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시대에 익주(益州)에서 세계최초의 지폐인 교자(交子)가 탄생하였다. 익주는 현재의 사천성 성도시 일대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지점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었다.
고증한 바에 따르면 "교자"는 원래 처음에는 개인들간의 유통형식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사교자(私交子)"라고 불렀다. 경제학전문가인 서남재경대학의 유방건 교수에 따르면, 북송초에 성도 일대의 상업은 매우 발달하였고, 통화는 부족하여, 동전만으로는 유통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래서 현지의 부자 16명이 사적으로 화폐를 대체하는 닥나무 종이로 만든 권(卷)을 인쇄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이러한 권은 교자라고 부르게 된다. 현지 지방정부는 처음에는 이러한 신화폐를 단속하려고 하였으나, 이러한 신화폐가 경제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을 보고는 방침을 바꾸어 관청에서 인쇄하여 유통시키는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교자, 즉, 사교자와 관교자의 탄생지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계속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최근들어, 서남재경대학 화폐증권박물관의 첨성(詹星)은 연구를 통해서 그 위치를 파악하였다. 첨성은 "나는 화폐수집애호가로서 매번 학술교류회에 참석해서 다른 지방의 동료들이나 외국의 친구들로부터 내가 성도에서 온 것을 알고는 교자의 탄생지를 물어볼 때마다 제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어 매우 곤혹스러웠다. 심지어 연안도시의 어느 학자는 교자는 성도에서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도시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주장을 들었을 때도, 강력하게 반박할 근거를 가지지 못해서 매우 안타까웠다." (* 항주는 남송의 수도인데, 회자會子라는 지폐가 정식유통되었고, 항주에서는 성도의 교자는 성도지역에서만 유통되어 유가증권으로 볼 수는 있어도 지폐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회자가 세계최초의 지폐라고 주장하고 있다)
첨성은 성도지역의 관심있는 학자, 전문가들을 모아서 교자의 탄생지에 대한 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
원래 학자들은 성도 동문에 있는 초자가(椒子街)가 당시에 정부에서 교자를 인쇄하던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성도성방고적고>>라는 책에서 성도 동문에 "초자가"가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거리 이름이 "교자"이다. 송나라때 일찌기 교자무(交子務, 교자발행을 담당하던 관청)가 이 곳에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성도에 교자가라는 거리는 없고, 교자가라는 것은 초자가(Jiaozijie)의 발음이 교자가(Jiaozijie)와 같다는 데서 오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첨성등은 역사전적에서 근거를 찾기로 하고, <<전촉예문지>>에서 원나라때 만든 <<저폐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한 글을 찾게 된다 "성서 정중사(淨衆寺)에 두었다"는 내용을 발견한다. 그러나, 현재 성도시에는 정중사라는 절이 없었다. 나중에 사천 남충시의 학자인 정조춘의 도움으로 정중사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는데, "원래 정중사는 동한 환제 연희 연간에 지어지고, 6조때는 안포사로 불리웠고,당나라때는 정중사로 불리우며, 송나라때는 정인사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원말 명초에는 만불사로 바꾼다. 명말의 장헌충의 난때 불에 타버리고, 청나라 강희제때 중건하면서 이름은 여전히 만불사로 하였다."
이후 화폐연구가 장선희가 제공한 청나라 광서5년의 <<성도성방도>>와 현재의 <<성도성시지도>>를 비교해본 결과, 현재의 철도제2탐사설계원의 부지가 바로 이전의 만불사 부지였다는 것을 알아낸다.
어릴 때부터 만불사 근처에서 자랐던 화폐수장가 부선경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 집은 통금교에서 멀지 않았고, 옆에는 만불사가 있었다. 절의 주위에는 큰 나무들로 둘러싸 있었고, 작은 시내가 흘렀다. 시내에는 큰 물차도 있었고, 계속 돌려서 시내의 물을 절에 공급하였다. 절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종이를 만드는 맷돌이 있었다. 어릴 때 나는 자주 절앞의 토지묘에 가서 놀았고, 나이든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항전기간에는 수덕중학이 여기로 와 있었다. 1947년에는 성도이학원으로 개조되었다. 해방후에는 이 학교가 사천대학에 합병되고, 50년대에는 중철2국과 중철2원이 통금교와 마가화원일대를 차지하였고, 만불사도 점용되었다."
이로써 현재의 철도제2탐사설계원이 바로 만불사임은 확인되었다.
"관교자"를 처음 만든 곳은 예전의 정중사(만불사), 지금의 철도제2탐사설계원임이 확인되었는데, "사교자"의 탄생지가 어디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사교자"가 비록 "관교자"보다 먼저 탄생했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법정화폐로 인정한 것은 "관교자"이고, 이 때부터 진정한 화폐로서의 기능을 하였다고 볼 수 있으므로 역사상 최초의 지폐인 관교자의 탄생지는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관교자"를 절에서 만들었는가? 그 이유를 사천대학 역사학과 교수였던 진은원은 이렇게 설명한다. "교자를 만드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종이이다. 그 제작방법은 닥나무껍질을 석회수물에 며칠을 담군 다음에 나무껍질을 연화 표백시키고, 다시 맑은 물에 담구어둔 다음에 맷돌로 갈아서 지장(紙漿)을 만든다. 동시에 종이를 만드는데는 대량의 물이 필요하고, 햇볕에 말리는 곳도 필요하다. 그래서 종이를 만드는 곳은 반드시 천연적으로 물이 있고, 넓은 곳이어야 한다. 만불사는 이러한 조건에 모두 부합하였으므로 만불사에서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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