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위의 죽음에 관해서는 중화민국의 역사에서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크게 나누면 병사설, 장개석에 의한 독사설, 일본에 의한 살해설등이 있다.
우선, 1935년 11월 1일, 왕정위는 암살을 당해 총을 3방 맞고도 살아남는다. 당시 국민당 제4기6중전회가 남경의 정가교에 있는 중앙당부에서 개최되었다. 그런데, 개막식이 끝나자마자 장개석은 화가난 모습으로 휴게실로 들어가 버렸다. 중앙위원 전윈이 문입구에 자리잡은 이후에도 장개석은 함께 사진을 찍으러 나오지 않았다. 부총재이던 왕정위는 친히 장개석을 모시러 왔지만, 장개석은 "오늘은 질서가 너무 없다.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면서 끝까지 나가지 않았다. 왕정위는 할 수 없이 혼자서 사진을 찍으러 나갔다.
사진을 찍은 후에, 모두 일어서려는 순간에, 기자석에서 한 명이 뛰어나와 왕정위를 향하여 3발을 쏘았다. 나중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상해의 암살조직두목인 왕아초에 의하여 기획된 것으로 원래는 장개석을 암살하려고 준비했었다는 것이다.
왕정위는 응급조치를 거쳐 생명은 겨우 보존하였다. 얼굴과 팔에 있는 총알은 겨우 꺼냈으나, 등에 박힌 총알은 경추5,6번째 늑골사이에 있고, 척추뼈를 건드리고 있어서 여러가지로 노력했지만 총알을 꺼내지 못하였고, 이 총알은 왕정위의 몸 속에 박혀 있게 되었다.
병사설
왕정위의 사인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알려지고, 통설로 인정되는 것은 옛병이 도져서 치료가 효험을 보지 못하고 일본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1943년 4월, 왕정위는 남경에서 '환도대전'(수도를 다시 남경으로 옮기는 대회)을 개최한 후, 일본 '대사'로부터 국서를 받았다. 중경의 장개석정부에 대항하는 남경의 왕정위정부의 성립을 의미했고, 왕정위는 친일본적인 정책을 기조로 하였다. 1943년 11월말의 어느날 왕정위가 부인 진벽군과 군수물자조달문제를 논의하고 있는데, 일본군총참모장인 송정태랑과 견양건이 방문하자, 급히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구르고 말았다. 그리고 8년전에 다친 척추의 상처가 마침 계단의 모서리에 부딪쳐 그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였다. 12월 19일, 왕정위는 남경의 일본육군의원에 입원하고, 외과군의관인 후등의 수술을 거쳐 늑골에 박혀 있던 총알을 꺼집어낸다. 총알을 꺼집어낸 후 진벽군은 울다가 웃음을 보였으며, 남경의 많은 관료들도 왕정위를 찾아와 축하의 말을 건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마도 탄두제거수술 때 신경을 건드렸는지, 왕정위의 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고, 대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으며,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즉, 진벽군이 사방에 명의를 구하고 있을 때, 무석에 "유일첩(劉一帖)"이라는 명의가 있어, 그가 만든 고약을 한번만 붙이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진벽군은 유일첩을 청해서 고약을 한 장 만들어 왕정위의 등에 붙였는데, 그 다음날 병세가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왕정위/진벽군 부부는 기뻐하며 다시 유일첩을 찾아가서 후하게 돈을 건네고 다시 진맥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진맥한 후에 다시 한 장의 고약을 만들어주고는 떠나갔다. 그런데, 이번 고약을 등에 바르자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다시 유일첩을 찾았으나, 유일첩은 이미 어디론가 간데가 없고, 진벽군이 주었던 돈과 편지가 한장 남아 있었고, 그 편지에는 "후한 예는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여도 걱정입니다. 평생 약을 한 첩만 썼는데, 사람에게만 썼지, 개에게는 쓴 적이 없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물론 지어낸 얘기일 것이다.
