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예방육(倪方六)
이 글에서 얘기할 것은 장개석이 왕정위(汪精衛)의 묘를 비밀리에 폭파시킨 내막이다. 외부에서 알기로는, 왕정위묘가 폭파되어 파괴된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폭파시켰는지 왜 폭파시켰는지, 폭파후의 반응은 어떠했는지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리하여 이 역시 역사의 수수께끼가 되었다. 얼마전에 남경고서시장에서 마침 1995년 <<강소성문사자료>>에 실려있는 당시 묘소폭파를 집행한 구유달(邱維達)의 회고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구유달은 국민당 제74군의 군장으로 계급은 중장이었다. 황포군관학교 4기출신이다. 북벌, 항전의 여러 전투를 겪었으며, 전공이 탁월했다. 중국인민해방군에 들어온 후에, 유백승이 원장으로 있던 해방군남경군사학원에서 교관을지냈고, 나중에 강소성인민정부 참사실의 참사를 지냈다. 1980년대에 강소성 정협위원, 상임위원을 지냈다. 묘소폭파임무를 수행할 때, 구유달은 제74군의 군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구유달의 글은 아주 큰 사료적 가치가 있다.
왕정위의 묘는 남경의 동쪽교외에 위치한 풍수명당자리인 자금산의 남록에 위치하고 있다. 중산릉(中山陵)에서 서남쪽으로 수리가 떨어져 있다. 명태조 주원장의 효릉의 앞쪽이며, 동오대제 손권묘에 가깝다. 현재의 매화산(梅花山)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관광객들이 볼 수 있는 "관매헌(觀梅軒)"이 바로 왕정위묘의 원래 부지이다.
관매헌 - '방학(放鶴)'이라는 글자는 손중산의 아들 손과의 글씨이다
왕정위는 1883년 5월 4일에 태어났다. 조적(祖籍)은 절강 산음(현재의 소흥)이고, 광동성 삼수(현재의 불산시)에서 태어났다. 왕정위의 본명은 왕조명(汪兆銘)이며 자는 계신(季新)이다. "왕정위"는 원래 그의 필명(筆名)이었다. 왕정위는 일찌기 애국열혈청년이었다. 그는 일찌기 천지를 뒤흔드는 사건을 기획했다. 즉 청나라 섭정왕 재풍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그는 이름을 크게 떨치고 전국민이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왕정위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는 최고지도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장개석과의 싸움에서 졌다. 항일전쟁기간동안, 일본인은 왕정위의 심리상태를 잘 읽고, 그에게 기회를 준다. 왕정위는 일본인들에게 의탁한다. 그리고 장개석의 항일구국 주장에 반대하고, "화평운동"을 시작한다. 1940년 3월, 왕정위는 국민정부를 남경에 세우고, 왕정위가 "행정원장" 겸 "국부주석(國府主席)"에 오른다. 이리하여 왕정위는 중국의 최대의 매국노가 된다.
'골수암'을 앓고난 후, 왕정위는 일본에 치료하러 간다. 1944년 11월 10일 치료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일본 나고야에서 사망한다. 왕정위가 죽은 후 일본 군부대는 "해겸(海鹣)"호 비행기를 보내어 왕정위의 시신을 중국으로 운송해온다. 그는 그다지 크지 않은 남목(楠木)관에 입관된다.
시신을 운송해온 후, 왕정위의 남경정부는 손중산의 '발밑"에 즉 손중산이 볼 수 있는 장소인 현재의 매화산에 명당자리를 골라서 왕정위의 묘를 만든다. 왕정위의 남경정부는 거액을 들여서, '왕주석'에게 상당한 규모의 능묘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설계를 마친다. 공씨성의 기술자에 따르면, 왕정위의 능묘도안은 손중산의 능묘를 모방하여 설계했고, 건축예산은 5000만위안(남경정부화폐로)이었다.
