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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의 비서들

by 중은우시 2006. 5. 30.

모택동의 몇몇 주요한 비서는 모두 그가 발견하거나 뽑은 사람들이다.

 

모택동의 비서를 뽑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학문"이 있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호교목(胡喬木)의 선발은 모택동이 호교목이 <<중국청년>>잡지에 발표한 54운동20주년기념글을 보고서 "교목은 인재다"라고 하며, 직접 이름을 거명하며 호교목을 자신의 비서로 삼았다.

 

진백달(陳伯達)이 모택동의 비서가 된 경위는, 진백달이 연안에서의 한 좌담회때 아주 특색있는 발언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모택동의 주의를 끌었기 때문이다.

 

전가영(田家英)이 모택동의 주의를 끈 것도, 1942년 전가영이 연안의 <<해방일보>>에 발표한 글때문이었다. 모택동은 이 글을 읽은 후 찬탄해 마지 않았다. 비록 천여자에 불과한 잡문이었지만, 모택동은 거기에서 작자의 뛰어난 문학과 역사에 대한 지식과 민첩한 사고력을 볼 수 있었다. 얼마되지 않아. 모택동은 전가영을 데려다 아들인 모안영의 언어, 역사교사로 삼았다. 나중에 몇번의 면접시험을 거쳤는데, 모택동에게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정식으로 자기의 비서로 삼았다.

 

모택동 본인은 시를 읊고, 서예를 하고, 책을 읽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과도 이런 교류를 통하여 심득을 얻고자 하였다.

 

모택동의 비서들은 모두 그의 영향을 받아 여러 방면의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독서와 사(詞)를 짓는 것은 모택동이 가장 좋아하는 것중의 하나였는데, 호교목 역시 이를 좋아했다. 진백달과 모택동의 공통취미는 두 사람 모두 중국고대철학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택동은 시를 좋아했는데, 전가영도 시를 좋아했다. 전가영은 자주 모택동을 위해서 고시들을 조사하고 <<모택동시사십구수>>, <<모택동시사>>, <<모주석어록>>등의 책을 편찬했다.

 

모택동의 주변사람들은 모두 모택동이 성실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택동의 주변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었다. 일을 열심히 하고, 충성심이 있는...모택동은 스스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사람이나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눈치를 살피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호교목이 처음으로 모택동에게 견책을 받은 것은 호교목이 1958년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 공보를 초안할 때, 진운이 당시에 호교목에게 "약진지표"의 구체적인 숫자를 넣지 말라고 건의했고, 이를 모택동에게 전하라고 하였는데, 호교목은 진운의 말을 따르지 않았을 뿐아니라, 감히 모택동에게 진운의 의견을 말하지도 못했다. 이후 모택동이 이 일을 알고는 아주 화를 내면서 처음으로 호교목을 책망했다고 한다.

 

진백달이 모택동의 눈에 처음으로 벗어난 것은 1949년 모택동을 모시고 소련을 방문했을 때이다. 처음으로 스탈린과 회담할 때, 진백달은 스탈린이 그에게 묻자 스스로 다 대답을 해버리고 모택동은 그냥 옆에 앉아 있는 꼴이 되었다. 이후 진백달은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서 거주했다. 모택동이 이를 안 후에 엄히 책망하였다. "넌 왜 내 동의도 받지 않고 임의로 바깥으로 나갔는가? 너의 업무장소가 도대체 어디인가?"

 

호교목이 문화대혁명때 기본적으로 별탈이 없이 지나갈 수 있었던 것도, 주로 모택동이 평소에 그에 대한 인상이 괜찮았었기 때문이다. 호교목은 성실한 사람으로 보았고, 호교목은 그와 함께 20년을 있었지만 항상 선비였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도 모택동은 사람의 성실함을 가장 큰 덕목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