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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양개혜는 모택동이 죽였는가? (2)

by 중은우시 2006. 6. 2.

설마 진짜 모택동이 양개혜를 죽였다는 말인가?

 

모택동은 지식분자를 계속 미워했다. 아마도 당시 북경대학이 그의 입학을 거절한 후유증일 것이다. 이 점은 히틀러와 닮은 점이 있다. 히틀러는 예술학교의 유태인 교수에게 거절당한 후에 유태인에게 원한을 품었었다. 그리고 모택동은 여자를 고르는데도 품위는 따지지 않았다. 대충 찾은 것이 재주나 학문은 없으면서 가슴이 큰 여자들이었다.

 

모택동의 일생에서 그와 비교적 장기간 관계를 유지한 여자는 양개혜, 하자진, 강청(江靑), 장옥봉(張玉鳳), 맹금운(孟錦雲)과 사정의(謝靜宜)인데, 양개혜는 외모가 보통이고 눈이 작지만 사상이 있는 재녀였다. 그러나 다른 여인들은 완전히 반대이다. 모두 지능은 낮지 않지만 미녀들이었다. 모택동이 양개혜를 쫓아다닌 것은 대충 현재의 농촌출신 학생이 교수의 딸을 쫓아다니는 것과 비슷하였다. 사랑하고 아니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높은 가지로 올라가고자 하는 것이다. 양개혜의 부친은 모택동이 재주가 있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그가 너무 심기가 깊다고 생각했고, 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아끼는 딸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동문인 소유에게 주려고 하였따. 그러나 소유는 이미 마누라가 있었다. 그리고 양개혜의 부친은 일찍 죽는다. 그래서 모택동은 양개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양개혜는 아마도 부친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친척과 친구를 부르지 않았고, 모택동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하는 것을 거절했다.

 

결혼후에 두 사람은 세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싸움이 더욱 잦아진다. 당사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양개혜는 과도하게 모택동에게 의지했따. 모택동은 이러한 과분한 의지에 대하여 화가 났다. 심지어 싫증을 느꼈다. 그는 큰 일을 하고 싶었다. 이런 여인과 아이의 정은 그의 일에 방해가 되었다. 모택동은 시를 하나 써서 양개혜에게 주었다. "인생은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된다. 의지해서는 일을 이룰 수 없다...." 시를 읽고 양개혜는 오해했다. 그녀의 자존심은 많은 상처를 입었다. 바로 이때부터 모택동과 양개혜의 사랑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후에 그들은 자주 싸웠고....모택동이 집을 떠나려고 할 때, 양개혜는 모택동이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모택동에게 아이들을 데려가라고 하였다. 모택동은 화도 나고 우습기도 하였따. 결국 모택동은 분연히 떠났다"

 

이것은 분명히 버린 것이다. "분연"히라는 말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 묘사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이상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고증에 의하면 모택동이 쓴 시 "손을 흔들고 떠난다"는 것은 사실 양개혜에게 써준 것이 아니라, 그의 동양식(童養媳, 어릴 때 집안에서 커서 결혼시키기로 하고 데려온 여자)인 나씨(羅氏)에게 써준 것이라고도 한다. 그 나씨도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게 죽었다. 추운 겨울에. 모씨집안의 족보에는 이질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1930년때, 모택동은 단지 중앙위원이었다. 주은래, 항영, 진의. 모택동을 무시했던 사람이 100명이면 7,80은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모택동은 이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복수했다. 명목이야 10차노선투쟁이지만...그 해에, 당은 특히 사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장국도의 회고에 의하면 1926년에 당의 정치국회의상에서 채화삼의 부인 향경여가 먼저 그 남편인 채화삼이 상해를 떠나 있을 때, 그녀는 팽술과 연애를 했었다...진독수 선생은 채화삼과 향경여의 결혼을 동의하였었으므로 그들이 헤어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팽술이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고 동지의 사랑을 파괴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팽술과 향경여는 모두 처벌을 받았다. 나중에 모택동이 대권을 장악한 후에 강청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정치국은 또 나서서 간섭했다. 최후로 모택동에게 몇가지 제약을 가했는데, 거기에는 강청은 20년동안 정치에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모두 알듯이 강청은 마음 속에 꼭 품고 있다가 20년의 기한이 끝난 후에 문화대혁명을 일으킨다.

 

최근에 어떤 할일없는 사람들의 연구에 따르면, 비록 모택동이 정강산에서 하자진을 만난 후 며칠만에 동거를 시작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31년까지...1931년(양개혜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을 때이다)에 중공중앙은 비로소 그들의 결혼을 승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하자진과 정식결혼하지 않은 것을 빌어서 모택동은 여전히 그 때까지 양개혜를 사랑했다는 증거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하자진은 성격이 불같은 여자이고, 질투가 심했다. 나중에 연안에서 모택동의 면전에서 소날을 일으키기도 한다. 정강산에 있을 때는 나이도 어리고 기운이 왕성했다. 그리고 하자진은 수하에 사람도 많았다. 그녀가 어찌 모택동의 첩으로 만족했겠는가? 분명히 매일 전처와 이혼하고 자신을 정처로 삼아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진행된다.

