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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의 자녀들

by 중은우시 2006. 5. 3.

양개혜(楊開慧)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

 

모안영(毛岸英)  1922. 10. 24. - 1950. 11. 25.

 - 호남성 장사에서 출생

 - 1930년 10월 양개혜와 함께 감옥에 갇힘

 - 1936년 당에서 찾아서 소련으로 보냄. 소련에서 중위계급을 달고 소련군의 대반격에 참가.

 - 1946년 연안으로 돌아옴.

 -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 미군비행기의 폭격으로 사망.

 - 유사제(劉思齊, 일명 劉松林)와 결혼. 자식은 없음.

 

모안청(毛岸靑) 1923

 - 양개혜 사망후 모안영과 함께 지하당조직에 발견되어 소련유학을 떠남

 - 소련유학기간동안 일찌기 양영수(楊永壽)라는 이름을 씀

 - 상해조계에서 얻어맏은 것을 인하여 30대이후 정신분열증에 시달림

 - 1950년대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대련에서 요양함

 - 1960년 소화(邵華, 1938년생)와 결혼.

 - 1970년 아들 모신우(毛新宇, 1992년 인민대학 역사학과 졸업. 1995년 중앙당교이론부 석사학위취득, 2003년 군사과학원에서 박사학위받음. 현재 군사과학원에서 근무)를 낳음 

 

 

모안룡(毛岸龍) 1927. 2. -

 - 무창에서 태어남.

 - 1931년 두 형과 길거리를 유랑하다 실종됨.

 

하자진(賀子珍)과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

 

모금화(毛金花) 1929. 3. -

 - 복건 장정에서 출생. 태어난 후 농가에 맡김.

 - 1년후에 모택민(毛澤民)이 찾아가서 확인하니 이미 죽었다고 함.

 - 신중국 성립후 수십년이 지나서 용암(龍巖)에서 발견된 양월화(楊月花)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1973년 하자진의 오빠인 하민학(賀敏學)은 조카딸로 인정함. 그러나, 모택동과 하자진은 이 여자와 만난 적이 없음.

 

모안홍(毛岸紅) 1932. 11 -

 - 복건성 장정에서 출생. 소모모(小毛毛)라고 불림. 모택동은 "사람들이 나를 노모(老毛)라고 부르는데, 내 아들은 소모모라고 불린다. 나보다 털(모, 毛)이 하나더 많다. 나중에 나보다 크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 장정(長征)후에 모택담(毛澤覃)에게 맡김. 모택담이 희생된 후 행방불명.

 - 1950년대초에 하소청(賀小靑, 일명 朱道來)이라는 사람이 여러 측면에서 모안홍과 닮았는데, 모택동은 사진과 자료를 보고는 "소모모같지 않다. 그러너 어쨌든 홍군의 후손이니, 당에서 길러주라"고 하였다. 1960년대 말에 이 사람은 돌연 사망한다. 그 이후 모안홍을 찾았다는 말은 없다.

 

무명남 1933 -

 - 출생직후 요절함.

 

무명녀 1935. 2 -

 - 귀주에서 태어남

 - 현지의 농민에게 맡김. 나중에 행방불명.

 

이민(李敏) 1936 -

 

 - 겨울에 섬북 보안에서 태어남.

 - 처음 이름은 모교교(毛姣姣)임. 나중에 모주석이 논어의 '민어행, 눌어언'에서 따서 이민으로 지어줌. 

 - 1940년 하자진이 소련으로 데려감.

 - 공령화(孔令華)와 결혼

 - 딸 공동매(孔東梅)는 미국펜실베니아대학에 유학, 북경대학 박사과정.

 

료와(廖瓦) 1938 -

 - 러시아이름만 있고, 중문이름은 없음.

 - 1938년 모스크바에서 출생. 10개월후 간염으로 사망함.

 

강청과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

 

이눌(李訥) 1940. 8 -

 - 1959년 북경대학 역사학과 입학, 1965년 졸업

 - 왕경청(汪景淸)과 결혼

 - 아들 왕효지(王效之)는 북경시 여유외사북무직업전문학교 졸업. 북경의 한 호텔에서 복무원으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