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서의 기록을 보면, 중국의 진한(秦漢)시대에는 황금이 유통되는 주요한 화폐였고, 황제의 하사품으로 많이 쓰였으며 하사시에는 천근 만근단위였다. 진한시대에 황금이 풍부하였던 것은 정말 후세 사람들이 놀랄만한 정도였다. 그런데, 동한(東漢)시대에 들어서면서 황금은 돌연 유통분야에서 사라져버린다. 거래에 황금을 사용하는 것이 줄었을 뿐아니라, 하사시에 황금을 내리는 것도 매우 적어졌다. 그렇다면 서한시대에 있던 대량의 황금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후세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여러가지 추측과 의견을 내놓고 있다. 아래에서는 그 중 몇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의견 : 불사(佛事)에 사용되었다는 설이다. 나중에 황금이 적어지고, 금값이 날로 오르게 되었는데, 그 이유로서는 중원의 황금은 이미 거의 다 캐었는데,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불상을 만들고 불상에 금으로 도금을 하게 되었다. 큰 도시는 물론이고 작은 시골마을까지 불교사찰이 없는 것이 없는데, 절이 있는 곳이면 모두 황금을 칠한 불상이 있었다. 이것을 전체 나라로 계산하면 얼마나 많을지 알 수가 없다. 여기에 불경을 쓰는데도 황금으로 쓰고, 글을 쓰면서도 황금으로 써서 붙이는 등의 풍속이 유행하였다. 원래 황금의 양이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이렇게 날로 쓰다보니 결국 바닥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둘째 의견 : 동한시대에 황금수량이 적어진 것은 황금이 외국으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외국에 하사품으로 금을 내리고, 대외무역에 사용하다보니 황금이 대량으로 해외에 유출되었다고 본다.
셋째 의견 : 지하에 매장되었다는 설이다. 당임오가 <<서헌대량황금소실의 수수께기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서한의 대향의 황금은 동한시대에 들어서면서 돌연히 유통영역에서 퇴출되고 소실되었는데, 유일한 답안은 일부분의 황금은 금기, 금물로 만들어서 지하에 묻어버렸고, 다른 일부분은 금화의 형태로 부유한 상인이나 각급 관리들을 묻을 때 묻어버렸다는 것이다. 전국시대로부터 서한시대까지, 상인들은 값이 쌀 때 사들이고 값이 비쌀 때 팔기 위하여 대량의 황금을 매집하였고, 봉건통치자들은 또한 국가기관을 운용하기 위하여 국가의 대부분의 황금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황금을 사용하지 않고 보관하기 시작했다. 대량의 황금은 이런 사람들에 의하여 쓰여지지 않고 저장되었다. 예를 들어, 양효왕이 죽을 때, 집안의 황금이 40여만근이 있었다"고 기재하고 있다. 동탁의 경우에도 미에 오를 건축했는데, 오에는 금 2,3만근, 은 8,9만근을 보관하였다고 기재하고 있다. 나중에 출토되는 황금의 양을 보면 역시 사람들이 놀랄만한 정도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황금을 보관하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게 되었는가? 하나는 대량의 황금을 장악한 상인들은 황금으로 바꾸어 저장해서 유사시를 대비하였고, 다른 하나는 서한말기에 농민반란이 일어나면서 부호관리들이 황금을 숨기고나서 도망치기도 하고 죽기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넷째 의견 : 또 하나의 견해는 사서에 기재된 서한시대의 대량의 황금은 사실은 진정한 의미의 금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실은 황동(黃銅)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진한시대에 황금채굴량을 볼 때, 대외무역을 볼 때, 서한시대에 그렇게 많은 황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돈을 "금"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당시에 유통되던 "황동"을 "황금"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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