 

모택동은 양개혜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혼하자고 한다. 그리고 중앙에 보고한다. 양개혜는 편지를 보고 크게 화를 낸다. "네가 나에게 결혼하자고 사정하면서 빌 때는 언제이고, 이제 내가 아들 셋을 낳아서 길렀는데, 늙었다고 나를 버리겠다고 하는가? 절대 안된다." 그리고는 편지를 써서 중공중앙에 고발한다.

 

1930년 당중앙은 아직도 해외유학파들이 장약하고 있었다. 모택동과 양개혜의 서신을 받은 후, 모택동의 이혼신청에 대하여 가혹하게 비판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따. 양개혜는 1921년에 당에 입당한 오래된 당원이고, 지식이 있고, 사람관계가 좋다는 것이다. 양개혜의 부친은 당의 창시자인 진독수, 이대조와 가까운 친구간이다. 그리고 하자진은 단지 여도적에 불과했다.

 

당이 양개혜와의 이혼에 동의하지 않자, 하자진은 더욱 고삐를 죈 것같다. 아마도 하자진은 모택동에게 양개혜를 버리고 자기를 정처로 삼지 않으면, 모택동이 정강산에서 굴러먹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 자고로 효웅은 권력은 수족과 같이 버리지 않고, 처자는 의복과 같이 바꾼다는 것이다. 만일 권력과 관련되지 않았다면, 모택동은 양개혜와의 이혼에 그렇게 열심이지 않았을 것이다.

 

모택동이 정강산에 처음 왔을 때를 보면, 사람도 없고, 총도 없었다. 산도적 두목인 원문재와 왕좌의 산채에서 붙어 있었다. 하자진의 오빠인 하민은 산채의 실력자였고, 원문재, 왕좌와 동문이어서 교분이 깊었다. 모택동이 하자진과 좋아지낸 것은 하민에게 잘보이기 위한 것이었고, 자기의 실력을 늘여서 원, 왕 두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택동이 어찌 송강이 조개를 통제한 것을 얘기했겠는가, 왜냐하면 바로 당시 그의 입장이 송강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주덕의 부대가 정강산에 왔다. 강룡(强龍, 전국적인 인물)은 지두사(地頭蛇, 지방의 실력자)를 누른다. 홍군도 주덕과 모택동의 홍군이 되었다. 모택동은 졸지에 제2인자로 떨어졌다. 주덕은 사람됨이 후덕하여, 점점 원, 왕의 두 사람도 모택동파에서 주덕파로 바뀌었다. 모택동은 자기의 뒷마당에 불이나자 독하지 않으면 사나이가 아니라는 심정으로 1930년 사람을 보내어 원문재와 왕좌의 두 사람을 죽인다. (당연히 사후에 거짓으로 자기의 수하가 함부로 일을 벌인 것이고 자기는 모른다고 발뺌한다) 이 때, 모택동은 원, 왕과 관계가 좋았던 하씨집안의 힘을 빌려 원, 왕의 수하들을 자기의 수하로 삼게 된다. 그러므로 감히 하자진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그녀가 자신이 원, 왕의 두 사람을 죽인 것을 까발린다면, 자기가 애써서 닦아놓은 기반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택동은 어쩔 수가 없었다. 책을 보면서 방법을 강구했다. 책을 본다고 해야 마르크스의 책은 아니었다. 그 때 마르크스의 책은 공산당선언을 제외하고는 중문으로 번역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택동은 외국어를 몰랐고, 그래서 참고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수호지와 삼국지였다. 삼국지의 속에는 궤계가 무성하다. 그러나 이것은 남자를 상대할 때 쓰는 것들이다. 반대로 수호지에는 여자를 상대할 때 쓰는 수법들이 많다. 모택동의 호위무사에 따르면, 어느 한 집을 털 때, 모택동은 잘 찾아봐아 수호지가 있는지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역시 하늘은 뜻을 가진 사람을 배신하지 않았다. 결국 수호지를 한권 찾아냈다. 모택동은 보물을 얻은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명이 차도살인수법으로 처자식을 죽인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잘 복습한다. 모택동은 수호지를 뒤적이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다. 이러한 경험은 문화대혁명때  또 하나의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수호지를 평하고, 송강을 비판한다. 결과적으로는 돌을 들어 자기의 발등을 찍는 격이었지만, 이것은 뒷얘기이다. 당시에는 진명을 배워야 했고, 송강을 배워야 했다. 장사를 치고, 군벌을 핍박하여 자기의 마누라를 붙잡아 죽이게 해야 했다.

