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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중화민국"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by 중은우시 2024. 10. 11.

글: 마비명(馬悲鳴)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은 75세 생일을 지냈다. 10월 5일, 라이칭더(賴淸德)는 중화민국이 곧 113세 생일인 쌍십절(雙十節)을 맞이하는데 즈음하여 말하기를, 나이로 따지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절대로 중화민국 인민의 "조국"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중화민국은 아마도 중화인민공화국 75세이상 민중의 조국일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에는 이로 인하여 공산당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180도 입장을 바꾸어 중화민국 및 그 전총통 장공(蔣公, 장개석)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정확한 것도 아니다.

국민당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반란단체라고. 그러나 기실 중화민국도 반란단체로 조직된 정권이다.

경자귄비의 난(庚子拳匪之亂, 의화단사건)에서 열강들이 노불야(老佛爺, 서태후를 가리킴)에게 4억냥은자의 중벌을 과하면서 그녀를 용서해준 이유는 그녀가 의화단(義和團)을 진압한 것 이외에 또 한가지 점은 그녀가 어쨌든 국면을 장악하고, 열강의 금융(채무의 대출 및 상환), 무역, 운수등 경제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청나라황실을 없애버리면, 이런 기본적인 보장마저도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장모(長毛, 태평천국의 난을 가리킴)가 날뛸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초기에는 태평천국 배상제회(拜上帝會)때문에 열강은 태평군을 자신들과 같은 편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홍수전(洪秀全)을 만나러 가기도 하고, 양귀자(洋鬼子, 서양인)로 양창대(洋槍隊)를 조직하여 태평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발견한다. 홍수전은 자신이 예수의 동생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건 너무 심하다. 더더구나 태평천국은 천하를 혼란에 빠트려 사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청나라정부가 비록 서양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은 유지해줄 수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방향을 바꾸어 양창대를 조직하여 청정부를 지원하면서 태평천국을 소멸시켜버린다. 증국번(曾國藩)이 천경(天京)을 함락시킨 후 가장 먼저 해야할 중요임무는 바로 진회하(秦淮河) 홍등구(紅燈區)의 영업이었다. "영롱한수월롱사(煙籠寒水月籠沙), 야박진회근주가(夜泊秦淮近酒家), 상녀부지망국한(商女不知亡國恨), 격강유창후정화(隔江猶唱後庭花)"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이르러, 이미 열강의 의도를 알아챈 혁명당은 열강이 다시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거에 모든 대외조약을 인정해버린다; 게다가 청나라조정의 중신 원세개(袁世凱)가 나섰다. 그는 원래 앞장서서 산동의 의화단을 토벌한 인물이다. 열강은 그제서야 양창대를 조직하여 청정부를 도와 태평천국을 진압했던 것과 같은 행동에 나서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해혁명과 경자지란의 다른 점은 그저 의화단은 양귀자를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았던 것에 비하여, 신해혁명은 청정부의 모든 대외조약을 받아들인다. 그 조약이 평등하든 불평등하든. 의화단의 구호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이었는데, 신해혁명은 "멸청복양(滅淸服洋)"이었다.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다. 다만 어찌되었건, 중화민국은 확실히 반란단체가 건립한 정권이다. 1949년에 건립된 중공정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청나라를 이어받은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는 장태염의 <중화민국론>이라는 소책자이다. 그래서 중화민국의 국부는 손중산, 황흥, 송교인이 아니고, 장태염이다. 중화민국정부는 "민국(民國)"정부로 칭해진다.

그렇지만 1927년 대혁명때, 장개석은 북벌에 성공하고 남경에 반란단체의 정권을 건립한다. 그리고 국민당이 건립했기 때문에, "국민(國民)"정부라고 칭해진다.

손중산은 계속하여 혁명을 일으켰고, 경제질서를 교란시켰기 때문에 열강은 그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다. 일본마저도 그를 그다지 자금지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는 시월혁명(十月革命)이 성공한 소비에트러시아로 눈길을 돌려 도움을 청한다. 그리하여, "연아(聯俄), 연공(聯共), 부조농공(扶助農工)"을 외친다. 북벌의 무기와 군수는 모두 소련이 제공한 것이다. 전체 북벌군은 광주정부(廣州政府)를 포함하여 모두 소련이 돈을 내서 키운 것이다. 소비에트러시아가 원조하는 것은 당연히 공산당이다. 그래서 국민당은 할 수 없이 공산당원이 개인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

북벌군이 장강삼각주를 점령하고, 손전방(孫傳芳)의 오성연군(五省聯軍)을 소멸시킨 후, 서방열강은 국민당과 연락하고, 국민정부가 질서를 회복시키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 장개석은 그 기회를 틈타 미국유학한 송미령(宋美齡, 1927년 4월에 구혼하고, 12월 1일 결혼식을 올림)을 부인으로 취하고, 더 이상 소비에트러시아에 도움을 청하지 않게 된다. 공산당이 북벌과정에서 진행한 농민운동은 경제질서를 심하게 파괴하였으므로 사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게다가 "타토호(打土豪), 분전지(分田地)"로 북벌군장령가족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4.12청당(淸黨)이 일어난다. 북대교장 채원배(蔡元培)는 공산당을 척결하자고 주장하게 된다.

