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족:
금발벽안(金髮碧眼, 노란 머리카락과 파란 눈)의 민족. 코가 크고, 눈이 깊으며, 구렛나룻이 많았다고 되어 있어, 전형적인 백인의 모양을 하고 있다. 카스피해와 코카서스의 초원지역에 살던 종족. 나중에 중앙아시아로 들어오고, 산서(山西) 지역으로 들어왔으며, 흉노족에 정복되었다. 갈족은 흉노에 정복된 후, 흉노의 핍박하에 노예군대가 되어 만리를 넘어 중국으로 와서 흉노족을 도와 중국을 침략하게 된다. 이들은 오호십육국시대에 후조(後趙)정권을 설립하였으나, 나중에 한족 장군인 염민(冉閔)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전민족중 1%가량만이 선비족에 투항한 이외에 나머지 99%는 염민의 한족군대의 피의 복수하에 전멸하였다.
갈족을 독립된 민족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들은 흉노족들과 계속 막남지역에서 혼거하였고, 생활습속등이 흉노족과 유사했다. 조조가 오부의 흉노죽을 중원내로 이동시킬 때, 갈족도 흉노족을 따라 산서로 들어왔고, 집중적으로 상당(上黨)지역에 살았고, "흉노의 별족"으로 불리웠다. 갈족의 석륵(石勒)이 후조정권을 건립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석호(石虎)는 역사상 악명을 떨치게 된다. 석호의 잔인한 통치로 한족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이후 그의 양자였던 염민에 의하여 후조는 멸망하고, 이전의 포악한 통치에 겁을 먹은 한족은 자기들과 다르게 생긴 이족을 모두 도살한다. 이 때 갈족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어 종족 자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갈족의 언어는 인도유럽어계의 한 갈래였다. 이란, 아프간 일대의 인도유럽어의 방언이다. 월지(月氏, Tocharian), 소그드(粟特, Sogdian)과 마찬가지였다. 갈족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였다. 이 종교는 페르시아에서 기원했다.
갈족은 소그드족의 일부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 이유른 첫째, 후조황제의 성을 보면 석(石)씨인데, 당시 중앙아시아에 소그드족이 많은 나라를 세웠는데, 그 중의 하나가 타쉬켄트(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이름)이다. 이 타쉬켄트를 당나라에서는 석국(石國)이라고 불렀고, 이 나라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많은 사람들이 석(石)을 성으로 삼았다. 둘째, 역사서에 보면 갈인들은 호천(胡天)을 믿는다고 되어 있는데, 호천은 바로 배화교의 주신인 아후라 마츠다이다. 배화교는 바로 소그드인들이 많이 믿던 종교이다.
염민은 한족중 이민족을 가장 많이 죽인 장수로 유명한데, 그가 멸절시킨 이민족이 바로 갈족이다. 그의 인생은 하나의 전설이다.
염민의 부친은 원래 한족으로 한 군대를 이끌던 사령관인 염량이었는데, 갈족정권인 후조의 석륵에게 패배하여 죽임을 당한다. 당시 염민은 겨우 12살이었는데, 석륵은 염민이 총명하고, 또한 적군이지면 명장의 후손인 것을 감안하여 자신의 양자로 삼는다. 이우 20여년간 염민은 이름을 석민(石閔)으로 바꾸고, 후조군대내의 맹장으로 활약한다. 그는 후조가 동진을 공격할 때도 선봉에 서서 많은 공을 세운다. 그런데, 20년이 지나서 석륵의 아들인 석호도 죽고, 석감은 염민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된다. 그리고 석감은 원래 염민을 후계자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하나 이행하지 않는다. 그러자 350년 그는 한족부하장수 이농, 왕기의 옹립을 받아 '한족정권'인 위(魏, 사청 염위)를 세운다.
그는 위를 세운후 즉시 갈족을 도살하기 시작한다. 하루에도 수만명의 갈족들이 도살되었다. 남녀노소 모두 가리지 않고 죽였다. 약 20여만명이 피살된 것으로 나타난다. 염민의 잔혹한 도살은 강렬한 반항에 부딛친다. 석호의 서자인 석저는 황제를 칭하고 양국을 세웠는데, 비 한족들이 줄줄이 호응한다. 351년, 헉저는 선비, 강족과 연합하여 여민을 공격한다. 염민은 대패하고 부하들도 많이 사망한다. 염민은 자기 휘하의 서주, 예주, 연주와 낙양을 가지고 동진(東晋)에 항복하며, 동진이 이들을 막아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동진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염민은 홀로 외로이 이들과 싸우게 된다.
352년 석저는 부하 유현에 의하여 살해된다. 유현은 염민에 투항하고 이로써 후조정권은 최종적으로 멸망한다. 당시 요동을 점거하고 있던 선비족의 모용씨가 세운 전연은 기회를 틈타 유주를 장악하고, 남하하여 염민을 공격한다. 처음에는 염민이 적은 병사로 선비에 맞서 10전10승하였으나, 결국 선비족의 포위에 말려들어 생포된다. 그는 결국 전연의 군주 모용준에게 참수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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