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왕정위)

진벽군(陳璧君)과 왕정위(汪精衛)

by 중은우시 2006. 1. 3.

왕정위는 손문의 후계자중의 하나로 장개석과 대립관계에 있었으며, 후에 일본의 괴뢰정권을 세워 중국에서는 매국노로 손가락질받는 인물이다. 왕정위는 그러나, 중국의 근대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특히 그와 부인 진벽군과의 사랑이야기는 유명하다.

 

진벽군은 1891년 말레이지아의 부유한 화교가정에서 태어난다. 부친 진경기(陳耕基)는 현지의 부유한 상인이었고, 모친 위월랑(衛月朗)은 광동 번우사람으로 어린 나이에 말레이지아로 이민온 사람이었다.

 

진벽군은 15세에 소학교를 졸업하면서 당시 손문의 중국동맹회에 가입한다. 이후 그녀는 부모를 설득하여 어머니까지 동맹회에 가입시킨다. 진벽군은 동맹회의 잡지에 쓴 글중에서 정위(精衛)라는 필명으로 쓴 <<민족의 국민>>, <<혁명은 나눌수 있다는 설을 반박함>>등의 글을 읽고 그 글을 쓴 정위라는 사람에 대하여 존경심을 갖고, 당시 동맹회 회장이던 오세영에게도 이런 뜻을 전한 바 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오세영이 "왕정위가 말레이지아에 왔는데 한번 볼 것인지"를 물어왔고, 진벽군은 바로 글을 쓴 왕정위인 것을 알고, 기꺼이 만나고 싶다고 하여 오세영의 집에서 왕정위를 만나게 된다.

 

진벽군은 왕정위를 만나자마자 그에게 한눈에 반해버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용기를 내어 왕정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서신을 보내지만, 왕정위는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시한다. 원래 왕정위는 집안에서 유씨성을 가진 여자와 정혼을 해놓은 바 있다. 비록 왕정위는 이에 반대하여 집안과 거의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포까지 할 정도였으나, 혼인문제는 그에게 골치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혁명에 참가하여 사해를 떠돌아다니는 입장에서 결혼을 생각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진벽군은 이에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여자였다. 당시 왕정위가 손문의 명을 받아 일본에 유학가 있었으므로, 그녀도 유학을 핑계로 일본으로 간다. 그리고, 왕정위의 동맹회가 돈이 모자라서 고민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유학비용을 기꺼이 내놓는다. 그리고, 왕정위가 암살단을 구성하여 정부요인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알고는 자신도 참여시켜달라고 조르게 된다. 왕정위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그녀가 워낙 고집을 부려 결국 참여시키게 된다. 왕정위가 동의하자 그녀는 뛸듯이 기뻐하였다. 뿐만아니라 그녀는 스승을 초청하여 유도, 검술, 총술과 폭약제조법까지 익히게 된다.

 

1909년 겨울 왕정위는 진벽군과 황복생, 나세훈등 암살단원을 이끌고 비밀리에 북경으로 간다. 그들은 사진관을 여는 것으로 위장해서 당시 청나라의 섭정왕을 암살하고자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중간에 암살계획이 탄로나, 황복생, 왕정위는 체포된다. 왕정위가 체포된 후 진벽군은 사방을 뛰어다니며 왕정위를 구하기 위하여 애를 쓴다.

 

한번은 진벽군이 옥졸을 매수하여 왕정위에게 달걀 10여개를 들여보낸다. 그 중의 하나의 달걀에는 편지를 숨겨두었다. 진벽군은 그 편지에서 사랑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였다. 감옥에서 고생하던 왕정위는 이 편지를 받고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자기를 향한 일편단심을 가진 진벽군에게 무한히 감동받는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두 사람의 감정은 깊어갔고, 왕정위는 <<금루곡>>을 써서 진벽군에게 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왕정위는 감옥에서 출소한다. 이후 1912년초에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른다.

