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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조어성전투(釣魚城戰鬪) : 송의 가장 성공적인 몽고군 방어전

by 중은우시 2006. 12. 11.

 

송나라와 몽고의 전쟁은 1235년에 전면적으로 발발하였다. 전쟁은 1279년 애산(崖山)의 전투에서 송황실이 멸망할 때까지, 근 반세기간 계속되었다. 이것은 몽고세력이 궐기한 이래 몽고군이 맞은 가장 시간이 길게 걸리고, 가장 힘을 많이 쏟고, 가장 고달팠던 전쟁이었다. 1259년에 발생한 사천성 합주(合州)의 조어성전투는 그 중에서도 영향이 가장 컸던 전투였다.

 

1234년, 송, 몽고연합군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남송은 병사를 동원하여 하남의 실지를 회복하고자 했으나, 몽고군의 공격을 받아 무산된 바 있다. 1235년, 몽고군은 서쪽으로는 천섬(川陝, 사천성과 섬서성), 동으로는 회하(淮河)하류의 수천리 전선에서 동시에 남송에 대한 남진을 감행하였으며, 송과 몽고의 전면전이 폭발한 것이다. 1241년까지, 몽고군은 남송의 많은 토지를 유린했으며, 사천성은 삼대전쟁터(나머지 두 개는 경호전쟁터 즉, 지금의 호북, 하남일대, 양회전쟁터 즉 지금의 회하유역일대)중에서 몽고군에 의한 파괴약탈이 가장 극심했던 지역이다.

 

그러던 중에 몽고의 오고타이(窩闊台)가 사망하였고, 내부에서 정쟁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남송에 대한 공세가 약화되었다. 남송은 이를 틈타 숨을 쉴 수 있었고, 각 전쟁터의 방어진지를 조정하고 강화하였다. 1242년, 송이종은 양회항몽전쟁에서 현저한 공을 세웠던 여개(余개)를 사천으로 보내어 행정을 책임지게 하였으며, 이로써 사천의 국면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상류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여기는 사천성에 대하여 일련의 정치, 경제, 군사적인 조치를 취하였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산성방어체제를 구축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천의 주요한 강, 하의 연안과 교통요지에 험준한 곳을 택해서 성을 쌓는 것이며, 성들을 별처럼 연결시켜 서로 성원할 수 있는, 완벽한 전략방어체제를 갖추도록 한 것이었다. 조어성은 바로 산성방어체계의 핵심이며 가장 견고한 보루였다.

 

조어성은 사천성 합주현성의 동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조어산위에 있다. 산은 우뚝 솟아서 상대고도가 약 300미터나 된다. 산의 아래로는 가릉강(嘉陵江), 거강(渠江), 배강(배江)의 세 개의 강이 모여서 흐르며, 남, 북, 서의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고, 지세가 아주 험준하다. 여기는 산수가 험준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수로와 육로교통이 연결되어 사천의 각지로 연결되는 교통요지였다. 팽대아(彭大雅)는 사천제지부사를 지내는 동안(1239-1240), 감윤초(甘閏初)에 명하여 조어성을 축성하게 하였다. 1243년, 여개는 파주(播州, 현재의 준의)의 현사 염진, 염박 형재의 건의를 받아들여, 염씨 형제로 하여금 조어성을 다시 쌓게 하였고, 합주의 관청과 흥원도통사를 그 곳으로 옮겼다. 조어성은 내, 외성으로 나뉘는데, 외성은 험준한 절벽위에 쌓고, 성은 돌로 쌓았다. 성내에는 전답과 사철 끊이지 않는 풍부한 수원이 있었다. 주위의 산록에는 많은 경작지가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조어성으로 하여금 장기간 방어전을 펼칠 수 있는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도록 하였다. 천험의 요새로 방어는 쉬우나 공격은 어려운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1254년, 태주의 수비장수 왕견(王堅)은 성을 좀 더 완벽하게 가다듬었다. 사천의 난민들은 병란을 피해 이 곳으로 몰려들었으며, 조어성은 병사와 양식이 충분한 견고한 보루가 되었다.

