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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경극(京劇)은 죽음의 길로 들어설 것인가?

by 중은우시 2006. 7. 23.

글: 北方可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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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극은 죽음의 길로 들어설 것인가? 지방희곡은 소리없이 사라질 것인가? 이 문제는 지금으로서 바로 그렇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때문이다. 희곡의 관중은 대체로 19세기말이래로 계속 감소추세를 보여왔고, 지금은 사람들이 "구조"해야한다는 목소리를 높일 정도이다. 그러나 희곡은 여전히 희곡팬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의 거시적인 감각으로는 "희곡은 결국 사망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추세인 듯하다. 이 주제를 얘기하자면 미디어에서의 관련보도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데, 그 보도에서는 "조치를 잘 취해서 경극을 구제하고 보호해야 하고, 경극을 진흥시켜야 한다"고도 하고, 또한 "경극은 국수(國粹)이고, 국극(國劇)이고, 조상이 남겨준 유산이다" 등등. 나는 이런 말들을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다.

 

"구제, 보호" 이런 말들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 구제라는 것은 긴급하게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구조하는 것이고, 보호하는 것은 문제가 발견된 상황하에서 손해를 더 입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할 하나의 전제는 바로 구제당하는 것과 보호받는 대상은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거나 혹은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생명이 위협받거나, 또는 우리의 생존환경이 파괴받고 이로 인하여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 경우 등이다. 만일 경극을 구제하고 보호하고 진흥하고 널리 알리고 모방하여 배우도록 조치하여야 한다면, 전국각지의 그렇게 많은 지방희곡들도 마찬가지로 구제하고 보호하고 진흥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보면 나는 보통화를 보급시킨 일이 떠오른다. 만일 우리가 경극을 구제하는 것처럼 북경지방의 말을 구제하고, 보급하면, 광동화(월어), 민남화(복건화), 이 말, 저 말, 많은 지방말들도 구제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보통화를 과연 보급해야 하는가, 또 어떻게 보급해야 하는가? 나는 일찌기 <<상해말을 구제해야 하는가?>>라는 글을 블로그에 쓴 일이 있는데, 바로 상해의 여론계에서 "상해화를 구제하고 보호하여야 한다"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운동이 있어서 이를 비판하기 위하여  썼었다. 거기에서 언급한 것은 하나의 사물발전의 일반법칙이다. 이것은 바로, 자생, 발전, 유행, 쇠락, 사망이다. 자생, 발전은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다. 쇠락, 사망은 필요가 없어서 자연도태되는 소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의 규율에 따라야 하고, 자연의 규율을 존중해야 하며, 절대 어떤 것을 구제, 보호하여야 한다고 소리쳐서는 안된다. 특히 정부지도자들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려면 반드시 전문가에게 물어보고, 논증을 하고, 청문회를 열고 하여 사실을 명확히 인식한 후에 행동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

 

경국 및 기타 지방희곡의 관중이 갈수록 적어지고, 심지어 문전냉락(門庭冷落)의 정도에 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기본적인 사실이다. 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희곡에서 얘기하는 리듬이 너무 느리다는 것, 하나의 창단이 또 하나의 창단으로 이어지는데, 어디에 스토리를 전개할 공간이 있겠는가? 사람들의 현재 생활을 리듬이 빠르다. 어디 쓸데없는 소리를 들어줄 시간이 있겠는가. 내일 아침에는 출장을 떠나야 되는데....리듬이 비교적 빠르고, 시간과 공간을 수시로 넘나드는 영화, 드라마와 같은 신선한 볼거리가 대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희곡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노래소리"가 시종일관된다는 것이다. 말하면서 노래하는데, 심지어는 노래가 위주이고, 노래를 통하여 이야기를 전달한다. 만일 단순히 노래를 즐긴다면 선율의 아름다움을 즐긴다면 현대인들은 음악회를 갈 것이고, 음악공연을 보러 갈 것이다. 그들은 귀에 이어폰을 끼우고 유행음악을 귀로 들을 것이다. 강조할 것은 이러한 예술형식은 모두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서 전진하고,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혁신한다"는 결과이다. 즉, 사람을 위주로 한 것이다. 사람이 변화하면 음악예술도 새로운 형식으로 변화해야 한다. 맞다. 희곡이라는 이 유형은 확실히 옛날 것이고, 전통적인 것이다. 일찌기 대중의 사랑을 받아 휘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이 오래되었다는 것만으로 그리고 조상들이 물려주었다는 것만으로 "영원"할 수 있을까? 만고불변이 되어야 할까? 이것은 정말 멍청한 단순함이다. 같은 이유로, 텔레비전이 나타남으로써 영화의 관중은 대폭 감소했다. 그렇다고 영화를 구제하고, 영화를 보호하고, 영화를 진흥시키자고 얘기할 것인가? 텔레비전을 부숴버리자고 얘기할 것인가? 인터넷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평면매체, 시청매체들이 전례없는 충격을 받았는데, 우리는 이것때문에 전세계의 광케이블을 다 잘라버려야 할 것인가? 하루종일 경곡을 흥얼거리던 청나라 사람들은 변발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우리도 오늘날 조상들의 법도에 따라 변발을 하여야 할 것인가? 시대는 계속 변화한다. 문명은 변화과정에서 계속 새로워진다. 인류는 변화하는 과정에서 더욱 풍부한 생황양식을 찾아낸다. 역사는 이렇게 하루하루 전진하는 것이다.

 

가치가 있는 문화재는 보호하여야 한다. 그러나 보호는 역사를 연구하고 이로써 현재와 미래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재는 관련된 역사의 정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경극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것이 단순히 인문연구를 위한 것이라면, 좋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분명히 '진흥'시키겠다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나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에 의하여 도태될 것이 인력으로 진흥시킬 수 있을 것인가" 두고 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