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왕오(王五) : 대도왕오(大刀王五)

중은우시 2006. 1. 22. 16:51

 

대도왕오를 소재로 한 소설의 표지

 

왕오의 원명은 정의(正誼)이고, 자는 자빈(子斌)이다(1854-1900).

 

왕오는 무술명가에서 태어났다. 조부인 왕순은 이름을 하북,하남,산동일대에 떨치는 고수였으며 만년에는 농사를 지었다. 부친 왕득보는 무술을 매우 좋아하였고, 무공이 높아 이름을 떨쳤다. 왕오는 집안의 내력에 따라 5살 때 주먹을 내지르고 발차기를 하는 것을 배웠고, 8살에는 이미 적지 않은 초식을 익혔다. 10세에는 팔힘이 다른 사람보다 세서 백근을 들 수 있었고, 동네에서는 소년영웅으로 이름을 떨쳤다.

 

부친 왕득보는 북경의 원동표국에서 초빙을 받았고, 왕오는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올라와서 적지 않은 무림고수들과 안면을 익혔다. 왕오는 물만난 고기처럼 열심히 무예를 익혔으며, 18세에는 각 권법과 십팔반무기에 기본적으로 정통했다. 특히 길다란 칼을 쓰는 도법은 출신입화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북경의 무림에서 모두 감탄을 하는 절기였다. 그는 형제들 중 다섯째였으므로 사람들이 "대도왕오"라고 불렀다.

 

이후 30여년간 왕오는 협과 의를 행하고, 재물을 멀리했다. 여러 무림의 영웅들과 사귀었으며 화북중원무림의 영수가 되었다. 역사에 왕오는 "보표를 업으로 하고, 공과 의를 좋아했으며,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주었다"고 하였다. 그는 자주 섬서,산서,하남,하북,산동등지를 돌아다녔는데, 여러 전설적인 얘기들이 전해진다.

 

그는 중국이 망국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을 보고 애국사상이 싹텄으며, 이 때 담사동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1898년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에 담사동은 옥중에서 글을 써서 "아아횡도향천소, 거류간담양곤륜(我自橫刀向天笑, 去留肝膽兩崑崙)"(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늘을 향해 웃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가더라도 뜻이 같은 두 곤륜-높은 산-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이라는 시귀를 남겼는데, 여기의 양곤륜이 바로 강유위(康有爲)와 왕오(王五)를 의미한다고 할 정도이다.

 

왕오는 무림고수들을 모아 옥에 갇힌 담사동을 구하고자 하나 실패하고, 담사동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왕오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담사동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고 비문을 세운다.

 

1900년 의화단운동이 폭발하고, 왕오는 제자들을 이끌고 외국침략자들과 싸운다. 이 때 외국침략자들과 중국내 매국노들 40여명(일설에는 27명)을 죽인다. 어느날 아침 왕오는 상처를 입은 후 표국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데, 만주팔기병이 독일군을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왔다. 왕오는 일어서서 앞에 오는 독일병을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집으로 돌아가 칼을 집으려는데, 총소리가 들렸다. 일대의 무림대협은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갔다. 그의 나이 46세때의 일이다. 제자들은 독일병사들과 싸우다가 도망치며 후일을 기약했다.

 

왕오가 죽은 후 그의 머리는 전문의 성루에 걸렸다. 북경과 전국이 진동을 했고, 천진에 있던 대협 곽원갑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칠흙같은 밤에 전문의 성루에 와서 묵묵히 왕오의 수급을 향해 묵념을 하고, 경공절기를 시전하여 그의 수급을 등에 매었다. 이때 영국군 한 명이 걸어나오다가 곽원갑의 대력금강장에 한 번에 죽고 만다. 돌아와서 왕오를 위해 제사지내는데, 35일간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