1944년 3월에 거의 전신마비에 이른 왕정위는 일본천황에 그에게 보내준 비행기를 타고 일본의 나고야 공항에 도착한다. 그리고는 나고야제국대학의 부석병원의 특실에 입원한다. 나고야제국대학의 전문가들로 팀을 구성하여 제등(사이토)교수가 주집도의사가 되어 수술을 하였는데, 왕정위의 척추는 이미 변형되었고, 골막에 염증이 생겨 있었다. 수술후에 왕정위의 몸과 머리는 석고로 고정시켰는데, 이 때의 왕정위는 이미 원기를 상하여, 몸이 강시와 같았다고 한다.
1주후에 X선검사를 거쳤는데, 왕정위의 수술한 곳이 접합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수축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의 체온도 내려가기 시작했다. 빈혈로 인하여 두번에 걸쳐 수혈을 하였고, 왕정위는 후사를 준비했다. 그가 구술한 내용을 진벽군이 기록하여 <<최후의 심정>>이라는 내용의 유서로 남겼다. 왕정위는 유서에서 극력 자기의 행위가 매국적이 아님을 변호했으며 자신은 "곡선구국(曲線救國)"의 노선을 걸었다고 변명했다.
11월 9일 9시, 연합군의 비행기는 나고야를 공습했으며, 연합군의 150대의 비행기가 나고야 전역을 공긋했다. 진벽군과 자녀들은 위중한 왕정위를 침대채로 지하실로 이동시켰다. 이 때 일본의 날씨는 매우 추었고, 지하실에는 난방설비가 없었다. 나중에 병원의 피를 다 써서 나고야와 다른 지방의 교통은 두절되었다. 밖에서 혈액을 가져올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혈액형이 같은 큰 아들 왕맹진, 둘째딸 왕문빈, 셋째딸 왕문제가 부친을 위하여 피를 뽑아서 수혈하곤 했다. 그러나 이것도 미봉책에 불과했다. 공습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왕정위는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1944년 11월 10일 오후 4시 20분에 호흡을 멈췄다. 왕정위가 암살당해서 살아났을 때, 의사는 일찌기 앞으로 10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말대로 되었다.
장개석에 의한 독살설
왕정위가 일본에서 병사했다는 말에 대하여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해시정협문사자료공작위원회가 편찬한 <<항전풍운록>>에서는 대립(戴笠, 당시 국민당의 특무대장)이 홍교의원의 간소사를 시켜, 왕정위가 먹는 약에 유리가루를 넣게 하여 홍교의원에서 죽게하였다는 설을 내놓았다. 1983년 9월 16일, 홍콩의 <<광각경>> 제1,2,3기에서 곽실자가 저술한 <<태평양전쟁시기의 몇개 사실의 대폭로>>에서도 왕정위는 일본에서 병사한 것이 아니라, 국민당에 의하여 상해홍교의원에서 독살되었다고 하였다.
곽실자에 의하면, 1944년 3월, 왕정위는 일본으로 치료를 위해 날아갔는데, 일본의 명의 소흑(오구라)가 집도하여 수술하였고, 안전하게 총알을 빼냈다고 한다. 이후 왕정위는 몸이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비밀리에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일본측에서 남경에 주둔하는 일본군에게 왕정위는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3개월은 정양한 후에 활동하도록 하라는 전보를 보냈는데, 이 전보를 국민당의 정보기관에서 풀어내고, 장개석에게 보고했다.
왕정위가 일본으로 간 후에도 국민당에서는 암살기회를 노렸으나, 방비가 삼엄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대립은 조호이산지계를 쓰기로 하고, 진요조(진벽군의 남동생)이 광주의 골동품점에서 물건을 보고 있을 때 암살을 했다. 과연 진벽군은 급히 광동으로 돌아가 후사를 처리했다. 진벽군이 광동으로 간 후에, 홀로 일본에 남은 왕정위는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고집했고, 주불해의 안배하에 왕정위는 비밀리에 상해로 돌아오고 애인인 시단(施丹)을 불러 간호하게 한다.
