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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전용기 스튜어디스의 눈에 비친 모택동

by 중은우시 2006. 7. 20.

나는 곽계경(郭桂卿)이라고 한다. 전용기에서 20여년을 일했으며, 신중국 제1차 전용기서비스요원이었다.

 

말이 제1차이지, 사실은 두 사람이었다. 나를 빼고, 또 한명 왕숙방(王淑芳)이라는 동지가 있었고, 우리 두 사람은 "공중소저(스튜어디스)"의 선례를 만들었다.

 

그 때 전용기의 임무는 매우 많았다. 우리는 모택동 주석, 주은래 총리 그리고 다른 중앙의 지도자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었다. 세월이 흘러서, 우리는 어린 아가씨에서 흰머리가 난 할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과거는 좋은 술과 같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더욱 또렷해진다.

 

"동방의 붉은 해, 태양이 떴네. 중국에 모택동이 나왔다네. 그는 인민을 위하여 행복을 가져다 주네. 그는 인민을 구하는 별이라네..." 모택동 주석은 일반 백성의 마음 속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내가 스튜어디스가 되고 자주 모택동 주석을 접하면서 알게 된 것은 모택동 주석은 비록 세상 사람들이 다 알듯이 세상에 둘도 없는 위인이지만, 사실 그는 또한 보통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근검하고 질박한 농민이었고, 책에서 손을 떼지 않는 학생이었으며, 사랑을 느끼는 남편이었고, 선량하고 자애로운 부친이었다. 그리고 언어의 마술사이고, 유머의 대가였다.

 

처음으로 전용기를 타고 모택동주석을 위하여 서비스하게 되었을 때, 격동, 흥분외에 두려움이 있었다. 그 두려움은 아마도 일종의 경외의 마음으로 인한 것일 것이고, 감히 위인의 눈빛을 받기 어렵다는 심리였을 것이다.

 

멀리서 모택동 주석의 자동차가 비행기를 향해서 달려오는 것을 보자, 심장은 펑펑 소리를 내면서 뛰었다. 창문에 엎드려서 모택동 주석이 한걸음 한걸음 비행기를 향하여 걸어오는 것을 보았고, 모택동주석이 비행기의 문앞에 도착하자, 화살처럼 공구를 넣어두는 조그만 칸으로 숨어서 감히 나오지를 못했다. 비행하는 동안, 나는 계속 모순된 마음으로 내심 싸우고 있었따. 객실칸으로 연결된 작은 문을 열고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문은 사실 계속 열려 있었다. 당연히 자기가 해야할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 모주석을 모시고 따라온 공군부참모장 하정일이 나를 혼내지 않았으며, 그가 손수 모주석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모주석이 비행기를 내리고 나서야, 작은 칸에서 튀어나올 수 있었고, 비행기 문앞까지 달려가서 몸을 반쯤 내밀고, 눈으로 모택동 주석이 한걸음 한걸음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생각도 못하게, 모주석이 막 차에 올라타려는 순간에, 그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고, 그를 쫓아가던 내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저 여자는 누구지?" 모주석이 고개를 돌리면서 뒤에 있는 공군부참모장 하정일에게 물었다.

"아, 서비스요원입니다. 공중서비스요원."

하정일은 모택동 주석의 시선을 따라서 나를 쳐다 보았다.

"공중서비스요원? 홍색공중소저!"

 

하정일은 나를 향하여 손을 흩들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모택동 주석의 근처로 다가갔다. 모주석의 키가 컸으므로, 나를 볼 때 약간 허리를 숙였다.

 

"이름이 뭐지?"

"곽계경입니다."

"곽계경. 남자아이 이름이구나. 내가 보기에는 곽자의(郭子儀)라고 하면 어떨까싶은데. 곽자의는 알지? <<타금지>>를 봤나? 곽자의는 민족영웅이야."

 

이것이 내가 본 모택동 주석이었다. 보통사람이면서, 편하게 대하고, 자애롭고 선량한 눈빛을 가지고, 사람들을 편하게 대해주는 뚱뚱한 늙은이였다.

