신중국의 지원을 받은 호지명부대는 갈수록 용맹하게 싸운다; 형세가 위급해지자, 프랑스인들은 북방수용소에 수용된 3만여명의 국군을 남하시켜 푸꾸옥등지로 이주시킬 생각을 한다.

베트남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이동은 1951년이 되어서야 완성된다.

서방진영의 큰형님으로서 이때 미국이 앞장서서 프랑스와 이 국군의 처리문제를 협의한다. 미국측은 이 3만명을 무장시켜 직접 주베트남프랑스군에 편입시켜 북방의 베트콩과 전투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측에서는 이 제안에 신중했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 해방군이 직접 베트남에 출병할 핑계거리를 주게 될 것을 우려했고, 그리하여 미국측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국군을 계속 푸꾸옥섬에 연금한다.

프랑스인들은 국군을 푸꾸옥섬으로 보내놓고는 나몰라라 한다. 막사도 지어주지 않았다.

국군은 자력갱생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손으로 섬에 병원, 학교를 짓고, 공항등 교통시설을 건설해야 했다. 처지는 아주 처참했다. 

몇년의 노력을 들여, 고국에서 천리 떨어진 작은 섬에 점차 뿌리를 내리고, 농업, 어업등 산업을 발전시킨다.

 

그렇다면 왜 장개석은 이 외로이 떨어져 있는 부대를 대만으로 급히 데려오지 않을 것일까?

원래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장개석은 극도로 흥분한다. 대륙반격의 꿈을 꾼 것이다.

그의 구상속에 베트남(황걸)과 버마(이미)의 두 군대는 대륙으로 반격하는데 '기병(奇兵)'역할을 할 수 있었다.

1952년봄에 이르러 비로소 대만측에서 미국을 통해 프랑스와 교섭을 벌여, 푸꾸옥의 부대를 대만으로 데려가겠다고 요청한다.

협상을 끝내고, 국민당정부는 도내 각지에 "극난주택(克難住宅)"을 지어 '부대신촌(赴臺新村)'(나중에 富臺新村으로 개명한다)이라고 명명한다. 

1953년 5월, 대만은 선박을 보내 베트남으로 망명한지 3년이 지난  국군을 데려간다.

당시 일부 국군은 떠나기를 원치 않았고, 최종적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남아 화교가 된다. 실제 대만에 도착한 인원수는 30,087명이었다.

푸꾸옥의 국군이 대만으로 간 후 이들은 중점적인 선전재료가 된다.

1955년 11월, 대만당국은 가오슝시에서 제일 큰 호수인 대패호(大貝湖, 지금은 澄淸湖로 불린다)내에 100평방미터의 작은 인공섬을 메워서 건설한다. 

그리고 이 작은 섬은 부국도(富國島)로 명명한다. 푸꾸옥에 연금되어 있던 고립된 국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작은 섬은 호안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섬에는 기념비가 있다. 섬의 바깥쪽에는 정자를 세웠는데, "사원정(思源亭)"이라고 이름붙인다.

가오슝 징청호와 부국도

베트남으로 철수하였다가 푸꾸옥으로 갔던 이 부대와 비교하면 버마로 간 국군패잔병의 운명은 더욱 기구했다.

거의 광서전투와 동시에, 진갱(陳賡)이 제2야전군을 지휘하여 운남 곤명으로 진격한다.

이때 곤명 주변에는 서남일대에서 퇴각한 국군이 많이 모여 있었고, 그중 정예는 중국원정군의 명장 이미가 지휘하는 제8군과 상덕회전(常德會戰)의 영웅 여정만(余程萬)이 지휘하는 제26군이었다. 

1949년 12월 9일 오후 7시, 국민당 운남성정부주석 노한(盧漢)이 배신한다.

곤명기의에 장개석은 대노한다. 그는 서남의 국군잔여부대를 이끌고 해방군이 도착하기 전에 노한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한다.

