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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양개혜는 모택동이 죽였는가? (1)

by 중은우시 2006. 6. 2.

작자 : 유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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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누라가 죽었고, 너는 남편이 죽었다.

내 마누라와 네 남편이 하늘로 가볍게 떠서 올라가네.

술집 웨이터인 오강에게 묻는다. 뭐 맛있는거 있어?

그러자 오강은 계화주를 내어 놓는다"

 

이게, 어느 홀아비가 과부를 희롱하는 글인가? 아니다. 아니다. 이것은 바로 유명한 추모의 글이다. 그것도 모택동이 죽은 전처 양계혜를 추모하는 글이다. 제목은 "접연화 - 이숙일에 답함" 원문은 이렇다.

 

아실교양군실유(我失驕楊君失柳)

양류경양직상중소구(楊柳輕揚直上重霄九)

문신오강하소유(問訊吳剛何所有)

오강봉출계화주(吳剛捧出桂花酒)

 

이 글에서 양(楊)은 당연히 양개혜(楊開慧)를 말하는 것이고, 유(柳)는 이숙일의 죽은 남편 유직순(柳直旬)을 의미한다.(*양류(楊柳)는 합쳐서 부르면 버드나무가 된다). 자기의 마누라를 다른 사람의 남편과 함께 추모하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두 사람이 같이 놀고, 술마시고, 춤추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전혀 슬퍼하는 뜻은 없고, 오히려 놀리는 느낌이 있으니, 어찌 이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은 사람을 추도하는 것은 자연히 마음에서 깊이 우러나고, 슬퍼하는 뜻이 묻어나야 한다. 중국역사상에는 추도시사가 헤아릴 수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소동파의 "십년동안 삶과 죽음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생각을 얼마나 하였는지 모르고, 잊을 수가 없었다. 천리 먼곳에 외로운 무덤, 처량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비록 서로 만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알아보지 못하겠구나. 얼굴은 먼지로 쌓여있고, 머리는 서리로 덮여 있으니."라든지 육유가 심원(沈園)에서 전처를 그린 시도 있는데, 모두 인구에 회자되는 좋은 글들이다.

 

일반인이 추도시를 썼다면 만일 실력이 모자라면, 그저 평범하게 썼으면 된다. 그러나 매우 경박한 어투로 자기의 처와 다른 사람의 남편이 같이 춤추고 술마시는 것으로 그리는 것은 정말 천고에 드문 일이다. 그래서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모택동은 도대체 양개혜에 대하여 진정으로 사랑을 느꼈던 것일까?

 

당사(黨史)에서 보면, 1921년 양개혜는 모택동과 결혼한 후, 모택동을 따라서, 장사, 광주, 상해, 무한등지에서 혁명활동을 한다. 1927년 10월에 모택동이 추수의거부대를 이끌고 정강산에 들어간 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양개혜는 정강산에 가겠다고 여러번 요청하였지만, 당조직은 그녀에게 장사부근의 고향에서 지하공작을 하도록 요구한다. 1930년 10월 중순의 어느날, 양개혜와 아들 모안영(毛岸英)은 장사경비사령부에 체포된다. 호남군벌 하건(何健)은 양개혜에게 지하당원의 명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반성문을 쓰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단지 신문에 모택동과 부부관계를 끊는다고 공고하라고 요구하였을 뿐이다. 그렇게만 하면 그녀를 바로 석방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양개혜는 그 요구에 따르지 않았고, 1930년 11월 장사 유양 육외의 식자령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후 그녀와 모택동사이의 세 아들(모안영 포함)은 당조직에 의하여 상해로 보내진다.

 

[당사자료] 모안영. 1922년 호남 장사시에서 출생. 모택동과 양개혜사이의 장남. 출생후 부모를 따라 상해, 광주, 무한을 전전함. 1930년, 양개혜가 호남군벌에게 체포될 때, 8살의 모안영도 같이 감옥에 갇힘. 모친이 죽은 후, 보석으로 풀려남.

 

