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북경원인(北京猿人) 두개골의 행방

중은우시 2006. 4. 17. 18:15

중국의 주구점(周口店, 저우커우디엔)에서 발견되었던 북경원인의 두개골은 현재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고인류학에 있어서의 중요한 발견중의 하나가 그 증거를 잃어버린 것이다.

 

1. 두개골화석의 미국운송계획

 

1929년 12월 2일, 고인류학연구에 있어서의 의미있는 날이다. 바로 북경원인의 두개골이 발굴되기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다. 북경원인의 두개골을 발견한 것은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하는 학설에 유력한 증거를 제공한다. 1936년, 연구원의 노력으로 다시 한번 사람을 흥분시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해에 다시 3개의 성년 원인의 두개골화석이 발견된 것이다.

 

1937년은 유적발굴의 황금시기였다. 그러나, 노구교사건(일본에 의한 중국화북지역침략)이 터지면서 주구점의 발굴업무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북경 협화의원에 설립된 신생대연구실에서 화석에 대하여 정리,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협화의원은 미국의 록펠러재단이 돈을 내서 만든 병원이고, 일본군도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협화의원의 북경원인화석을 건드릴 수는 없을 것으로 보았었다.

 

1941년이 되면서, 일본과 미국의 관계가 긴장되었다. 당시 일본군에 점령되어 있던 북경에서 일본군은 중립국인 미국이 북경에 두었던 기관들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북경원인 두개골화석을 보관하였던 협화의원은 미국재산이었지만,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더이상 안전할 수 없었다. 이 상황하에서 신생대연구실은 북경원인화석을 더욱 안전한 보관장소로 옮길 것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에는 세가지 방안이 있었다. 첫째는 화석을 국민당정부가 소재하는 후방 중경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환경하에서 장거리운송을 하는 것은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었다. 둘째는 북경에서 묻어두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에 점령된 지역에서 안전을 보장받기는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셋째는 미국으로 운송하여 보존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세번째 방안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고고학자인 호승지(胡承志)의 회고에 따르면, 공동으로 화석을 발굴한 중국과 미국이 체결한 협정에 따르면, 주구점에서 발굴된 모든 화석은 중국의 재산이고, 해외로 운송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 미국공사관의 담당자는 화석을 수령하기를 거부했다. 나중에 국민당정부의 협력하에, 중경에 있던 미국주중대사의 동의와 위임을 받아, 북경에 있던 미국공사관이 이 진귀한 고인류화석을 접수하였고, 안전하게 미국으로 보내어 보존하려고 준비하였다.

 

출발전에, 호승지는 화석을 정성스럽게 포장하였다. 그는 자신이 최후로 북경원인화석을 본 중국인이며, 이후 중국인중 그 행방을 알거나 본 사람은 없다고 탄식했다.

 

2. 미군의 비밀운송

 

1941년 12월 5일 아침, 미국해군 해병대의 전용열차는 북경을 출발하였다. 열차에는 북경원인의 두개골화석이 실려있었다고 전해진다. 계획에 따르면 열차는 진황도에 도착한 후, 화석은 해리슨프레지던트호 배에 실려 미국으로 운송될 예정이었다.

 

이번 운송의 책임자는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복귀하는 해군 해병대의 퇴역군의관 폴리였다. 두 상자의 화석은 바로 그의 27개의 행낭중에 포함되어 기차로 운반되었다.

 

폴리에 따르면, 이 일은 당시에 아주 기밀이었다고 한다. 진황도에서 폴리의 조수인 데이비스는 이 특수한 화물을 수령했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내가 가서 그 상자를 받아왔다. 27개의 상자가 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모두 내 방에 놓았다.

 

폴리등은 다음날 해리슨 프레지던트호를 타고 귀국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이 바로 1941년 12월 8일이었는데,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한 날이고,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날이며,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날이었다. 일본군은 신속하게 미국의 주중국 각 기관들을 접수했다. 미해군 해병대의 진황도에 있는 병영도 일본군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폴리와 데이비스는 포로가 되었다. 천진의 포로수용소에서 폴리와 데이비스는 진황도의 병영에서 운송되어 오는 화물을 받았다. 그러나, 북경원인의 두개골은 이미 행방이 묘연했다.

