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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투바(Tuva) : 중소접경지역의 신비부족

by 중은우시 2006. 7. 10.

 

 

투바(Tuva, 圖瓦)는 아시아주 한가운데의 오래된 지명이다. 대체로 시베리아남단의 예니세이강의 상류의 강골짜기에 있는 약 20만평방미터의 지역이다. 투바의 역사는 기원전 3세기-6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3세기-18세기에 투바는 몽고의 지배를 받는다. 건륭23년(1758년)에는 청나라가 준가르 몽고를 물리친 후, 투바는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당노오량해(唐努烏梁海)로 불리고 48개 좌령(좌령은 몽고팔기제도의 최저조직단위)를 두었다.

 

청나라 동치3년(1864년)에 중국과 제정러시아는 조약을 체결하여, 제정러시아가 당노오량해의 서북부 10개좌령의 땅을 가지게 되었다.

 

청나라멸망후 1914년, 오량해는 제정러시아의 '보호국"이 된다. 10월혁명후, 러시아는 국내전쟁의 여파가 투바에까지 미치고, 중국군대는 이 틈을 타서 오량히의 중동부 36개좌령을 수복한다. 그러나 바로 소련홍군에 의하여 격패당하고, 이후 오량해의 동쪽 9개 좌령은 외몽고에 귀속되며, 중부는 1921년 "당노-투바인민공화국"을 성립하며 소련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44년에 독립이 종료되고 소련에 가입한다. 소련의 해체후에 투바는 1992년 러시아연방내의 1개 공화국으로 되었다. 투바인은 모두 20만명가량이 있고, 약 3만명은 몽고국의 경내에 살고 있다.

 

투바인들은 자신의 언어는 가지고 있으나, 문자는 없다. 그리고, 민족의 역사에 대하여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알타이산의 자락에 있는 밀림 깊은 곳에서 사는 하나의 신비부락으로, 스스로 투바인이라고 하며, 일부는 스스로 징기스칸의 아랍정벌때 남겨진 군대의 후예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이나 생활습관은 확실히 몽고인들과 많이 닮아 있다. 그러나, 민족연구전문가들이 의문을 가지는 점은 그들이 말하는 언어가 몽고어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의 신비한 언어 고돌궐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투바인들은 도대체 어떤 민족이고, 언제 알타이산자락의 카나스지역에 와서 살게 되었는가?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의 정적량 굣는 가장 먼저 투바인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한 전문가이다. 정교수에 의하면 중국에 살고 있는 투바인은 약2,500명정도이고, 주로 하바하현의 백하바촌, 부얼진현의 허무촌, 카나스촌의 세개 마을에 살고 있다. 투바인들 상당수는 스스로 징기스칸이 아랍정벌할 때 남겨진 군인들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투바인들은 몽고족들과는 닮은 점도 많지만 다른 특색도 많다.

 

첫째, 몽고빠오가 없다. 투바인들의 집은 매우 특색이 있는데, 나무로 지은 집이라는 점이다. 집의 바깥에는 한겹 또 한겹 담장을 치며, 마을의 모습은 북유럽의 마을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일견하기에도 몽고족의 거주지와는 전혀 다르다. 

 

둘째, 투바인들도 모임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몽고인들은 말젖으로 술을 만드는데 비하여 투바인들은 소젖으로 술을 만든다. 그리고, 몽고인들은 일반적으로 은장식을 좋아하는데 비하여 투바인들은 금장식을 좋아하고, 금위에 다른 보석을 상감한 것을 좋아한다.

 

셋째, 언어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 그들의 독특한 언어이다. 처음에는 그들의 말이 몽고어의 한 방언정도로 생각했으나, 금방 몽고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투바인들의 내력을 조사하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부터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언어학자들은 이 낯선 언어를 연구하기 위하여 오랜 연구를 거쳐 3000여 단어를 파악하였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투바어에는 상당한 몽고어 단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주요부분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고, 국내외문헌자료를 종합한 바에 따르면 투바인의 말은 고대 돌궐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한 것은 일부 카자흐스탄학생과 몽고학생, 투바학생이 같이 공부하는 경우에 투바학생이 몽고어를 배우는 것은 매우 어려워하지만, 카자흐스탄어를 배우는 것은 쉽게 익힌다는 점이다. 이것은 투바어와 고돌궐어의 관계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교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힌다.

 

"투바(圖瓦)"는 현대의 한자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고,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지역에서는 약간씩 칭호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사서에 기록된 두보(都播), 투바(禿巴), 더와(德瓦)등이 그것이다. <<수서. 철륵전>>에 따르면 "북해의 남쪽에 두보가 있다" 북해는 지금의 바이칼호를 의미하므로, 당시의 투바족들은 바이칼호의 아님에서 에니세이강의 상류, 살안령이북의 광대한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했던 것이다. 실제로는 수나라 이전부터 투바인들의 선조는 여기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이고, 그들은 북방민족인 흉노족의 통치을 받았떤 것으로 보인다. 기원 4세기경에는 투바는 서쪽으로 이동해온 선비족의 통치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 6세기 수당시기에 돌궐부락이 투바인들의 거주지에서 궐기했고, 나중에 강대한 돌궐칸국이 성립되었다. 투바지역은 바로 돌궐칸국의 일부가 되었고, 투바인들은 칸국의 다른 부족과 마찬가지로 고돌궐어를 쓰고, 샤먼교를 믿었다.

 

돌궐칸국이 쇠망한 후에, 일부 부락은 전쟁등의 영향으로 남쪽이나 서쪽으로 이동했고, 지금의 중국신강남쪽과 중앙아시아등지로 이동했다. 이러한 지역의 토착민족은 대부분 코카서스나 샘족에 속했다. 그들은 샘족과의 사이에 혼혈이 되었고, 체질에서 변화가 있어났으며, 높은 코와 깊은 눈이 특색이 되었다. 나중에 이슬람교가 전파되면서, 원래의 종교를 포기하고, 이슬람화되었으며, 점차 현대의 위구르족, 카자흐스탄족으로 되었다.

 

그러나 투바부락의 나중에 서로 다른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주로 몽고인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래서 전형적인 몽고인종의 특색을 보유하게 되었고, 라마교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두부인들이 같은 돌궐부락에서 발전해온 위구르나 카자흐스탄등의 민족과 언어상에서는 비슷하지만, 인종이나 풍속에 있어서는 거대한 차이를 보이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투바인들의 초기역사과정에서 그들의 주요한 활동근거지는 예니세이강의 상류에 있는 살안령부근이었다. 그러나 빈번한 전쟁과 유목생활의 필요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알타이산부근으로 이동했고, 그들중 일부 노인들이 얘기하듯이 천년전부터 이 지역으로 와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12세기에 징기스칸이 몽고부락을 통일한 후, 주위로 확장할 때 먼저 그들에게 정복당한 것은 "투바스"(禿巴思)"라고 불리우는 부락이었다. 그들이 바로 지금의 투바부락이다. 잋엄 투바인들은 대규모로 몽고인들과 섞여서 살게 되었다. 이것은 투바인들이 언어상으로는 돌궐계이나, 풍속상으로 몽고계와 유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또한, 그들이 스스로 징기스칸의 아랍정벌시에 남겨진 부대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점도 설명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