 

1251년, 몽크(蒙哥)는 칸(大汗)의 지위에 올랐고, 몽고의 정국이 안정되자, 적극적으로 송을 멸망시킬 전쟁을 기획하였다. 몽크는 징기스칸의 막내아들인 토레이의 큰 아들이다. 일찌가 발도(拔都)등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한 바 있었고, 용맹하고 전투에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1252년, 몽크칸은 동생인 쿠빌라이(忽必烈)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대리(大理)를 평정하게 하였으며, 남송에 대하여 포위공격하는 형세를 취하였다.

 

1257년, 몽크칸은 대규모의 대송전쟁을 일으킨다. 몽크한은 쿠빌라이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악주(鄂州, 지금의 무한)를 치게 하고, 타차르(塔察兒), 이단으로 하여금 양회를 공격하게 하여, 송나라의 군사력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올량합태(兀良合台)로 하여금 운남에서 병사를 이끌고 광서를 거쳐 북상하게 하였으며, 몽크한은 스스로 몽고군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사천을 공격하였다. 몽크한은 사천에서 주공격방향을 몽고군이 장점이 있는 야전전투에서 찾기로 하고, 사천을 먼저 공격하여 확보한뒤, 장강을 따라 남하하는 것을 계획하였으며, 남하하면서 각 지역의 군대와 합쳐서 직접 송나라의 수도 임안(항주)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1258년 가을, 몽크는 4만의 군사를 이끌고 3부대로 나누어 사천을 들어갔다. 여기에 사천에 있던 몽고군과 각지에서 동원한 부대를 합하여 몽고군의 수는 4만을 훨씬 넘었다. 몽고군은 검문고죽애, 장녕산성, 봉주운산성, 낭주대획성, 광안대량성등을 차례로 점령하였고, 합주로 다가왔다. 몽크칸은 투항한 송나라 사람 진국보(晋國寶)를 조어성으로 보내어 투항하라고 하였으나, 그는 합주수비장군 왕견에 의하여 살해당한다.

 

송나라 개경원년(1259년) 2월 2일, 몽크한이 군대를 이끌고 계조탄(鷄爪灘)을 통하여 거강을 건넜고, 석자산(石子山)에 군영을 차렸다. 2일, 몽크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조어성 아래로 왔다. 7일, 몽고군은 1자성벽을 공격하였다. 1자성벽은 횡성벽이라고도 하는데, 그 작용은 성외의 적군의 움직임에 장애를 주는 것이었고, 동시에 성내의 수비군으로 하여금 외성벽을 이용하여 1자성벽에서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조어성의 성남, 성북쪽에 1자성벽이 있었다. 9일, 몽고군은 진서문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 날, 몽고 동도군 사천택(史天澤)이 병사를 이끌고 조어대에 와서 참전하였다.

 

3월, 몽고군은 동신문, 기승문과 진서문의 소보를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따. 4월 3일부터, 큰 비가 20일간 연속으로 내렸다. 비가 그친 후, 몽고궁은 4월 22일, 호국문을 중점적으로 공격하였다. 24일밤, 몽고군은 외성에 올라갈 수 있었다. 수비하는 송나라 군사들과 격전을 펼쳤다. <<원사. 헌종기>>에서는 "송나라 병사를 많이 죽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몽고군의 공세는 결국 송나라 군사에 의하여 격퇴되었고, 물러났다. 5월, 몽고군은 계속 조어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몽고칸은 병사를 이끌고 사천성에 들어온 이후 연도의 모든 산성채보는 남송의 장수들이 항복함에 따라 쉽게 손에 넣었으며, 진정으로 격투를 한 것은 조어성이 처음이었다. 그러므로, 조어산에 도착한 후, 몽크는 기세를 이어서 이 성도 무너뜨리고자 하였고, 성을 버리고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몽고군의 공성무기가 정교하기는 했지만, 조어성의 험준한 기세앞에서는 별달리 활약하지 못했다. 조어성의 수비군사는 주장수인 왕견과 부장인 장각(張珏)의 지휘하에, 몽고군의 진격을 계속 물리쳤다. 천호(千戶) 동문위(董文尉)는 몽크칸의 명을 받아 등주 한족병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했다. 동문위는 병사를 격려하고, 운제(雲梯, 구름사다리)를 끼고 날아오는 돌을 무릅쓰며 힘들게 성에 올랐고, 성을 방어하는 송나라 군사들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병사들의 부상이 참중하여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그 조카인 동사원(董士元)은 숙부인 동문위를 대신하여 공성할 것을 청하였고, 병사를 이끌고 성에 올랐다. 송나라 군사들과 오랫동안 싸웠으나 결국 뒤를 받쳐주지 못하여 부득히 퇴각하고 말았다.