 

3. 일본군의 이상한 행동

 

화석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는가? 반년이 지난 후, 일본 동경대학교수인 상곡부(常谷部)와 조교인 고경동이(高景東二)는 갑자기 영문판 북경신문에 협화의원에 보관되었던 북경원인 두개골이 도둑맞았다고 실었다. 일본인들은 마치 이러한 뉴스를 전함으로써, 일본군은 진황도에서 두개골화석을 발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같았다.

 

빠른 시일내에, 북경원인의 두개골을 찾는 행동이 시작되었다. 주의할 점은 일본인이 추적업무에 너무나 힘을 들여서 했다는 점이고, 거의 모든 발굴업무에 참여했던 인원들이 모두 조사를 받았다.

 

고인류학자인 배문중(裴文中)은 감옥에 48일간이나 갇혀 있었다. 그의 아들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 때는 1944년 5월초의 한 아침이었다...몇명의 일본인들이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나의 부모가 거주하는 북옥으로 들이닥쳤다. 10여분이 지나서 일본인은 부친을 밀고 갔다. 인본헌병대에서 부친에게 "북경원인"의 행방에 관해서 물었다. 나의 부모는 모두 "모른다"고 대답했다. 모른다고 대답하자 일본인은 바로 때리기 시작했고, 가장 심하게 할 때는 고추가루물을 강제로 넣었으며, 부친은 정신을 잃었다. 가장 나빴던 것은 부친에 따르면, 풀려나는 그날에 다시 심문이 있었는데, 그 때 "배문중, 너는 총살감이다, 너는 더 할 말이 있느냐"고 하였다는 것이며, 부친에게 종이와 펜을 주고 유서를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부친이 유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일본인들은 껄껄 웃으면서 "배문중 너는 오늘 풀려나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고인류학자인 주국흥(周國興)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 한 소식이 들렸다. 이 것을 이미 천진에서 찾았다고. 그 후에 바로 이상하게도 구류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풀려났다. 만일 일본헌병대가 손에 넣지 않았다면, 어찌 그리 쉽게 사람을 풀어줬겠는가?

 

1945년 8월, 일본은 무조건투항을 선언했다. 얼마되지 않아 일본은 공고를 발표하여, 이전에 약탈해서 동경에 가져왔던 일련의 고인류화석은 약탈했던 발굴도구와 함게 연합군당국에 넘기고, 중국에 반환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연합군 총사령부에서 받은 일본귀환물품목록중에 북경원인화석은 보이지 않았다. 연합군 총사령부는 중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주일 연합군을 움직여 광범위하게 수색하였으나, 전혀 소득이 없었다.

 

4. 주구점의 재발굴

 

1949년 9월, 주구점의 발굴자들은 화석을 찾지 못하자, 다시 주구점으로 눈길을 돌렸다. 새로운 발견으로 이미 잃어버린 아쉬움을 보완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때 주구점의 용골산에는 이미 풀이 무릎까지 자랐고, 가시와 나무들이 자라났으며, 곳곳에 일본군이 남긴 상흔이 남아 있었다. 그 때 사무실건물도 이미 없어졌고, 온 산에 가득하던 나무도 이미 다 베어져 있었다.

 

주구점을 발굴하는 계획은 바로 허가되었다. 9월 27일, 12년간 중단되었던 발굴업무가 다시 시작되었다. 고인류학자 가란파(賈蘭坡)와 기술자들은 먼저 1937년에 메웠던 흙을 다시 발굴하기 시작했다. 발굴과정에서 그들은 세개의 이빨을 얻었다. 이것은 당시 유일하게 중국인의 수중에 남아 있던 북경원인화석의 진짜 표본이었다.

 

이후, 계속하여 몇차례에 걸쳐 발굴을 시도했고, 2개의 북경원인 이빨과 다른 동물화석을 발견했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1966년 고인류학자 배문중이 주재한 발굴시에 1개의 악골과 1개의 침골을 발굴하였는데, 그들은 분명히 하나의 두개골에 속한 것이었고, 새로 발견한 두개골조각은 1931, 1936년의 제5호 두개골의 두개의 전골과 합치니 하나의 완전한 두개골이 되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들은 동일한 인체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이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북경원인 두개골의 표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