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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왕정위)

숙친왕과 왕정위의 대화

by 중은우시 2006. 8. 29.

왕정위는 젊었을 때, 섭정왕인 재풍을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었다. 청나라 조정의 숙친왕은 왕정위를 설득하여 청나라정부를 위하여 일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서 아래와 같은 유명한 대화를 나눈다.

 

숙친왕 : 왕선생은 <<민보>>에 글들을 많이 쓰셨다. 나도 그것들을 읽어보았다. 왕선생은 중국이 반드시 자강자립하여야 하고, 정치개혁을 하여야 하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민중의 정치참여를 제창하고, 서방의 입헌제를 배우자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청나라 조정에서 하는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현재 조정은 입헌제로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고, 국회를 만들어 민중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를 논의하게 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쟁취하고자 하는 혁명의 목표가 아닌가?

 

왕정위: 우리 혁명당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입헌군주제가 아닙니다. 반대로 봉건전제군주제를 타파하자는 것이며, 삼민주의를 실행하자는 것입니다. 친왕께서 왕모가 <<민보>>에 쓴 글을 읽어보셨다니, 왕모의 주장에 대하여도 당연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숙친왕: 너희 혁명당은 분명히 뛰어난 주장과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너희도 우리의 생각을 진지하게 잘 들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삼민주의는 일종의 견식이 편협한 이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후 중국의 지도이념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 멸만흥한(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흥하게 한다)을 주장하는가. 이렇게 민족간에 적대시하는 것을 선전한다면 중국에서 오족협화(다섯개의 주요 민족 즉 한, 만, 몽, 장, 회의 서로 조화롭고 도우는 사회)를 실현할 수 있겠는가? 왜 평지풍파처럼 유혈혁명을 하려고 한단 말인가. 우리는 이미 헌정을 실시하겠다고 승락했고, 각종 정치주장이 모두 실현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하지 않는가. 평화로운 헌정방식으로 자기의 정치주장을 실현할 수 있다. 많은 인명과 재산의 파괴를 가져오는 혁명방식으로 자기의 정치주장을 실현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 아닌가? 이웃 나라인 일본은 바로 군주입헌의 성공적인 사례가 아닌가?

 

왕정위: 우리가 혁명을 주장할 때, 많은 사람들은 일본의 군주입헌 성공의 사례를 들어 혁명에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사이고 (서향융성)가 무력으로 막부에서 정권을 빼앗아 온 것이지, 절대로 막부가 웃으면서 정권을 건네준 것이 아니다. 현재 중국에서 군주입헌을 하려고 하는 것은, 오랫동안의 부패와 폐해를 해결할 수 없을 뿐아니라, 국회를 민권의 지주로 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국회는 그저 군주의 괴뢰나 주구에 불과할 뿐이다. 단지 민주혁명만이 중국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다.

 

숙친왕: 중국의 정치는 매우 복잡하다. 각종 민의가 얽혀 있고 하나로 되지 못한다. 정치개혁을 지나치게 서둘러서야 해결이 되겠는가. 사마귀가 앞에 있고, 참새가 뒤에 있다. 열강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않은가? 자중하지 않고 잘 생각하지 않으면 어지러워질 것이다. 왕선생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 달라.

 

왕정위와 숙친왕의 변론은 계속 평행선을 그었다. 누구도 상대방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당시 왕정위는 한창 나이인 28세였고, 숙친왕은 초로인 45세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상대방의 학식과 견식에 대하여는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숙친왕은 원래 왕정위를 설득하여 청나라조정을 위하여 일하게 하고 싶어했으나, 왕정위의 혁명에 대한 뜻이 굳은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왕정위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후에 숙친왕은 자루 옥중으로 와서 왕정위를 만났고,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정적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가까운 친구관계처럼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