 

진벽군의 성격은 결혼후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왕정위가 일본에 유학할 때, 동맹회의 여자회원인 방군영을 알게 되었다. 방군영은 재주와 용모가 뛰어나고, 대가규수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왕정위도 좋아하게 된다. 신해혁명후에 방군영은 왕정위, 진벽군과 함께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된다. 진벽군은 당시 이미 자식이 있어 공부도 하고 자식도 보느라고 매우 바쁜 편이었다. 방군영이 자주 집에 들러 일을 도우게 되는데, 그러다가 방군영과 왕정위의 관계도 어느 정도 발전이 있게 된다. 어느날 바깥에서 들어와서 방군영과 왕정위가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는 진벽군은 방군영을 '창녀'라고 모욕하고, 친구들앞에서도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게 된다. 그러자, 이를 참지 못하고 방군영은 목을 매어 자살한다.

 

왕정위가 일본의 괴뢰정권에서 총통을 할 때, 시단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여자는 방군영과 매우 닮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왕정위는 시단을 비서로 삼았는데, 어느 날 진벽군이 이 사실을 알고 사무실을 찾아와 소동을 벌이게 된다. 이 때는 왕정위가 진벽군에게 "너는 전에도 방군영을 핍박하여 죽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시단을 핍박하여 죽게 만들 작정이냐, 계속 이렇게 소동을 부리면 너와 이혼하는 수밖에 없다"고 소리쳤다. 이혼 소리를 듣자, 진벽군은 감히 더 이상 소동을 부리지는 못하게 된다. 시단도 보통여자는 아니었다. 진벽군이 와서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진벽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진언니, 화내실 필요없습니다. 사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왕선생은 저를 진정으로 좋아하는게 아닙니다. 단지 제가 방군영과 닮았기 때문에 나를 방소저로 생각해서 그러는 겁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당신 부부에게는 아무런 방해되는 게 없을 겁니다. 왕선생은 일찌기 저에게 1935년에 칼에 찔렸는데, 그 때 의사가 10년을 살 거라고 했는데, 이제 5년밖에 안남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와 왕선생은 육체적인 욕구를 가진 거도 아니고, 재물은 제가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왕선생을 존경하고, 왕선생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내가 어떤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에게는 나쁠 일이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왕선생과 같이 있는 동안에는 그의 마음을 안정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만일 당신이 이 일로 왕선생과 싸운다면, 당신에게도 좋은 결과는 없을 겁니다." 진벽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시단을 비서로 계속 있도록 하였다.

 

또 한번은 진벽군의 매부인 제민의라는 사람이 상해에서 영화제행사를 하는데, 왕정위가 그 중 어느 한 여자배우와 다정하게 사진을 찍은 일이 있다. 진벽군은 당시 광동에 있다가 신문에서 그 사진을 보고는 바로 남경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서, 왕정위의 책상에 있는 공문서를 전부 날려버리면서 욕을 해댄 일이 있다. 왕정위의 비서와 수행인원들도 다 불러모아놓고 왕정위가 여자와 같이 다정하게 있는데 왜 저지하지 않았느냐고 대놓고 욕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제민의를 찾아갔는데, 제민의는 겁을 먹고 미리 도망쳤다고 한다. 이후, 왕정위에게 몇명의 비서를 붙였는데, 한 명은 그녀의 조카이고 한명은 다섯째 동생이었다.

 

1940년 3월, 왕정위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주석에 오른다.

 

1944년 11월 10일, 왕정위는 일본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1946년 2월 18일, 진벽군은 강소성고등법원에서 "진벽군은 적군과 통모하여 조국에 반항하였으므로 무기징역에 처하고, 공민권을 박탈한다. 모든 재산은 친척들의 필수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몰수한다"는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일생을 마친다.

 

1949년에는 송경령과 하향응이 모택동주석에게 얘기해서, 진벽군이 죄를 인정하면 석방하겠다고 하는 답을 얻어내지만, 진벽군은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여, 감옥에 남게 된다.

 

1959년 6월 17일, 진벽군은 상해제남교감옥의 병원에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