12월 16일부터, 국군제8군, 제26군등이 3면에서 곤명을 포위하고 전면적으로 공격한다.

해방군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한의 전군(滇軍)은 국군정예군을 맞이하여 아주 완강하게 버틴다.

곤명을 4일간 지키고 있을 때,진갱의 제2야전군이 도착한다. 곤명을 포위하고 있던 국군은 운남서부일대로 퇴각한다.

이미에 있어서, 운남서부는 그가 싸워본 적이 있는 곳이다.

1944년 6월, 중국원정군의 전서(滇西)공격이 송산(松山)에서 저지당했을 때, 이미는 제8군의 부군장으로서 명을 받아 총지휘를 맡아 부대를 이끌고 송산을 공격했었다.

이번에 예전에 싸웠던 곳을 다시 오게 되었는데,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사기가 높던 중국원정군이 아니라, 패전을 하고 도망쳐온 십여만의 패잔병이었다.

군대와 함께 운남서부일대의 일부 변방주민들도 따라서 철수했다. 그들은 국군에 선동되었거나 혹은 군속이었고, 총인원수는 수십만에 달한다.

1950년 1월, 해방군은 전남(滇南, 운남남부)전투를 개시한다.

해방군의 의도는 아주 명확했다. 일거에 국군의 최후부대인 제8군(이미)과 제26군(여정만)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1월 14일, 이미와 여정만은 대만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최고군사회의에 참가한다. 회의에서 이미는 자진하여 운남에 남아 반격기지를 건립하겠다고 말한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전남전투는 여전히 국군의 참패로 끝난다. 두 군의 주력 약 6만명이 섬멸당한다.

그러나, 이미는 확실히 끈질겼다. 그는 잔여부대를 모아서, 산병유격전을 벌이면서 자신이 잘 아는 버마북부로 철수한다. 소위 "이미유격대"를 성립시킨다.

이 시기에 이미유격대에는 여러 국군각부대의 번호가 출현했다

제8군, 제26군, 제41사, 제42사, 제44사, 제93사, 제73사, 제103사, 제169사, 제170사, 제237사, 신편제3사, 영예제1사, 공항경위군, 전계검(운남, 광서, 귀주) 삼성의 변방군, 성부군(省府軍)등등.

 

그뿐아니라,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국민당잔군은 버마현지에서 군사훈련반을 만들어, 현지 버마인들을 가입시켰다. 

나중에 골든트라이앵글(金三角)을 질타한 마약왕 쿤사(坤沙), 로싱한(羅星漢) 및 코캉왕(Kokang, 果敢王) 펑자성(彭家聲)등은 모두 국군훈련반을 졸업한 인재들이었다.

 

1950년대초, 버마는 비록 명목상으로는 영국에서 이미 독립했지만, 실제로 정부의 변방에 대한 장악력은 아주 약했다.

처음에 버마정부는 이 국군을 축출하거나 소탕할 생각이었다.

1950년 3월 13일, 버마국방군 참모장 네윈은 켕퉁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버마군은 국군무장을 해제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몇달이 지난 1950년 여름, 버마는 2만여명의 국방군을 모아 버마북부 골든트라이앵글 몽고(孟果)일대의 국군을 공격한다.

그 결과 국민당 잔여부대는 이국휘(李國輝, 이미의 제8군 제709단 단장)의 지휘하에, 천명의 희생을 통해 적군 근 5천명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둔다.

그 이전까지 이름없던 이국휘는 동남아 일대에 명성을 떨치고, 골든트라이앵글의 사람들이 모두 아는 "소리장군(小李將軍)"이 된다.

태국의 <방콕타임즈> 싱가포르의 <연합조보>등 각 매체에서는 집중적으로 <국민당잔여군대가 버마국방군을 대패시키다> <이국휘장군은 전신이다> <잔군결사대가 버마포병부대를 섬멸하다>등의 보도를 했다.