그러나 일이 다급해지자 먼저 묘혈부터 만든다. 묘혈을 만든 후 관을 먼저 안장한다. 1944년 11월 23일, 왕정위의 남경정부는 '봉안대전'을 거행한다. 그후 부근 땅에는 건축시공을 개시한다. 그러나, 왕정위는 아마도 운명이 그렇게 정해졌나보다. 당시 시국이 불안하여, 왕정위의 처인 진벽군이 여러차례 공사속도를 빠르게 하라고 재촉했지만, 제당(祭堂)을 막 만들고, 묘실 패방(牌坊)의 기초를 막 놓았을 때, 일본인들이 투항한다. 시공은 어쩔 수 없이 중단되고 만다.
일본이 투항하자, 매장된 왕정위의 운명은 끝이 났다.
구유달의 회고에 따르면, 왕정위의 묘를 폭파시킨 것은 사전에 주도면밀한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하응흠(何應欽)이 친히 회의를 주재하여 왕정위의 묘를 옮겨버리도록 요구한다. 1946년 1월 15일 저녁, 구유달은 육군본부 참모장 소의숙(蕭毅肅)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총사령관 하응흠의 지시를 전달하면서 구유달에게 즉시 육군본부의 중요한 회의에 참가하라고 한다. 구유달이 황포로 육군본부 회의실에 도착하자, 당시 남경시장이던 마초준(馬超俊), 육군본부 공병지휘관 마숭육(馬崇六), 남경헌병사령관 장진(張鎭), 육군본부 참모장 소의숙이 모두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왕정위묘를 폭파시켜버리기 위한 비밀회의였다. 하응흠이 친히 출석하여, 회의를 주재했다. 하응흠이 먼저 발언했다. "여러분들이 한 가지 일을 협의해 달라.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한다. 어디에든 새어나가서는 안된다. 위원장(장개석)이 곧 '환도'할 것이다. 왕정위라는 이 대매국노의 분묘가 여전히 매화산에 있다. 손총리의 능묘와 나란히 있다. 이것은 말이 안된다. 만일 왕정위묘를 없애버리지 않고, 위원장이 '환도'했을 때 보게 된다면 반드시 진노할 것이다.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관심으로 골치아플 것이다. 여러분이 자세히 연구해서 어떻게 옮길 것인지 반드시 타당한 처리방법을 찾으라."
하응흠은 말을 마치자 바로 자리를 떴다. 소의숙이 이어서 의견을 냈다. 여전히 하응흠의 뜻을 그대로 전달했다: "총사령관(하응흠)은 이미 중경의 지시를 받았다. 이 문제는 국내와 국제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10일내에 처리를 마쳐야 한다." 이번 비밀회의에서는 구유달의 74군이 공병부대를 보내어 왕정위묘의 철거이전업무를 집행하기로 결정된다.
74군의 특수비밀업무를 협력하기 위하여, 철거이전기간동안, 헌병사령부는 내외경계를 담당하고, 행인의 교통을 차단한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한다. 남경시정부도 사람을 보내어 협력한다고 결정했다.
실제로, 이번 비밀회의전에 육군본부는 일찌감치 공병을 보내어 왕정위묘에 대한 정찰을 마쳤따. 당시, 육군본부 지휘관 마숭육은 구유달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정위묘는 철근콘크리트구조이고, 묘가 크지 않지만, 상당히 견고하다. 왕정위묘는 왜 이렇게 견고하게 만들었는가? 도굴요소이외에 가장 주요한 것은 정치적보복을 고려한 것일 것이다. 왕정위의 처인 진벽군은 남편이 '매국노'라는 죄책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개석과도 불화했으니, 그는 남편의 시신이 사후에 파헤쳐질까 우려한 것이다.
구유달은 설명응 들은 후,폭약으로 묘혈을 파괴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남경시장 마초준은 구유달에게 이렇게 말한다: "총좌(장개석)의 뜻은 시간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리한 후 새로운 것을 건축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좋기는 모든 준비가 완비된 후 야간에 처리하는게 좋겠다."
최종적으로 1946년 1월 20일 밤12시에 묘를 폭파하기로 결정한다. 나중에 준비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21일로 행동일자를 옮긴다. 외부인들이 왕정위묘를 폭파한다는 비밀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묘소폭파 3일전에, 중산릉과 명효릉의 중간에 행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유람을 금지한다. 당시에 너무나 신비롭게 행동하다보니, 유언비어가 돌았다. 국민정부가 매국노를 체포하려 한다고 하였다. 그러다보니, 왕정위 정부하에서 나쁜 일을 했던 사람들이 모두 어쩔 줄을 모르고, 어떤 사람은 도망치고, 어떤 사람은 숨어버렸다.
