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京晨報 2005년 12월 26일기사]
남경신보의 남경시 강녕진 청수천의 진회 가족묘발굴에 관한 추적보도의 최신소식이다. 2일전에 묘실의 청석판이 무너져서, 묘실을 열고 주인의 신분을 확인하는 업무가 연기되었다. 그러나, 12월 25일, "문물보호공작방안"이 나오고 안전조치를 취한 후 이 신비한 면사를 드리운 송나라때의 대묘는 그 면목을 드러내게 되었다.
12월 25일, 기자는 다시 강녕현 청수행정촌을 갔다. 현장에서 발굴현장의 농민이 전날보다 절반이상 늘어난 것을 보았다. 모두 20명이 흙을 파고, 옮겼다. 많은 농민공들은 3개의 품(品)자형으로 된 묘의 앞에 있는 흙무더기에서 몇명의 민공이 4개의 굵은 남죽으로 약10미터 높이의 구조물을 설치하고 있었다. 이 구조물은 고고학자들이 묘실을 열기 전에, 전체 발굴구역의 평면도와 녹화장면을 찍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발굴인원이 추가투입되는 동시에 현장의 안전경비업무도 전날보다 강화되었다. 강녕 현지의 영찰은 이미 현장에 출동하여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길다란 경찰경비선이 이미 만들어졌다. 고고현장은 임시통행증이 있어야 드나들 수 있었다.
경찰은 이번 고고발굴은 현지 촌민과 매체의 많은 관심을 받았으므로, 경찰은 이미 이틀 전에 일부 보안을 파견하여 현장의 질서유지에 힘썼다. 요 며칠, 경찰도 계속 고고현장에 나타났고, 이 남송의 대묘에 대한 발굴업무에 대한 보호에 만전을 기하였다.
12월 25일 오후 4시경, 기자는 현장에서 전체 묘실의 개봉업무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커다란 양수기가 이미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품자형"의 묘실중 가장 좌측에 큰 구멍이 있는 그 묘실에서 물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25분후, 묘실안의 대량의 물이 묘실바깥으로 뽑아낸 후, 여러 작업자가 묘실의 옆에 도르레차를 설치했다. 추정에 따르면 오늘 가장 먼저 개봉하는 것은 좌측의 바로 이 묘실일 것이다.
이번 발굴계획에는 원래 12월 24일 오전 10시에 발굴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현장에서 사고가 나거나 군중의 안전이나 문화재보호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발굴을 늦추었다. 이 계획에는 "....진회가족묘의 외부 정리업무는 이미 기본적으로 끝이 났다. 묘장의 안전을 고려하여, 근일 두껑을 열고 묘실내부를 정리할 계획이며, 여러 업무는 이미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되어 있다.
고고인원에 따르면 가장 좌측묘실의 양수기가 물을 다 뽑아낸 후, 그들은 전체 묘실에 대한 발굴업무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남송대묘의 발굴업무를 중시하는 것은 남경시박물관의 화국영 부관장이 친히 현장에 나와서 총지휘하는데서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인 발굴계획도 아주 정확하고 상세했다. 이번 발굴의 구체적인 절차는 먼저, 박물관의 공작이누언이 도르레기를 이용하여 청석판을 들어올리고, 그 후에 양수기로 묘실내의 물을 배출하고, 묘실내의 진흙을 말리고, 이어서 묘실내에 기술인원이 사용할 공작대를 설치하고, 마지막으로 진흙을 정리하고, 문화재를 발굴하며, 이로써 전체 묘실의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문화재보호측면에서는, 일단 문화재가 발굴되면, 그날로 출토문화재를 운송하여, 만의 하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한다.
이번 발굴은 중앙텔레비전, 홍콩문회보등 전국 50여개 매체의 관심을 얻고 있다. 모두 기자를 고고현장에 파견하고 있다. 고고현장에는 고고학자 및 많은 매체들이 남긴 세 가지 미스테리가 남아 있다.
첫째 미스테리: 진회, 진가자제 그외에 어떤 사람이 있는가?
고고현장에서 많은 매체가 고고대원에게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것은 "묘 안에 뭍여 있는 것이 진회가 맞는가"이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고고대원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 출토물로 증명할만한 문물이 나오기 전에는 그들은 자기의 추측을 발표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남경시 박물관의 고고대 책임자는 "초보적으로 진회의 가족묘로 추정한다. 그러나 진회인지 아닌지는 묘실을 열어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해 책임자는 "진회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나 진회의 자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다른 사료에 기재되지 않은 남송의 명신일 가능성도 있다"
둘째 미스테리: "품자형"의 세개 묘실에는 누가 묻혀 있는가?
이번 청수촌 남송대묘안에는 "품자형"으로 분포된 세개의 묘실이 함께 여러 사람의 호기심을 끌고 있다. 이 세개의 묘실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많은 문사애호가들은 이런 의문을 던진다. 만일 진짜 진회라면, 세개 묘실은 진회와 그의 1처 1첩은 아닐까? 그러나, 사서상에 진회가 첩을 두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 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중국 송사연구학회회장 왕증유(王增瑜) 선생은 <<송사>>에서 진회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어디에 묻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비교적 적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서 보면, 지회는 확실히 정처 왕씨만을 두었다. 그러나 그의 처인 왕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양지 진희(秦熺)를 받아들였다. 다른 야사의 기재에 의하면 진회도 친생아들이 있단ㄴ 것이다. 즉, 진회와 비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인데, 할 수없이 성을 바꾸어 다른 집에 주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당시 권세가 대단했던 진회는 처가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아마도 시녀나 소첩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진회와 처첩이 하나의 묘실에 같이 합장되었는지는 송사연구자들에게 지금까지 계속된 의문이었다.
셋째 미스테리: 묘실안에는 문물이 있을 것인가?
2004년 강녕진 건중촌 진회가족묘에 익숙한 사람에 있어서, 이 고묘는 비록 도굴을 거치기는 했었지만, 여전히 다른 한 묘실에서 800여건의 아주 가치높은 문물을 발견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번 청수촌의 이 진회가족묘안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문물이 있을 것인지도 사람의 관심을 끈다.
남경시박물관의 고고전문가에 의하면 ,그들은 이 남송대묘의 주묘실 및 다른 두개의 묘실에서 이미 도굴구멍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큰 구멍은 주묘실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분명히 도굴당한 적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도굴수법은 명나라때 연지하를 팔대 사용했던 "화소둔격"법이었다. 그래서 문물이 존재할 것인지, 얼마나 존재할 것인지에 대하여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대묘는 명나라때 도굴되었는데, 동시에 3개의 묘실이 전부 도굴되었는지는 의문이 있다. 그래서 고고대원들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 외에, 도굴자들은 일반적으로 묘지등 주인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석각은 가져가지 앟으므로, "만일 묘지등 신분증명문건을 발굴한다면, 그것은 진회가족묘 고고사상 하나의 업적이 될 것이다"라고 고고대원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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