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秋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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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송제국은 중국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부유했던 왕조이다. 부유한 정도는 지금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국학자인 스타프리아노스는 그가 제은 "세계통사"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송나라 왕조에서 주의할 점은 명실상부한 상업혁명이 일어났다는 점이다....근원은 중국경제의 생산효율이 확실히 제고된데 있다. 기술의 안정적인 발전은 전통공업의 생산량을 제고시켰고...경제활동의 신속한 발전은 무역량을 증가시켰다. 중국에 처음으로 상업위주인 행정위주가 아닌 도시가 형성되었다. 특히, 송나라때는 대외무역량이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 훨씬 많았다." 이와 같이 고도로 발달한 상업이 송나라의 사회를 또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게 만들었다.
송왕조는 경제문화의 여러 방면에서 업적을 쌓았다. 현대인들에게 중국고대의 4대발명품이라고 불리는 것중에서 3가지가 송나라때 나타났다. 경제발달로 국고는 충족했고,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상비군을 가진 왕조였다. 이와 동시에 아이러니한 것은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유명한 '약소'왕조였다는 것이다. 원인은 간단하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즉위하면서 생각한 것은 어떻게 하면 당나라때 변방의 장수들이 할거하는 국면이 다시 나타나지 않게 하고, 어떻게 하면 오대이후의 여섯번째 단명왕조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여기에서 그가 얻은 답안은 "강간약지(强幹弱枝)"정책이었다. 줄기를 강하게 하고, 가지를 약하게 하는 것, 즉 중앙정부를 강하게, 지방정권을 약하게 하는 것이었다. 역사상 유명한 "배주석병권"(술잔을 주고 병권을 빼앗은 것)의 이야기는 그의 이러한 정책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방정권이 쇠약했으므로, 중앙정부가 전체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더욱 중요했다. 그러나 대송제국은 각급정부를 관리하는 것이 그다지 효율적이거나 유효하지 못했다. 여기에 여러가지 객관적인 문제가 있어, 정부의 명령은 자주 지체되는 경향이 있었다. 고대에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하여 군사적으로 송나라는 항상 열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하기 위하여 송왕조는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원교근공(遠交近攻, 멀리 있는 나라와는 사귀고, 가까이 있는 이웃나라는 공격한다)"의 정책이 있었다. 이 정책은 고대 춘추전국시대에 매우 성행하던 것이다. 대송제국은 이 정책을 가지고 생존전략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잘못된 정책이었다. 바로 송나라는 이러한 정책을 쓰는 바람에 사지로 몰리게 된다.
첫째. 거란의 요(遼)
송나라의 건립초기에 바로 강력한 이웃나라가 있었다. '거란'이라고 불리우는 요나라였다. 요나라는 사회형태나 경제형태에서는 모두 낙후한 나라였지만, 그들은 침략적이었고,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이라는 활동을 통하여 나라를 생존시키고 발전시킬 기회를 찾았다. 그래서 부유한 송나라는 항상 그들의 공격목표였다. 전쟁이 여러해 동안 이어졌다. 송나라는 스스로 침공을 받지 않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써 요나라에 공물을 바친다. 즉 요나라에 대하여 자금지원을 하는 것이다. 과거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송나라의 정책이 체면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공물을 바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예물을 하사하였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하던간에 스스로 원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원한은 마음 속에서 자라고 있었고, 발아할 기회만 엿보게 되었다.
이 때 요나라의 동북쪽은 원래 황무지였는데, 나중에 강력한 유목민족이 나타나게 된다. 바로 여진족이고, 나중에 금나라를 세운다. 그들은 요나라의 핍박을 받고 있었으며, 요나라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송나라는 암중에 여진족과 교류하며, 여진족에 자금을 지원해준다. 송나라는 돈은 많았으니까. 일정한 기간동안 준비기간을 거쳐, 금나라사람들이 더 이상 요나라의 핍박을 참을 수 없게 되자, 송과 여진은 연합하여 요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송나라는 순망치한의 교훈을 잊고 있었고, 오로지 복수하고픈 마음 뿐이었다. 송나라와 여진의 합공에 요나라는 무너지고 만다.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웠을 뿐아니라 송나라에 대하여는 예전에 요나라가 누렸던 혜택을 똑같이 누리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즉, 공물을 바치라는 뜻이다. 그러나 송나라는 거절했고, 금나라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전쟁이 눈앞에 다가왔다.
둘째, 여진의 금(金)
송나라는 금나라의 위협에 경계는 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열심히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전쟁이 한번 일어나자, 급히 대응하기는 하였지만, 결과는 연이은 패배였다. 수도인 변경마저도 지키지 못하였고, 금나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대량의 전리품과 포로로 잡은 두 명의 황제를 데리고 그들은 수도인 북경으롣 돌아갔다. 실로 옛 원한도 아직 갚지 못했는데, 새로운 원한만 생긴 꼴이다. 남쪽으로 도망쳐 남송을 세운 송나라사람들에게 금나라는 다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원수인 것이다. 그러나, 남송도 어쩔 수 없이 금나라에 공물을 바치면서 기회를 노리게 된다.
셋째, 몽고의 원(元)
이 때, 금나라의 북쪽 초원에 또 하나의 유목민족이 등장한다. 바로 몽고족이다. 금나라는 몽고인들을 핍박하였고, 몽고족들의 반항심리를 자극했다. 징기스칸이 몽고의 각부족을 통합하자, 금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남송은 예전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눈앞의 원한만 생각해서 다시 몽고족과 손을 잡는다. 여러번의 전쟁을 통해서 금나라는 많이 쇠약해졌다. 이 때는 남송과 금나라가 연합하여 몽고에 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 당시 징기스칸은 서쪽정벌에 나서 금나라와 남송은 잠시 그냥 두었다. 그러나, 서쪽정벌이 끝나고 후계자인 오고타이가 등장하자 다시 금나라에 대한 마지막 전투를 시작한다. 남송의 도움을 받아 두 나라의 군대는 금나라의 수도를 무너뜨린다. 전리품의 분배시에 벌써 남송과 몽고간에는 마찰이 발생한다.
몽고의 몽크는 결국 남송에 대하여 대거 진공하게 된다. 여러번의 전투를 거쳐 남송은 결국 철저하게 멸망한다. 냉혹한 현실은 하나의 명제를 증명한다. 그것은 바로 대송제국은 자기의 철천지원수와 적수에 의하여 멸망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도와주었던 "친구"에 의하여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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