장개석도 크게 흥분한다.

 

버마군의 위협을 제거한 후, 국군자여부대는 버마북쪽에 여러 개의 근거지를 설립한다.

1951년 5월, 이 군대는 대거 운남으로 진격한다. 전후로 14개의 현,시,향을 점령하고, 창원(滄源)에 군사지휘소를 건립한다.

1개월후, 해방군은 대거 곤명, 대리, 초웅(楚雄)에 진주하고,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으로 반격한다.

국군잔여부대는 다시 한번 버마밀림으로 물러나서 계속 유격전을 벌인다.

1953년, 버마와 소련은 유엔에 중화민국이 침입했다고 고발한다. 유엔총회는 국군잔여부대에 무기를 버리고 버마에서 물러날 것을 결의한다.

국제적인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장개석은 한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그는 나머지 국군을 "지원군"으로 개명하고, 밀명을 하나 내린다. "유정철약(留精撤弱, 정예부대는 남기고 약한 부대는 해산한다)", "명철암류(明撤暗留, 겉으로는 철수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남아있는다)" 그리고 시기를 기다린다.

이어서 겉으로는 세계에 선언한다: 

남아있는 자들은 모두 항명이고, 이미 대만과는 관계가 없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이미는 공개적으로 1만여명의 국군과 가족을 이끌고 대만으로 가서 도원(桃園)과 타이페이 일대에 정착한다. 다른 한편으로 국군중장 단희문이 이미에 이어 스스로 국민정부 운남성주석에 올라, 계속하여 이들 부대를 지휘한다. 


1960년대초, 버마군은 해방군의 협력을 받아 강심파(江心坡)일대의 국군을 궤멸시킨다.

그후 이들 군대는 태국-버마국경일대로 물러나고, 그들이 점거한 면적은 십여만킬로미터의 골든트라이앵글지역으로 쿤사, 로싱한등이 나눠서 지배한다.

쿤사와 로싱한은 훈련소를 졸업한 후 군내부에서 한동안 중하층장교로 있었다. 계급은 개략 대위정도였다. 

그중 로싱한은 일찌기 자주 국군 장교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이런 중국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90년대초, 마약에서 손을 뗀 로싱한은 그동안 번 돈으로 Asia World Company를 설립하여 무역업무에 종사하며, 한때 버마최고부자에 오른다.

로싱한(왼쪽)

마약왕으로 이름을 떨치던 쿤사, 로싱한과는 달리, 국군잔여부대는 제5군 군장 단희문의 지휘하에 태국경내의 작은 마을 Doi Mae Salong(美斯樂)으로 간다.

이 골든트라이앵글 안에 있는 태국의 작은 도시는 단희문이 건립한 운남성 망명정부의 '성회'였다.

비록 수천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태국군의 수차례에 걸친 공격도 모두 격퇴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국군들도 소란을 피우지 않게 되니,태국정부도 이 지역의 자치를 묵인한다.

1980년 단희문이 사망한다.

참모장 뇌우전(雷雨田)이 제5군 군장을 물려받아, 태국-버마국경 국군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다.

도이 매쌀롱은 오랫동안 수입이 지출보다 적어, 재정이 극히 곤란했다. 뇌우전은 부하를 이끌고 마약왕 쿤사의 마약을 호송하며 수입을 얻는다.

쿤사는 뇌우전을 아주 신뢰했고, 큰 거래를 협상할 때만 자주 도이매쌀롱을 선택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95년 쿤사가 버마정부에 투항하기 전에 마음을 정하지 못할 때, 일지기 뇌우전장군을 찾아와서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뇌우전의 의견을 들은 후, 쿤사는 최종적으로 부대를 이끌고 무기를 내려놓고, 헬리콥터를 타고 양곤으로 가서 은퇴생활을 시작한다.

