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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오병감(伍秉鑒) : 1800년대 천하제일부자

by 중은우시 2006. 4. 25.

2001년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을 1000년동안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50인을 선정한 적이 있는데, 6명의 중국인이 그에 포함되었고(6명은 징기스칸, 쿠빌라이, 유근, 화신, 오병감, 송자문이었다), 오병감도 바로 그 중의 한 명이다.

 

오병감(1769-1843)은 오돈원(伍敦元)이라고도 하며, 복건성 출신이다. 그의 선조는 강희제때부터 광동에 거주하면서 장사를 시작했다. 오병감의 부친인 오국영(伍國瑩)때에 이르러 오씨 집안은 대외무역에 가담했다. 오국영은 이 때 이화행(怡和行)을 설립하고, 스스로를 호관(浩官)이라고 칭하였는데, 호관이라는 칭호는 그 이후 자손들도 계속 이어서 사용하게 되며, 1800년대초기에 국제상업계에서 유명한 이름이 된다.

 

1686년봄, 광동순무인 이사정은 광주에서 공고를 반포하는데, 매년 일정한 백은을 납부하면 "관상"이 되어 대외무역을 독점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하였다. 이사정도 생각지 못한 것은 이 공고로 인하여 중국에서는 세계최고의 부자 한명이 탄생하게 된다는 점이다.

 

17세기 후반에 강희황제는 일시 대외무역금지정책을 완화하며, 이에 따라 중국에 와서 무역을 하는 외국상인들이 늘어난다. 광동지방정부는 1686년에 13개의 실력있는 상인들을 모아 그들을 서양상인들과 거래하는 외상으로 하게 하며 관세를 대리징수하도록 한다. 이로써, 근대 중국역사상 유명한 "광주십삼행(廣州十三行)"이 탄생한다. 이후에 이러한 상인들은 일처리효율이 높고, 임기응변능력도 뛰어나며 신용을 잘 지켜 외국상인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1757년(건륭22년)에 청나라정부는 쇄국정책을 시행한다. 단지 광주에만 대외통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 광주십상항은 당시 중국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대외무역특구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해준다. 이로써 이들 상인들에게는 엄청난 장사기회를 잡게 된다. 이후의 100년간 광동십상함은 청나라정부에 40%의 관세수입을 제공했다.

 

소위 십삼행은 실제 단지 통칭이고, 13개는 아니었고 많을 때는 수십개에 달하였고, 적을 때는 4개인 적도 있었다. 해상무역독점의 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외상이 차, 비단을 구입하고자 하거나, 혹은 외국상품을 국내에 수입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모두 이 특수한 조직을 통하여야 했따. 광동십삼항은 점차 산서의 진상, 양회의 염상인 휘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상인집단으로 성장했다. 재산이 집적되면서 광동십삼항에는 일련의 거부들이 출현한다. 예를 들어 반진승(潘振承), 반유도(潘有度), 노문금(盧文錦), 오병감, 섭상림(葉上林)등이 그들이다. 나중에 다시 돌아보면 이들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822년 광동십삼항이 있는 거리에 대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는데, 4000만백은의 가치가 있는 상품이 불에 탔다고 한다. 광동십삼항에서 동문행(同文行), 광리행(廣利行), 이화행(怡和行), 의성행(義成行)이 가장 유명했다. 그 중의 이화행은 특히 그 주인인 오병감으로 인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오병감은 32세때인 1801년에 부친으로부터 이화행의 업무를 승계받는다. 이후 오씨 집안의 사업은 신속히 발전한다.

 

경영측면에서, 오병감은 앞선 경영이념을 가지고 대외무역에서 신속히 성장하고 돈을 오은다. 그는 구미각국의 중요한 고객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1834년이전에 오씨집안은 영국상인 및 미국상인들과 매년 거래하는 무역액이 100만은원에 달하였다. 오병감은 당시 영국동인도회사의 최대채권자였다. 동인도회사는 자금운전이 원활하지 않으면 오씨집안에 차입을 요청하였었다. 이로 인하여, 오병국은 당시 서방상인들에게 매우 높은 지명도를 지니고 있었다. 일부 서방학자들은 천하제일부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 유럽상인들은 차의 품질에 대하여 매우 까다롭게 굴었는데, 오병감이 공급한 차는 영국회사에서 최고의 차로 감정받고, 높은 가격에 팔려나갔다. 이후 포장후 오씨집안의 표기가 있는 차는 국제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받고 팔 수 있게 되었다.

 

산업경영측면에서, 오병감은 국내에 부동산, 차원, 점포등을 가지고 있었을 뿐아니라, 대담하게 미국의 철로에도 투자하였고, 증권거래, 보험업무등에도 손을 뻗었다. 이로서 이화행은 명실상부한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오병감은 시원시원한 성격으로도 해외에 유명했다. 소문에 의하면 미국보스톤의 한 상인이 오병감과 하나의 사업을 공동으로 하였는데, 경영이 잘 되지 않아, 오병감에게 7.2만달러의 채무를 지게 되었고, 그 미국상인은 이 빚을 상환할 방법이 없어서, 미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병감은 이 사실을 안 후에 차용증을 가져오게 해서 보스톤상인의 면전에서 찢어버리고, 더 이상 채무는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오병감의 명성은 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고, 당시 미국에서 건조된 상선 하나는 아예 이름을 오호관(伍浩官)이라고 명명하였다.

 

오병감의 노력으로 이화항은 시작은 늦었지만, 다른 상인들을 따라잡았고, 동문행을 대체하여 광주십삼행의 영수가 되었다. 오씨집안이 축적한 재부는 놀랄 정도였다. 1834년 오씨집안 스스로의 추계에 따르면, 그들의 자산은 이미 2,600만은원에 이르렀고, 서양인의 눈에도 세계최고의 부자로 보였다. 주강 변에 만든 오씨집안의 호화주택은 홍루몽에 나오는 대관원에 견줄만하다고 하였다.

 

봉건왕조 몰락시기의 부자로서 오병감의 재산은 오래가지 못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다국적기업이 전성기에 이르렀을 때, 암류는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다. 1840년 6월, 아편전쟁이 폭발했다. 비록 오병감은 일찌기 조정에 거액을 바치고 3품관직을 따놓았지만, 이것만으로는 그의 사업을 구할 수 없었다. 영국의 아편상인들과 여러가지로 얽히고 섥힌 관계를 가지고 있어 여러차례 임칙서로부터 질책과 징계를 받았다. 계속하여 재산을 청나라정부에 헌납하였지만 이것만으로는 일시적인 안정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남경조약의 체결후 청정부는 1843년 300만은원의 외상채무를 상환하라고 지시했고, 오병감 1인이 그 중에 100만은원을 부담하였다. 바로 이해 오병감은 광주에서 사망한다.

 

오병감의 사후에 천하제일이라던 광동십삼행은 점점 몰락하기 시작한다. 많은 상인들은 청정부의 착취에 줄줄이 도산한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다섯항구통상을 시작하면서 광동은 대외무역에서의 유리한 점을 상실하게 되고, 광동십삼행은 그동안의 특권을 잃어버리게 된다. 1856년 제2차아편전쟁의 폭발후에는 분노한 광주의 민중들이 외국상인들이 밀집했던 지역에 불을 지르게 되고, 이 때 광동십삼행을 불에 타서 소멸한다. 100여년 역사를 지니고 있던 상관은 철저하게 파괴된다.

 

오병감의 이화행은 중국과 외국에 명성을 지니고 있어, 이후 영국회사인 Jardine, Matheson & Co.는 중문명칭으로 이화양행(怡和洋行)을 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