구유달은 74군의 51사단의 공병대장 이동양(李東陽)으로 하여금 현장처리를 책임지게 했다. 공병기술자들의 의견으로는 개략 TNT 150킬로그램을 사용하면 모조리 폭파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폭파시 현장감독으로는 마숭육, 마초준과 구유달등이 있었다.
공병의 폭파업무는 두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제1단계로 묘의 외층 철근콘트리트부분을 폭하하는 것이었다; 제2단계로는 관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폭파집행시 다른 음향으로 폭파를 감추었다. 이를 통해서 거대한 화약폭발음을 숨기려고 하였다.
파괴되기 전의 왕정위묘
묘혈을 폭파한 후, 과연 왕정위의 관이 나왔다. 마숭육의 지시로 왕정위의 관이 열렸다.
이 지시에 대하여는 구유달이 당시에 돌연하다고 느꼈다. 비밀회의에서 하응흠의 지시는 아주 명확했기 때문이다. "이전"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관두껑을 열라는 것이고, 어디로 옮겨가려는 계획은 전혀 없었다. 구유달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관두껑을 열자, 왕정위의 시신은 청천백일기로 덮여 있었다. 시신은 왕정위국민정부의 문관예복이고, 청색장포마괘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예모를 쓰고, 허리에는 대수(大綏)를 차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갈색에 흑반점이 있었다. 입관할 때 방부제를 사용했으므로, 시신은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혀 썩지 않았다.
관두껑을 연 후에, 마숭육은 불필요한 인원들은 잠시 묘지를 떠나있으라고 지시한다. 마초준이 관내부검사를 하였는데, 주로 무슨 부장물이 있는지를 찾는 것이었다. 조사결과, 왕정위의 마괘주머니에서 길이 약 3촌의 하얀종이가 나온 외에 나머지 유물은 없었다. 이 종이에는 붓으로 "혼혜귀래(魂兮歸來)"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래에는 "진벽군(陳璧君)"이라는 서명이 있었다. 이 종이는 진벽군이 일본에서 시신을 운송해온 후에 쓴 것이며, 혼을 부르는 뜻이라고 한다.
왕정위의 묘안에는 부장품이 하나도 없어서, 적지 않게 의외로 생각했다. 이는 왕정위가 스스로의 죄를 잘 알기 때문에 아무 것도 넣지 않고 몸만 묻힌 것인가? 그 수수께끼는 이제 아무도 풀 수가 없게 되었다.
마숭육은 당시 공병대장 이동양에게 분부했다. "너의 임무는 관을 트럭에 싣는 것이다. 오늘 밤 안으로 묘지를 편평하게 정리해야 한다. 원래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말라"
구유달은 당시 머리를 써서, 진상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이동양에게 주의하라고 암시했따. 구유달은 마숭육에게 말했다. 우리(74군)은 끝까지 채임지겠다. 이동양이 관을 운송하는 자동차를 '호송'해서 의외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막겠다고. 다음 날 새벽, 이동양은 돌아와서 구유달에게 보고했다. 마숭육은 왕정위의 관을 청량산(淸凉山, 남경성의 서쪽)으로 옮겨갔고, 시신을 화장장에 넘겼으며, 반시간도 되지 않아, 관과 시신은 모조리 재로 되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구유달은 그제서야 알았다. 마수육은 하음흠의 또 다른 비밀지시를 받아서, 원래 계획대로 시행한 것이다. 소위 '이전'은 그저 회의에서 쓴 수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왕정위의 묘를 폭파한 후, 공병들은 즉시 묘혈을 편평하게 만들었다. 구유달은 반개월후인 2월초에 봄빛이 따스할 때, 차를 몰고 명효릉으로 유람을 갔다. 가는 김에 매화산을 산보했다. 그런데, 매화산의 경치는 전혀 달라졌고, 면모는 모조리 변했다. 매화산의 남북 양쪽에는 작은 길을 두 개 냈고, 각양각색의 꽃과 나무를 심었다. 주위환경도 새롭게 단장했다. 중산릉의 아름다운 경치와 서로 어울리게 되어 풍경이 괜찮은 편이었다. 왕정위묘의 흔적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현재 왕정위묘의 지상건축은 멀지 않은 곳에 제당이 남아 있는데, 이는 중산릉 능원관리국의 사무실로 쓰고 있다. 