 

처음에는 모택동이 혐의를 피하는 방법을 썼다. 스스로 치지 않고, 팽덕회의 부대로 하여금 장사를 치게 했다. 모택동은 이러한 차도살인의 수법에 대하여 스스로 득의양양했다. 그래서 사를 지어서 "6월에 하늘에서 내려온 병사가 악을 응징한다"고 기염을 토하고, 특별히 "정주에서 장사로 향하며"라고 주석까지 달았따. 시사에는 당연히 음력으로 썼는데, 음력6월이면 개략 양략 7월이다. 그런데, 군벌 하건이 머리가 나빴는지, 팽덕회에게 당했으면서도 모택동의 처를 붙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화가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자세히 수호전을 읽었따. 원래는 진명이 스스로 청주를 친것이었다. 혹은 적어로 사람을 보내서 자기로 분장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살처지계를 완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택동은 이를 꽉깨물고, 친히 장사를 치러 나섰던 것이다.

 

이번 전투는 괴상했다. 모택동은 유격전의 대가라고 스스로 칭하면서, 공격해서 안되면 떠나곤 하였었다. 그런데, 장사에서는 오랫동안 머물렀다. 1개월씩이다. 하건이 멍청해서 그의 처를 붙잡는 계책을 생각하지 못할까봐 그랬을까?

 

1개월후에, 교전쌍방은 서로 사람을 많이 보낸다. 처음에는 이치를 가지고 싸운다. 이쪽에서는 "군벌반동파를 타도한다"고 하고 저쪽에서는 '소비에트러시아의 공산사교를 뿌리뽑는다"고 얘기한다. 나중에는 둘 다 솔직하게 얘기한다. 하건의 사신은 말하기를 "호남사람이 호남사람을 치지는 말자. 우리 서로 나눠먹자, 너희는 가서 강서나 쳐라"  모택동은 한나절을 아무 말도 안하고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럼 네가 내 처를 체포해서 그녀에게 이혼성명을 발표하도록 해달라"

 

하건은 이말을 듣자 이상했다. 이렇게 작은 일을 위해서 장사를 피로 물들였단 말인가. 그래서 바로 응락했다. 그러나 조건을 달았다. 모택동에게 즉시 철군하고, 다시는 장사를 오지 말라고. 모택동은 즉시 움직여서 주덕에게 철군하도록 설득하고, 나중에 홍군은 정말 다시는 장사를 치지 않았다.

 

모택동이 철군하면서, 하건은 양개혜를 체포했다. 양개혜는 당시 매우 화가 나 있었다. 모택동이 장사까지 왔으면서 자신들 모자는 보러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박정했다. 체포된 후에 양개혜는 대의에 따르는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급의 이름도 나는 안다. 하급의 이름도 나는 안다. 그러나 너희에게 말해줄 수는 없다는 등등. 그러나 하건은 즉시 말을 끊고,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너에게 지하당원의 명단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반성문을 쓰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신문에 성명만 발표해주면 된다. 모택동과 이혼한다고. 그러면 바로 풀어주겠다고. 양개혜는 총명한 여자이다. 한번 듣자 바로 눈치챘다. 모택동이 너를 시켜서 나에게 이혼에 동의하라고 한 것이 아니냐고. 하건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 그렇다. 이런 배신자와 혼인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냥 이혼하고 말지."

 

양개혜는 고결하고 오기가 있는 여자이다. 성격도 매우 굳건했다. 그 배신자가 득의양양하게 젊은 여자를 취하도록 놔둬? 절대 안된다. 나는 끝까지 너를 놔주지 않겠다. 죽어도 이혼은 못한다. 당중앙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너희는 절대 결혼할 수 없다.

 

하건도 방법이 없었다. 모택동에게 서신을 보낸다. 네 처는 호남의 고집쟁이다. 죽어도 이혼하지 않겠다고 한다. 어떡하면 좋겠느냐? 모택동은 회신을 보낸다. 사람은 자고로 한번은 죽는다. 남편의 이익을 위해서 죽는다면 그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의 세 아들은 모두 목숨을 살려달라.

 

하건은 군벌이다. 사람 죽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여자를 죽이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양개혜에게 최종통보를 한다. 이혼하지 않으면 죽음 뿐이다. 그리고 모택동의 서신도 양개혜에게 보여준다. 양개혜는 모택동의 친필서신을 보고는,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이 자기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고 느끼고, 살고자 하는 욕망을 버린다. 절대 이혼은 안한다. 살아도 의미가 없으니, 그냥 죽여달라.

 

서신이 왔다갔다 하면서 한달을 끌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행형하는 망나니가 양개혜의 처지를 동정하여, 고의로 급소를 치지 않았다고 한다. 망나니가 막 떠나려고 할 때, 모택동이 보낸 간첩이 한쪽 켠에서 소리를 질렀다. "아직 안죽었다. 아직 안죽었어" 망나니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와서 칼을 내리쳤다.

 

양개혜가 죽은 후에, 모택동은 사람을 시켜 하건에게 돈을 주고 위로했다고 한다. 하건은 양개혜의 세 아들을 풀어준다. 그리고 모택동은 세 아들을 받아서 상해로 보낸다.

 

나비가 쌍쌍히 꽃을 그리워하며 나르는 것은 낭만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나비의 전신인 모모충(毛毛蟲)은 꽃의 잎을 먹고 자란다. 그러나, 공식 당사자료는 우리에게 말한다. 나비는 태어나면서 바로 나비이고, 모모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