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문학일반

금병매(金甁梅)의 진정한 저자는 누구인가?

중은우시 2006. 12. 3. 23:04

<<금병매>>는 명대사대기서(明代四大奇書)의 하나이고, 청나라때 소설점평가(小說點評家)인 장죽파(張竹坡)에 의하여 "제일기서(第一奇書)"로 칭송되는 작품이다. <<금병매>>는 <<수호전>>에서의 "무송살수(武松殺嫂)"의 장면에서 서문경(西門慶)을 주인공으로 하는 시정의 생활을 그려냈고, 송대의 인물을 빌어 명대의 사회부패를 폭로했다. 책이름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해석은 서문경의 세명의 중요한 여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지었다는 것이다. "금"은 반금련(潘金蓮)을 가리키고, "병"은 이병아(李甁兒)를 가리키며, "매"는 방춘매(龐春梅)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 책의 사상과 내용은 풍부하고, 예술기법도 아주 숙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세상에 나오면서, 저자는 자기의 실명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저자문제에 대하여 시종 큰 흥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금병매>>의 진정한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정설이 확립되지는 않았다.

 

<<금병매>>의 저자는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그의 실명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작자가 산동의 지방에서 벌어진 일과 사람에 대하여 적었고, 저자이름중에 "난릉"이라는 글이 있고, 여기에 작품에서 쓴 언어가 기본적으로 북방화라는 점을 고려하여 작자를 산동사람으로 보는 것이 다수이다.

 

어떤 연구자는 저자를 이개선(李開先)이라고 본다. 이개선은 산동사람이다. 가정연간에 진사를 지내고, 40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했다. 그의 신세내력과 생애 및 사곡등 시정문학에 대한 깊은 애호와 수양은 금병매의 작자로서 부합한다는 것이다. 작품 자체도 이개선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개선의 작품인 <<보검기(寶劍記)>>에서도 <<수호전>>의 고사를 인용해서 썼다. <<금병매>>와 이개선의 <<보검기>>를 비교하면, 비슷한 점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금병매>>는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와 같이 민간에서 장기간 전해내려오던 것은 작자가 정리한 것이며, 이것을 정리하여 쓴 사람이 바로 이개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작자를 다른 산동사람인 가삼근(賈三近)이라고 본다. 그는 가정, 만력년간에 대문학가이다. <<금병매>>라는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대량의 역현(嶧縣)사람들만이 쓰는 방언과 속어를 쓰고 있는데, 역(嶧)을 예전에 난릉(蘭陵)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가삼근의 평생사적을 보고, 그의 경력, 기호, 저작목록등을 보면 그가 난릉소소생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장 유행하는 설은 가정연간의 대문학가인 왕세정(王世貞)이 바로 <<금병매>>의 작가라는 것이다. 왕세정은 자가 원미(元美)이고, 호가 봉주(鳳州), 연주산인(燕州山人)이며, 남경 형부상서를 지냈다. 명나라때의 유명한 문학가, 사학가이다. 왕세정은 재주와 학문이 뛰어났고, 이번룡, 사진등과 합쳐서 "후칠자(後七子)"로 불리운다. 전후7자중에서 가장 박학다재하였던 인물이다. 이번룡이 사망한 후, 그는 문단에서 20년간 영수로 지낸다.

 

그는 관리로서 청렴하고, 권세가나 귀족에게 영합하지 않았다. 동림당의 양계성이 엄숭의 모함하에 감옥에 갇히자, 그는 탕약을 자주 보내주었고, 양계성의 처를 대신하여 상소문을 초안해주었다. 양계성이 해를 당한 후, 그는 양계성을 위하여 장례를 지내주었다. 부친이 엄숭에 해를 입자, 그는 장시 <<원강류검산강>>과 <<태보가>>등을 지어, 엄숭 부자의 죄악을 폭로하였다. 그는 관리로서도 잘 지냈고, 재능있는 사람을 발탁하기를 즐겨했다. 청백한 생활을 하고, 간신들과 어울리지 않아, 당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가 <<금병매>>를 지은 것은 부친을 위하여 복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왕세정의 부친은 <<청명상하도>> 가짜 작품을 바쳤다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적발되어, 당대의 권신 엄숭과 엄세번 부자의 미움을 산다. 그리고는 결국 죽임을 당한다. 왕세정은 부친의 복수를 위하여 특히 <<금병매>>를 지어 엄세번에게 보내어 그의 환심을 산다. 책의 내용은 엄숭부자를 빗댄 것이며, 그들의 각종 악행을 들춰내고, 책에 독약을 발라두었다. 엄세번은 이 책을 다 읽고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명한 학자 오함(吳晗)은 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대량의 정사, 야사, 필기와 사료를 근거로 하여, 이를 반박했다. <<청명상하도>>와 왕세정가족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왕세정의 부친은 가짜 그림을 바쳐서 미움을 산 것이 아니라는 것과 엄세번이 중독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로써 <<금병매>>는 왕세정의 작품이라는 결론을 부정했다. 오함은 그리고 대량의 산동방언이 사용된 것을 근거로 하여, 왕세정이 비록 산동에서 3년간 관리를 지낸 경험은 있지만, 현지 사람처럼 방언을 사용하여 이러한 대작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금병매>>는 만력10년 내지 30년의 작품이므로, 작자는 절대 왕세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연구자들도 오함의 견해를 지지한다.

 

1980년대에 중국에서는 언어학자들이 글을 발표하여, 저자가 산동출신이라는데 회의를 표시했다. 이유는 작품중에 적지 않은 용어가 현재의 산동방언에 없는 것이라는 것이고, 오히려 오(吳) 방언에서 자주 쓰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금병매는 오방언을 쓰는 사람이 썼을 것으로 대담하게 추정했다. 1930년대에 영국의 한학자 아서 비에리는 <<금병매>>의 작자가 서위(徐謂)일 것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었고, 1960년대에 소흥문리학원의 강사인 반승옥이 출판한 <<금병매신증>>에서 이를 실증한 바 있다.

 

반승옥의 <<금병매신증>>은 먼저 시대배경에서 <<금병매>>를 쓴 시기를 명나라 가정년말에서 만력 17년약간 이후까지로 추정했고, 이것은 바로 서위의 생활시대와 들어맞는다. 지리원형, 풍속, 방언등의 여러 각도에서 보면, 소설은 소흥문화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금병매>>를 송을 빌어 당을 묘사한 것으로 보고, 채를 빌어 엄을 묘사한 것이라는 설은 소흥에서 당시 반엄숭의 기운이 가장 드세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서위, 도망령, 심련등을 대표로 하는 반엄숭인사들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심련은 바로 엄숭에게 해를 입어 사망했고, 이로써 서위가 심련의 억울한 죽음에 분개하여 <<금병매>>를 썼을 수 있다. 그 외에 서위는 만년에 자기가 40년의 기간을 들여 장편소설 하나를 완성했음을 암시한 것이 있는데, 금병매의 용어, 문풍은 모두 서위와 일치한다. 이외에 작자의 특수한 심리상태도 서위의 처지와 일치한다고 한다.

 

중국고전문학의 명저 <<금병매>>가 나타난지 400여년동안 작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창작배경은 무엇인지? 소소생은 도대체 누구인지? 이것들은 모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다. 이런 일련의 의문들은 후세인들의 해답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