이 때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의문이 드는 곳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첫째, 모택동은 1927년 정강산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아서, 나이 갓 17세된 "영흥의 한떨기 꽃"이라는 별명을 가진 하자진(賀子眞)과 동거를 시작한다. 양개혜는 체로되었을 때 이미 남편에게 버림받은지 3년이 지난 늙은 마누라인 셈이다. 그런데, 왜 하건이 양개혜에게 모택동과 이혼하라고 요구하였을까? 그 당시에는 공산당의 간부들도 체포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팽진, 박일파와 같은 경우 모두 "반공계시"를 쓰고서야 석방되었다. 강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주은래도 "오호"라는 이름으로 "반공계시"를 쓴 바 있다는 것이다.(물론, 주은래는 죽어라 부인했다). 왜 양개혜에게만 이혼성명을 발표하라고 한 것일까? 하건이 이렇게 한 이유가 모택동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우스개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마치 포청천이 진사미를 타격하기 위하여 진향련에게 진사미와 이혼하라고 했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둘째, 왜 하건은 모택동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했다면, 그리고 모택동의 가족을 죽여서 분을 풀려고 했다면, 왜 이미 버려진 양개혜만 죽이고, 오히려 모택동의 세 아들은 풀어준 것일까? 중국역사에서는 일찍부터 "풀을 뽑으려면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는 전통이 있다. 여자는 풀어줄 수 있지만, 아들은 절대 남겨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유명한 "조씨고아"의 이야기는 회임한 공주는 살려주고, 태어난 아기는 반드시 죽이는데서 시작한다. 버러진 여인은 남편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중국역사에서는 생각했다. 청나라때 연갱요가 옹정제가 자기를 죽일 것을 알고는 임신한 첩 한명을 버려버린다. 이로써 자기의 혈맥을 보존하려고 한 것이다. 하건은 군벌이고 봉건적인 관념을 가진 사람이다. 어떻게 모택동의 전처는 죽이면서 그의 세 아들은 살려두어 나중에 복수할 수 있도록 남겨둔 것일까? 이러한 이치는 북방의 러시아에서도 잘 깨닫고 있는 것이었는데...그래서 모택동의 아들인 모안영이 왔을 때는 러시아에서 그에게 최고귀빈대우를 해주었지만, 나이가 들어서 모택동에게 버림받은 하자진이 왔을 때는 러시아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넣어버렸다.

 

셋째, 최근의 양개혜에 관한 회고록을 보면, 양개혜는 여러번 정강산으로 가겠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동의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장사에 남아서 지하공작을 하라고 하였다. 홀로 남은 여인이 세 아들을 데리고, 집안 일만도 바빠서 정신없을텐데 무슨 남은 힘이 있어 지하공작까지 하였겠는가? 아마도 모택동은 그녀가 정강산에 오면 하자진과 문제가 생길까봐 두려워한 것이 틀림없다.

 

넷째, 양개혜가 지하공작을 하려고 한다면, 최소한 그녀를 잘 모르는 동네에 가서 했어야 한다. 왜 거꾸로 장사에서 멀지 않은 고향인 반창에 거주한단 말인가? 양개혜의 부친이 대학교수인데, 반창이라는 조그만 동네에서는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다. 양개혜가 고향에 머문다면 숨을 방법도 없는데, 왜 이사도 가지 않았는가?

 

다섯째, 만일 모택동이 정말 양개혜를 생각했다면, 그녀를 감히 정강산으로 오도록 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녀를 상해나 홍콩과 같은 안전지대로 옮겨두었어야 했다. 공산당은 당시 돈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양개혜가 죽은 후에 그녀의 세 아들은 상해로 옮겨주지 않았는가? 바로 모택동이 돈을 아끼려고 해서, 양개혜를 장사부근에 정착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토끼도 제집근처의 풀은 뜯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모택동의 부대가 장사부근에서 소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어야 할 것아닌가.

 

수호전에 보면, 송강이 진명을 붙잡은 후에, 그를 핍박해서 산채에 들어오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진명으로 분장하게 한 다음에 청주를 친다. 당시 진명의 처자식이 아직 청주성내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청주지부가 대노하여 진명의 처의 목을 친다. 당연히 진명도 뭐 좋은 사람은 아니어서, 일단 화영이 자기의 예쁜 누이를 주겠다고 하니, 바로 처자식을 죽인 원수는 잊고, 송강을 따라서 산채에 들어간다. 민간에는 이에 대하여 다른 설이 전해진다. 즉, 진명은 일찌기 화영의 예쁜 누이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고, 화영이 누이를 자기에게 준다면 산채에 들겠다고 하게 된다. 그러나 화영의 누이도 대가집의 규수이므로, 죽어도 첩은 될 수 없다고 우긴다. 진명은 급해져서, 생각한 것이 차도살인의 독계였다. 그래서 스스로 사람을 데리고 청주를 치고, 청주지부의 손을 빌어 자기의 처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서는 화씨 아가씨를 얻은 것이다.

 

쥐를 잡으려면 그릇을 깨지 않도록 조심한다. 이것은 반란을 일으킬 때의 기본상식이다. ㅂㄴ드시 집안 사람들을 안전한 곳에 조치한 다음에야 혁명에 종사하는 것이다. 홍천뢰 능진이 붙잡혀서 양산박에 왔을 때, 송강이 이익을 제공하며 산채에 들 것을 요청하지만 능진은 "제가 산채에 드는 것은 무방하나, 저의 노모와 처자식이 북경에 있는데, 만일 누가 알아차린다면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니, 어떡하면 좋습니까"라고 한다. 흑선풍 이규같은 막무가내도 산채에 들때는 자기의 모친을 데리고 들어와서 관부에 잡히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렇다면, 양개혜가 죽기전의 몇달동안 모택동은 무엇을 하였는지 살펴보자.

 

두번 장사를 공격하였다. 정말 연구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것인데, 한번 연구를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공식자료상의 시간표를 살펴보자.