 

조어성을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자. 몽크칸은 여러 장수들에게 계책을 내도록 하였다. 술속훌리(術束忽里)는 병사들이 굳건하게 지키는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보고, 소량의 군대를 남겨서 포위한 후, 주력은 장강의 물길을 따라 남하하여, 쿠빌라이의 군대와 만나서, 한꺼번에 남송을 멸망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만했던 몽고의 여러 장수들은 모두 조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몽크한은 술속홀리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공성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조어성이 너무나 굳건하여, 움직임이 민활하고 흉맹하고 용감한 몽고기병은 전혀 활약하지 못하였다.

 

6월, 몽고의 장수 왕덕신(汪德臣, 원래 금나라의 장수)는 병사를 이끌고 방에 외성의 마군채(馬軍寨)를 공격했으며, 왕견도 군대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였다. 하늘이 밝아지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몽고군의 구름사다리는 부러졌으며, 할 수 없이 퇴각했다. 몽고군은 5개월간이나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했다. 왕덕신은 단기로 조어성의 아래로 가서, 성의 수비군사를 불러내어 싸우고자 하였으나, 성에서 쏘는 화살을 맞고 그는 결국 진운산의 절에서 죽고 말았다. 몽크는 그의 죽음소식을 듣고는 탄식하며 한 팔을 잃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왕덕신의 죽음은, 몽크에게 큰 정신적인 타격을 주었고, 조어성을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자, 마음 속에 병이 되었다.

 

몽고군이 대거 사천성에 들어온 후, 남송은 사천성에 대하여 대규모의 지원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조어성을 도와주기 위해서 파견한 병사들은 몽고군에 의하여 저지되었고, 계속 조어성의 아래에 도달하지 못했다. 비록 이러하기는 했지만, 포위공격이 수개월에 달하도록 조어성은 여전히 물자가 풍족했고, 수비군의 투지는 높았다. 하루는 남송의 수비군들이 15킬로그램에 달하는 생선의 꼬리와 찐밀가루떡 백여장을 성밖의 몽고군에게 던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몽고군에게 서신을 보내어 10년도 더 버틸 수 있다고 하였다. 몽고군은 조어성을 함락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다. 둘을 비교하면 성밖의 몽고군의 상황은 아주 엉망이었다. 몽고군은 성밖에서 오랫동안 주둔하였는데, 이미 더운 여름철이 되었고, 몽고족들은 원래 여름날씨에 견디기 힘들었고, 물도 맞지 않았다. 이리하여 군중에 감기, 학질, 곽란등의 질병이 유행하였고 상당히 심하였다.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몽크칸이 6월에 병을 앓았다고 한다. 라스터의 <<사집>>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이질이라고 적었다. 다른 <<마르코폴로여행기>>와 명나라 만력때의 <<합주지>>에 의하면, 몽크칸이 부상을 입었다고 적고 있다. 어쨌든, 몽크한은 더 이상 성을 공격할 수 없었다. 7월, 몽고군은 스스로 조어성에서 물러난다. 금검산 온탕협(현재의 중경북온천)에 이르렀을 때, 몽크칸은 사망한다. <<원사>>의 기재, 원나라 사람들의 문집, 비전, 행장등의 기재에 따르면, 몽크한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조어성에서 죽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조어성의 전투가 무척 치열했다는 것과 몽고군에 상당한 손실을 안겼다는 것이다.