뇌우전은 말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마약왕으로는 전망이 없다. 반격은 더더욱 희망이 없다. 나는 그에게 버마정부와 화해할 것을 권했다. 이번에 그는 진지하게 나의 충고를 들었다. 쿤사는 내 앞에서는 후배였고, 견식에서도 차이가 컸다."

도이매쌀롱의 중국인학교. 글자는 단희문이 썼음. 단희문은 중화민국과 태국의 이중국적을 지니고 있었고, 국군소장이며, 1980년 방콕에서 병사한다.

이국타향의 국군은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외에 더욱 중요한 것은 신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태국인이 보기에 그들은 군사난민이다.

대만인이 보기에 그들은 지난 시대의 역사가 남겨놓은 문제이다.

대륙인이 보기에 그들은 반동파완고분자이다.

 

1980년대, 대만섬내에서는 반정부조직이 '타이페이북부에 송탄(送炭, 지원)'하는 활동이 벌어진다. 그러나 2000년 민진당이 집권하면서 태도는 확실히 바뀌게 된다.

이 밀림에 잊혀진 국군의 후예들은 철저하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아시아의 고아가 된다.

국군의 후인들은 '흑호'로서 출국을 하려면 큰 돈을 주고 여권을 매입해야 했다. 그들이 태국을 떠난 후 최우선적으로 선택한 곳은 자연히 대만이었다.

2001년, 민진당이 집권한 후 대만은 '이민법'에 새롭게 규정한다: 1999년 5월 21일이전에 대만으로 들어온 태국,버마교민만이 거류증을 신청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국적취득꿈이 깨진 것이다. 섬안에서도 흑공(黑工, 무적노동자), 흑호가 되어 버렸다.

2008년, 국민당의 재집권은 입적을 갈망하던 국군후대들에게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 글 맨앞에 언급한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수백명의 대만에서 유랑하던 국군후예인 흑호들이 연좌농성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운남화와 보통화로 대만사회의 각계에 호소했고, 전체 섬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그중 양문걸(楊文傑)이라는 국군후예가 있다. 그는 <마잉주에게 보내는 공개서신>등 눈물을 짜내는 글을 써서 널리 전재된다. 

 

얘기하자면 재미있는데, 

기실 마잉주 본인도 하마터면 태국-버마 국군의 후손이 될 뻔했다는 것이다.

1949년 10월말, 30살의 호남청년 마학릉(馬鶴凌)은 송희렴(宋希濂)과의 친척관계인 점을 이용하여, 송희렴에게 중국-버마국경지대로 가서 거점을 마련한 후, 시기를 보아 반격하자고 설득한다.

비록 마학릉이 이틀 연속으로 설득했으나, 송희렴은 끝까지 결심을 내리지 못한다.

마학릉은 그를 설득하는 것이 어렵겠다고 보고, 할 수 없이 처와 함께 홍콩으로 건너간다(나중에 대만으로 다시 건너간다)

홍콩에 머물던 기간동안, 처 진후수(秦厚修)가 사내아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마잉주이다.

사람의 운명은 예측하기 어렵다.

당초 송희렴이 결심을 내려 버마북부로 가서 해방군과 끝까지 싸웠더라면, 마학릉부부도 아마 그를 따라갔을 것이고, 마잉주도 아마 코캉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2012년 5월 28일, 국민당의 마지막 '운남성주석' 뇌우전 장군이 도이매쌀롱에서 서거한다. 향년 96세였다.

뇌우전의 장례식때, 마잉주가 사람을 보내 "당기복관증서(黨旗覆棺證書)"를 보내주었을 뿐아니라, 중국의 주 치앙마이총영사도 조전을 보낸다.

조전에 이렇게 썼다:

"뇌로음용소모(雷老音容笑貌), 장자풍범(長者風范), 역력재목(歷歷在目), 완여작일(宛如昨日)"

임종전에 뇌우전은 후임주석을 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더 이상 도이매쌀롱의 이들 유민을 신경쓰지 않았다.

마지막 장군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들도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