 

1930년 7월 22일에서 27일까지 : 팽덕회는 2만 홍군을 이끌고 장사를 공격했다. 시산혈해를 이룬다. 홍군이 장사를 점령한 후, 국만당성정부를 부수고, 성법원등의 기관도 부수었으며, 모택동의 동생의 부인인 왕숙란을 구해낸다. 팽덕회가 장사를 공격한 것은 모택동이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동생의 부인을 구해낸 것오 아마도 모택동이 부탁한 것이리라. 이상한 것은 왜 팽덕회에게 장사부근의 양개혜는 구해달라고 하지 않았을까라는 점이다.

 

8월 5일 : 홍군은 하건의 대거 반격에 밀려서 스스로 장사에서 철수한다. 공산당이 장사에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하건이 보복을 하지 않을 리가 없다. 모택동은 왜 재빨리 양개혜모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주지 않았을까? 반대로 장사에 남겨두어 붙잡히도록 하였을까? 그러나 또 하나 이상한 것은 하건이 양개혜를 붙잡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는 것이다. 하건이 양개혜가 머무는 것을 모를 리 있겠는가. 양개혜는 거기에 3년을 살았고, 3명의 아들을 데리고 있고, 양씨 집안은 장사의 대가족이어서, 사람의 왕래가 많았는데, 누가 누구를 감출 수 있겠는가. 아마도 하건은 이미 모택동에게 새 여자가 생긴 것을 알았을 것이다. 양개혜를 잡는다고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아와 버림받은 여자를 건드려서 자기의 명성에 누를 끼치기 싫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양개혜와 아들들을 그냥 놔두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공식적인 당사자료에서 모택동은 팽덕회가 장사를 공격한 것을 전혀 몰랐다고 적고 있다는 점이다. 8월7일에 상해의 신문을 보고서 비로소 장사를 공격한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팽덕회는 당중앙의 명령을 받아 장사를 친것이다. 모택동은 당중앙의 명령도 몰랐다는 말인가? 모택동은 군사가이고, 정강산은 호남과 강서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데, 병법상에서 말하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인데...모택동은 장사부근의 조그마한 동정도 다 알고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장사혈전에 대해서만 전혀 몰랐을 수가 있는가? 모택동이 장사를 버린 후 이틀이나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면 당시의 공산당은 녹림도적수준도 되지 못한다는 말인가?

 

8월 23일 : 모택동은 총정치위원겸 당의 총전위서기를 맡고, 주덕은 총사령을 맡는다.

 

8월 24일 : 총전위는 제2차장사진공결정을 내린다. 두번째 장사공격은 모택동이 스스로 병사를 이끈다. 그가 먼저 양개혜모자를 다른 곳으로 조치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8월 30일 : 모택동은 4만의 홍군을 이끌고 장사에 대하여 공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공격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대포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진공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모택동의 4만홍군이 팽덕회의 2만홍군보다 못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어찌 모택동이 팽덕회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9월 4일 : 쌍방은 대치상태에 들어간다.

 

10월 : 모택동은 당중앙의 대표와 홍1방면군의 간부를 설득하여 스스로 장사에서 철군하고, 안전하게 강서남쪽의 근거지로 돌아온다. 모택동은 장사지구에서 1개월여를 싸웠는데, 어찌 한번도 자기의 처자식을 보러 가지 않았을까?

 

1930년 10월 중순의 어느 날 : 양개혜와 아들 모안영은 체포되어 장사경비사령부로 끌려간다.

 

이상한 것은, 모택동이 철군하자, 양개혜가 붙잡혔다는 것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당사전문가들은 모택동이 장사에서 철군한 일자를 9월로 고쳤다는 점이다. 그리고 양개혜가 체포된 날짜를 10월 24일로 고쳤다는 점이다. 뭔가 이상한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1930년 11월 양개혜는 장사 유양육외의 식자령에서 죽임을 당한다.

 

양개혜가 죽은 후, 모택동은 추도의 념을 표시한 적이 없고,  몇개월내에 혁명정신이 충만한 두 수의 사(詞)를 남긴다.

 

1931년 봄에 남긴 어가오(반제1차대포위공격)과 1931년 여름에 남긴 어가오(반제1차포위공격)이다. 이 두개의 사는 그저 평범하다. 그러나 전혀 슬픔을 느낄 수는 없다. 거꾸로 '동심간' '창림핍'과 같이 조금은 음탕하게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을 싣고 있다. 장자는 마누라가 죽자 항아리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했는데, 모택동도 마누라가 죽자 기뻐서 춤을 춘 것으로 보인다.

 

사건을 해결하는 첫번째 실마리가 되는 질문은 "누가 가장 이익을 보았는가"라는 것이다. 속담에 중년남자에게는 세가지 기쁨이 있는데 "승관발재사노파(昇官發財死老婆)"(관직이 오르고, 돈을 벌고, 마누라가 죽는 것)라는 것이다. 모택동이 양개혜의 죽음에서 이득을 가장 많이 본 것으로 보인다.

 

모택동은 우연한 기회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양개혜의 죽음은 백번을 속죄해도 속죄할 수 없다". 이것은 양심의 발현인가? 모택동의 동문인 소유(蕭瑜)는 "모택동과 함께 구걸하다"라는 책에서 분명하게 "바로 윤지(모택동의 자)가 개혜를 죽였다"고 쓰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