 

몽크칸이 조어성에서 패하여 사망한 것은 영향이 매우 컸다.

 

첫째, 이는 몽고군에 의한 송나라를 멸망시키는 전쟁이 전면적으로 와해된 것을 의미한다. 송나라는 이로써 20여년을 더 명맥유지하게 된다. 사천에 진출하였던 몽고군은 철군할 수밖에 없었고, 몽크칸의 시신을 호송하여 북으로 돌아갔다. 동로군을 이끌고 장강의 천험을 돌파하여 악주를 포위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그의 동생 아리불가와 칸의 지위를 놓고 다투어야 했으므로, 부득이 철군하여 북으로 돌아갔다. 운남에서 광서를 거쳐 북상한 올량합태의 군대는 계속 승리하고, 이미 담주(潭州, 지금의 장사)에까지 이르렀지만, 몽크가 죽자, 쿠빌라이가 파견한 부대와 함께 장강을 건너 북상하게 된다. 몽고의 남북양군은 기본적으로 계획에 따라 진군하였으나, 서쪽의 주전장터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둘째, 몽고군의 제3차 서정(西征)이 정체되었고, 몽고세력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대한 위협이 완화되었다. 1252년, 몽크칸은 동생인 욱렬올(旭烈兀)을 보내여 제3차 서정을 시도하고, 이란, 이라크 및 시리아등 아라비아반도의 토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바로 욱렬올이 이집트를 향하여 진공하려고 할 때, 몽크의 죽음을 전해듣는다. 욱렬올은 소량의 부대를 남겨 계속 싸우도록 하고, 대군을 이끌고 동으로 회군한다. 결과적으로 몽고군은 중과부적이 되어 이집트군에 패배하고, 몽고군은 아프리카로 진입하지 못했다. 몽고의 대규모 확장행동은 이후부터 기세가 꺽이게 된다. 이로 인하여 조어성의 전투의 영향은 중국의 범위를 훨씬 넘어섰고, 세계역사상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것이다.

 

셋째, 이는 쿠빌라이가 몽고정권을 장악하는데 계기를 제공한다. 이로써 중국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몽크한은 몽고보수주의자이다. 그가 시행한 것은 전통적인 정책이었다. 이런 몽고부족과 서역색채가 농후한 정책은 이미 광대한 중원의 한족대지를 통치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몽고통치집단내에서 드물게 보는 한문화를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몽크가 칸의 지위에 오른 이후, 쿠빌라이는 막남의 한족땅을 지배하였다. 그는 대량의 한족 선비를 받아들였고, 한화정책을 극력 추진하였으며, 많은 성과를 보았다. 그는 몽크칸과 그의 신료들의 의심을 사서, 쿠빌라이는 관직에서 파면되었고, 그가 실행하던 한화정책은 폐지되었다. 쿠빌라이가 칸의 보좌에 오른 이후, 한화정책을 계속 썼고, 점진적으로 몽고군의 남살정책은 완화되었고,남중국의 경제와 문화는 파괴를 벗어날 수 있었다. 몽크칸은 일찌기 유언을 남겼는데, 이후 조어성을 함락시키면 성의 사람을 다 죽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조어성이 몽고에 항복하자, 쿠빌라이는 그 군민을 사면해준다. 바로 쿠빌라이가 정권을 잡았으므로, 몽코칸국은 변강정권에서 중국의 봉건대왕조인 원나라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어성은 산성방어체계의 전형적인 것이다. 과거에는 그 방어작용이 충분했다. 그는 몽고군마저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한 보루였다. 몽크한이 사망한 후, 조어성은 계속 몽고군의 여러차례에 걸친 공격을 막아낸다. 1279년 수비장수 왕립이 성문을 열고 투항하고나서야 비로소 몽고의 손에 들어간다. 중국인민혁병군사박물관의 고대전쟁관에는 특별히 조어성 고전장의 모형을 제작해 두고 잇는데, 이것은 조어성전투가 중국고대전쟁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