 

최근들어 모택동에 관한 일부 다튜멘터리작품들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까지 모택동 주석이 위대하고, 영명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모택동 주석이 유머스럽고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사람들은 위대함과 유머스러움을 함께 연결시켜서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한번도 이 두가지를 한꺼번에 연결시키려고 하지 않았었다. 이것은 중국의 수천년간의 문화전통에 사람들이 속박되어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통관념상으로 위인은 그저 "정인군자"여야 하고, 사상에 있어서도 정취가 없고, 말하는 것마다 철리가 넘치고 장난을 치지 않는 "밀랍인형같은" 사람이어야 했다. 특히 임표가 발명한 "한 마디로 만 마디를 감당한다"는 "명언" 이후에는 누구도 모택동 주석이 뛰어난 유머의 대가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접촉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여러번 전용기에서 모택동 주석을 위하여 서비스했으므로 비교적 잘 알고, 말도 아주 편하게 하였었다. 한번은 모주석이 우리와 가볍게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 모택동 주석은 문건도 보지 않고, 책도 보지 않으면서 얘기를 가볍게 나누는 일은 아주 적었다. 한번은 기류가 좋지 않아서, 비행기가 요동을 치는 일이 있어 시력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모주석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서 내려 놓았다. 모주석은 그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거부하지 않았다. 내가 몸을 돌려서 다른 일을 하려고 갔더니, 모주석은 다시 책을 들고는 읽기 시작했다. 얘기를 나누는 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넌 아이가 몇이냐?"

"뭐라고요?!"

 

나는 모주석이 그런 걸 물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런데, 모주석은 싱긋이 웃으면서 또 말했다.

 

"넌 아이가 몇이냐?"

"전 아직 결혼도 안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제대로 들었고,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결혼안하면 아이가 없는 거냐? 왜그렇지?"

"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같이 있던 섭자룡, 하정일이 모두 가가대소를 하였고, 모택동 주석도 허리를 펴서 등받이로 기대면서 웃었다.

 

천생이 낙관적이고, 명랑하고, 솔직하며, 하고싶은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지위가 높은 특수신분이라는 것으로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는 일은 드물었다. 즐거우면, 크게 소리내서 웃고, 슬프면,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단지 마음이 좁고 위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별 것도 아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쁠 때도 감히 웃지 못하고, 슬플 때도 감히 울지 못하며, 생활이 침중하고 고통스럽게 된다.

 

모택동 주석은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한번도 일부러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만들거나 유지하려고 꾸미지를 않았다. 어떤 때에는, 모택동 주석이 비행기를 한참 동안 타지 않았던 때에는, 보자마자 친근하게 나를 부르면서 "소곽(小郭). 오랫동안 못봤어. 잘 지내고 있어?"라고 인사를 했다.

 

한번은 모주석이 이렇게 물었다.

 

"소곽아. 집에 돈을 부치니?"

"안부칩니다."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안부치면 안되지. 부모님이 너를 십여년간이나 힘들게 길렀는데, 부모의 기른 은덕을 잊으면 안돼."

 

모주석이 이처럼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급히 그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는 제 돈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집에 편지는 쓰나?"

"예. 씁니다."

 

모택동주석의 표정을 보니 조금 풀렸다. 내 마음도 조금은 안정되었다. 모주석은 다시 나에게 당부했다.

 

"반드시 집안에 자주 편지를 써서 잘 지낸다고 해라. 자식이 천리먼길을 너서면 모친은 걱정하는 법이다. 편지라도 않으면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시겠니. 어른 들에게 걱정을 끼쳐드려서는 안돼."

 

아마도 사람이 나이가 들면 쉽게 슬퍼하고 감상적이 되나보다. 아마도 예전에 부모들에게 효심을 다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노년에 아들이 생각난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모택동 주석은 위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명한 지도자이고, 일대의 인걸일 뿐아니라 인자한 어른이고, 어진 부친이며, 자상한 남편이다. 이것이 내가 본 모택동이고, 내 마음 속의 모택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