왕정위가 상해로 가자, 중문의 비밀암호로 광주에 있는 진벽군의 주소지로 보냈고, 그가 이미 상해로 돌아왔음을 밝혔다. 진벽군도 비밀암호로 왕정위에게 절대 공개장소에 나타나지 말고, 이름을 바꿔 상해홍교의원에 입원해 있으라고 얘기한다. 이 전보는 모두 중경의 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 특종기술연구실 중문조에 의하여 획득되고 해석되었다. 장개석은 대립에게 암살을 명한다.
대립은 사람을 홍교의원에 보내서 의사, 간소사를 매수하고, 왕정위에게 약을 줄 때, 비밀리에 무색무미한 만성독약을 넣었으며, 왕정위는 결국 독살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에 의한 살해설
또 하나 유행하고 있는 주장은 일본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1944년 3월,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후, 왕정위는 주로 독이 뼈에 침입하여 병변이 생겼다는 것이다. 제1외과부의 상야(우야노) 박사는 즉시 두번째 수술을 진행하여, 뼈에서 독을 발라내는 수술을 한다. 젊은 조수 귀전양굉이 구체적인 수술을 집도한다. 수술방안을 마련함에 있어서 상야박사는 흉추골 하나를 제거한 후 병자의 골격에서 뼈 하나를 발라내서 흉추골로 만들어 이식하는 것이ㅓㅆ으며, 원래의 별골의 신경에 대한 압박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의사인 흑전구웅(구로다)은 두번째 방안을 내놓았는데, 뼈에서 독을 제거한 후 그대로 놔두면 자연봉합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고, 흉추골을 만들어 이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흑전구웅의 방법은 병자에게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판단하고 상야박사와 구전은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술하기 30분전에 병원측에서 돌연, 이번 왕정위의 수술은 반드시 두번째 방안으로 시행하라고 지시가 내려온다. 구전은 어쩔 수 없이, 집행한다. 수술은 그날 밤에 진행되었다. 한주일 후 X선검사를 했는데, 자연봉합이 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이미 수축되어, '뼈를 이식하는 수술'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렷다. 구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병원측이 왜 수술방안을 바꾸었고, 60세가 되는 노인에게 '자연봉합'이 되는지를 시험하는 시험적인 수술방식을 채택하였는지. 그는 여러차례에 걸쳐서 약혼녀인 소립순자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확인을 부탁했다. 소립순자의 부친은 일본군부 정보처의 요원이었고, 모든 기밀정보에 대하여 접근이 가능했다. 순자는 애인의 요청에 따라 부친에게 요청하고, 군부의 비밀지령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원래, 일본의 군부에서는 자연봉합에 대하여 시험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병원측에서는 왕정위가 이미 척추뼈가 부서진 장애인이 되었지만, 이것을 진벽군에게 그대로 얘기한다면 '시험품'이었던 상황이 공개될 것이므로, 그들은 왕정위의 석고상을 깨고, 다른 방음방으로 옮긴 후, 전신마취를 시키고, 옆으로 누워서 안에 있는 벽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하고, 손에는 프랑스소설 하나를 들려주었다.
진벽군이 병원으로 오자, 병원측은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그녀를 병실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유리창밖에서 안을 보게 하고 말은 걸지 못하도록 하였다. 진벽군도 어쩔 수가 없이 낭패해서 남경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술을 통하여 왕정위는 흉추골에 상처를 입었는데, 흉추골에 부러질 뿐아니라, 경추골도 점차 변형되었다. 원래 억지로 누워 있었으므로 나중에는 머리의 중량도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측은 또 다른 절묘한 생각을 해냈는데, 특별히 제조한 강철테를 왕정위의 아랫턱에 고정시키고, 그의 머리를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기계의 방법으로 머리와 경추골을 직선으로 만든 것이다. 마치 목을 매어 자진하는 모습과 비슷했다. 1944년 11월 10일에 이르러 왕정위는 이런 상태로 목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내용은 거의 소설에 가깝다. 일본으로서는 친일정권을 유지해주는 왕정위를 죽일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그저 중국인들의 상상력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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