북벌은 소비에트러시아의 물자와 무기로 이루어졌고, 공산당이 중개(中介)했으며, 국민당이 수익을 얻었다. 매매가 끝나자, 이익을 얻은 국민당은 오히려 중개인인 공산당을 죽이기 시작한다. 마치 부동산중개인의 도움으로 부동산을 구매했는데, 중개비를 지급하지 않기 위하여 오히려 중개인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누가 이런 원한을 참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후 국공내전이 발생한 것이고, 결국 공산당이 복수에 성공한 것이다.

북벌성공당시, 중화민국의 국부 장태염은 이렇게 선언한다. 중화민국은 죽었다(中華民國已亡).

국민정부는 그저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만 남겨두었다. 수도를 바꾸었을 뿐아니라, 국기도 바꾸어버린다. 국민당의 당기(黨旗)를 홍포(紅布)의 한쪽 귀퉁이에 붙여서, 국기(國旗)로 삼은 것이다. 대만 민진당지도자가 국민당반란단체의 가짜국기아래에서 선서를 한다는 것은 황당하고 가소로운 일로 보인다.

너희의 그 중화민국은 일찌감치 1927년에 망했다. 그후의 중국국민당의 중화제일당국(中華第一黨國)은 더 이상 중화민국이 아니다. 중공의 현정권은 중화제이당국(中華第二黨國)일 뿐이다.

만일, 신해혁명으로 건립한 민국정부는 반란단체의 제1차 가짜정권이라면(반란지수는 1), 북벌국민당의 국민정부는 반란단체가 건립한 제2차 가짜정권이다(반란지수는 1+1=2). 그리고 중공이 건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쫓아낸 것은 반란단체의 제2차 국민정부이다. 반란지수는 -1+1=0이다. 국호를 바꾸었으므로 대청에 대한 복수가 되는 셈이다. 내가 대청을 멸망시킨 것이 대명의 복수를 한 것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의 마지막황제와 황제의 동생은 모두 전국정협위원이 되었다. 국민당과 북양정부는 이런 일을 한 적이 있는가?

한 나라의 주권은 정부, 인민 외에 영토가 있다. 중화민국의 성립초기, 대만은 이미 1895년 4월 17일 체결한 중일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에 할양된지 17년이 되었다. 그리고, 신해혁명은 청정부가 체결한 모든 대외조약을 다시 확인한 바 있다. 그러므로, 대만은 당시에 중화민국영토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이 패전하여 투항한 후에 비로소 중국에 되돌려준 것이다. 대만은 청나라황실이 할양한 것이니, 되돌려받아야 하는 것도 당연히 대청이다. 다만, 국민정부는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미소열강의 참전으로 일본을 격패했다. 국민정부는 스스로 당연히 대신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누가 생각했으랴. 4년후인 1949년 국민정부는 공산당에 패배하여 대만으로 쫓겨오게 될 줄을.

그래서, 진지하게 따져보면, 1945년이전의 대만섬은 중화민국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저 해협중심선 대륙쪽의 도서인 대소금문도, 마조도, 대담도, 이담도, 및 그 주민들이야말로 113년동안 중화민국판도안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총면적이 개략 7,80평방킬로미터(금문도 58.6, 마조도 9.24, 대담 0.79)이고, 총인구가 20만이 되지 않는다(금문 15만, 마조 1.4만). 대만본섬이 중화민국판도에 들어온 것은 79년밖에 되지 않았다. 중공건정보다 4년이 빠를 뿐이다.

국민당이 1949년 대륙에서 철수한 후, 대륙인들이 1972년까지 대만에서 세금을 거두었다. 그러므로,1972년이전에는 모두 중화민국의 납세인이다. 그렇다면, 1972년이전의 대만인들의 조국은 대륙이 아니란 말인가? 그럼 세금을 왜 거두었는가? 이를 가지고 라이칭더의 말을 보면 웃긴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삼조공화(三造共和)의 단기서(段琪瑞)가 장훈복벽(張勛復辟)을 격멸시키겠다고 마창(馬廠)에서 맹세할 때도 역시 장훈이 경제질서를 교란시켰기 때문이다. 단기서가 사업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열강의 대출로 지원을 받아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대출협상대표 조여림(曹汝霖)은 장훈의 변발병의 사이에 있는 틈을 지나 협상장소에 이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