만일 사정을 아는 사람이 알려주지 않으면, 이것이 왕정위의 제당이라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장개석은 왜 왕정위의 묘를 황급히 없애버렸는가? 하응흠이 비밀회의에서 말한 바를 살펴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공개적인 이유는 2가지이다. 첫째, 왕정위는 대매국노이다. 수도부근에 묻힐 자격이 없다. 둘째, 왕정위묘와 손중산묘가 함께 있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 두 가지 이유는 당시에 보기에는 당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국민들의 매국노를 미워하는 심리에도 부합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하응함의 말은 음미할 만하다: "만일 옮겨버리지 않으면 위원장이 보게 될 것이고, 반드시 화를 낼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왕정위에 대한 장개석의 '화'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들 사이의 권력에 대한 다툼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왕정위묘를 파괴하는 것과 장개석의 환도는 전혀 필연적 관계가 없다. 왕정위묘를 파괴하지 않더라도 장개석은 환도할 것이다.
그렇다면, 왕정위묘를 파괴하지 않으면 왜 장개석이 반드시 화를 냈을까? 이것은 장개석이 일생동안 미신을 믿었다는 것과 그가 죽은 후에 자금산에 묘지를 두고 싶어했다는 것을 결합해보면, 왕정위묘를 폭파시키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나온다. 왕정위묘가 있다는 것은 장개석의 풍수를 파괴하는 것이다.
장개석은 생전에 자신이 묻힐 장지(葬地)를 여럿 봐두었다. 그러나 그가 진정 마음을 둔 곳은 자금산이었다. 1946년 봄, 즉 왕정위묘를 파괴시킨지 얼마되지 않아서,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중경에서 남경으로 옮겨온다. 환도후에 첫번째로 한 일은 장개석이 막료를 데리고 중산릉에 제사를 지낸 일이다. 제사를 마친 후에 이미 60세가 된 장개석은 지팡이를 집고 산을 오른다. 자하동의 서쪽언덕에서 위의 평강으로 오른다. 장개석은 멀리 바라보며, '산천의 뛰어남과 숲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좋아했다" 장개석은 수하에게 당부했다. 그가 서 있는 곳에 정자를 만들라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의 정기정(正氣亭)이다.
왜 그가 서 있는 곳에 정자를 만들게 했을까? 거기에는 숨은 비밀이 있다. 장개석은 이곳을 자신의 묘로 선택한 것이다. 장개석이 공개한 이유는 '국민들과 함께 즐기겠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자신이 죽은 후에 묻힐 자리에 표기를 해둔 것이다. 이를 보면, 장개석이 중산릉에 제사를 지낸 후에 등산한 것은 그저 아무렇게나 한 행동이 아니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전에 절강 봉화 계구의 고향 설두사의 명승 태허는 이미 이 곳을 마음에 두었다고 한다. 장개석은 중산릉에 제사를 지내는 기회에 친히 산에 올라서 풍수길지를 살펴본 것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장개석이 스스로 정한 묘지에 "정기정"을 세웠는데, 왕정위가 매장된 묘지와는 풍수적으로 서로 부닥치는 곳이다. 왜냐하면 서로 너무나 가깝게 위치한다. 모두 손중산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생각해보라. 일생동안 독재하던 장개석이 미신을 믿지 않고, 풍수요소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대매국노이자 자신의 정치적인 라이벌이 자신의 곁에 누워있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과거의 미신에 따르면, 반역자가 수도부근에 묻혀 있으면 국운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이를 통해서 연상하면, 장개석이 환도하기 전에 왕정위의 묘를 파괴시킨 것은 일시적인 흥분때문이 아니고, 세심하게 고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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