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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나라의 가짜공주사건

by 중은우시 2007. 2. 9.

<<서호지여(西湖誌餘)>>에는 남송때의 가짜공주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강의난(靖康之難)때, 북송의 도성인 변량(지금의 개봉)이 함락되고, 송휘종, 송흠종, 위귀비(韋貴妃) 및 20여명의 공주는 모두 금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금나라병사에 의하여 북방으로 끌려가 갖은 고생을 다 겪게 된다. 송휘종의 아홉째 아들인 조구(趙構)는 남쪽으로 도망쳐 임안(현재의 항주)에 남송을 건립하고 고종이 된다.

 

송휘종에게 공주 하나가 있었으니, 어릴 때 이름은 환환(環環)이었꼬, 유복공주(柔福公主)라 불렀다. 정강의난때 두 황제를 따라 북쪽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송고종때 그녀는 갑자기 한 늙은 비구니의 손을 잡고 금나라에서 도망쳐왔다. 그리고는 상황을 따라 고생을 하다가 마침 늙은 비구니가 자신을 가엽게 여겨 그녀를 암자에 숨겨주었고, 나중에 비구니복장을 하고 늙은 비구니에게 이끌려 천천히 북쪽에서 남쪽으로 도망쳐왔다고 하였다. 고생고생을 하면서 겨우 임안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송고종은 송휘종에게 확실히 공주가 있었고, 어릴 때 이름이 환환이었으며 유복공주에 봉해졌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헤어진지 오래되어 얼굴이나 몸매는 모두 명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공주로 사칭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친히 만나보고, 직접 물어보았으며, 그녀에게 변량의 궁내에서의 여러가지 사정을 확인했다.

 

유복공주는 송고종을 만났을 때, 고종의 어릴 때 부르던 이름도 기억했고, 변량궁내의 모든 사정을 조금도 어김없이 알고 있었다. 송고종은 쉽게 결정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나이든 궁녀들을 불러와서 살펴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나이든 궁녀들도 모두 진짜라고 말하였다. 다만, 여러사람들이 그녀의 발이 큰 것을 보고는 괴이하게 생각해서 물었다. "공주는 당시에 전족을 했었는데, 지금은 어찌 이렇게 발이 큰 것인지요...?" 그러자 유복공주는 눈물을 글썽이며 답했다. "금나라 사람들에게 소말처럼 끌려갔다가 겨우 기회를 틈타 도망쳐 왔고, 맨발로 여기저기 뛰어다녔고, 산하만리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예전처럼 전족을 유지할 수 있고, 예전과 같은 모양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고종은 그 말을 믿었고, 그녀가 만리 먼곳에서 찾아오느라 고생한 것을 생각해서 그녀를 궁내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여전히 유복공주라 칭하고, 후하게 대우했다.그리고 고사(高士)를 사위로 삼아서 시집보내고, 많은 재물을 하사했다. 유복공주는 시집을 간 후에도 자주 궁중에 드나들었고, 고종도 그녀를 매우 신임했다.

 

이후, 남송과 금나라는 "소흥화의"를 체결하였다. 소흥12년에 고종의 생모인 위귀비가 금나라에서 풀려나 돌아왔따. 모자는 재회하였고, 기쁜 나머지 서로 붙잡고 눈물을 흘리었다. 위귀비는 돌아온 후 송고종에 의하여 현인태후(顯仁太后)로 봉해졌다. 그런데, 유복공주는 병을 핑계로 대고 입궁하지 않았다. 고종은 그녀가 아프다고 생각해서 별달리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인태후는 임안으로 온 후에 유복공주에 관한 일을 듣고는 괴이하게 생각했다. "유복공주는 이미 금나라에서 죽었는데, 어찌 유복공주가 또 하나 있을 수 있는가?" 라고 하고는 즉시 송고종을 불러 연유를 캐물었고, 송고종은 경위를 설명했다. 태후는 "관가(官家, 송나라때는 황제를 관가로 불렀음)께서 금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남조황제가 안자(顔子, 송나라때 안가항이라는 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만드는 소나무칠기는 아주 예쁘게 만들기는 했는데, 종이로 만든 가짜였고, 그래서 얼마되지 않아 망가지곤 하였다. 그래서 송나라때는 안자라고 하면 가짜제품을 의미하였다고 한다)를 잘못 샀다고 놀렸습니다. 유복공주는 이미 죽었는데, 어찌 금나라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겠습니까?"

 

고종은 현인태후의 말을 듣고는 화를 참을 수 없었고, 즉시 유복공주를 구금했고, 대리시에 보내어 심문을 하게 하였다. 엄한 심문끝에 유복공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원래 변경에서 유랑하던 여자로 이름이 이정선(李靜善)이었다. 그녀는 늙은 비구니를 따라다녔는데, 그 비구니는 이전에 변경의 궁중에 많이 드나들고, 궁내의 일을 잘 알았다. 나중에 금나라가 침공하면서 두 황제와 후궁들을 데리고 북으로 갔다. 늙은 비구니는 송고종이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이정선이 유복공주와 모습이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부귀를 탐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따. 그래서 궁중의 일을 이정선에게 하나하나 얘기해주고, 금나라에서 도망쳐 왔다고 말하게 하여, 송고종을 속인 것이었으며, 십여년간 부귀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위귀비가 되돌아오는 바람에 이 일이 들통나고,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송고종은 유복공주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는 즉시 늙은 비구니를 붙잡아오게 하여 심문하였다. 그 후 가짜 유복공주와 늙은 비구니를 참수하였다. 고사는 부마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송사-공주열전>>에도 유복공주가 귀국하는 도중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송사.환관열전.풍익전>>에도 "먼저 가짜 유복공주가 와서 스스로 왕귀비의 딸이라고 하였다. 풍익은 귀비와 같이 있었다고 말했었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보내어 살피게 하였다. 풍익은 진짜라고 보고하였따. 나중에 일이 발각되자 풍익은 검사를 잘못한 것으로 인하여 소주편관으로 보내어졌다..."는 내용이 있어, 가짜공주사건이 확실히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복공주가 주살되기는 하였지만, 민간에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가 억울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에도 어떤 학자는 유복공주는 실제로 진짜라는 주장을 펼쳤다. 즉, 고종의 생모인 위귀비가 북쪽의 금나라에서 돌아온 후에 자신이 북쪽에서 당했던 일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송고종을 설득해서 유복공주를 죽이게 하였다는 것이다. 고종은 모친의 명을 거절하지 못했고, 할 수 없이 그녀를 죽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조견문록>>, <<수국수필>>등에서 모두 이런 견해를 밝히고 있다. 현인태후는 금나라에서 여러 해를 머물렀는데, 깨끗한 몸을 유지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옛날 궁녀들이나 풍익등 환관들은 공주가 진짜라고 확인했는데, 가짜공주가 아무리 비슷하게 닮았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자신이 없으면 그렇게 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혹형을 받아서 한 자백이라는 것은 진짜공주라고 하더라도 가짜공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후세인들의 추측이 너무나 각박한 것인지는 몰라도, 당시의 풍운변환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이렇게 각박한 일도 벌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