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사자성어중에 "야랑자대(夜郞自大)"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무 것도 아닌 인물이 스스로 잘난 것으로 알고 까분다는 정도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이 사자성어의 유래는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데, <<서남이열전>>에 의하면, "서남지역에는 오랑캐의 군장들이 십여명이 있는데, 그 중에서 야랑이 가장 크다"라는 마이 나오고, 한나라 무제때 당몽(唐蒙)이 명을 받아 기원전 135년에 남월국에 사자로 가면서 이쪽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 때 한나라에서온 사신에게 야랑국의 군왕은 "한나라와 우리 야랑국은 누가 더 큰가?"라고 물어, 한나라의 일개 군현규모에 불과한 야랑국이 이렇게 세상넓은 줄을 모르는데 대하여 사신이 기가 막혔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여기에서 "야랑자대"라는 성어가 유래되었다.
야랑국은 한나라 성제때(기원전 28-23년), 야랑국과 남방의 작은 나라들간에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한나라 조정의 중재를 듣지 않자. 한라라의 군수 진입심이 야랑국에 들어가서 당시 야랑국의 마지막 국왕을 참하고 평정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이후 사서에 야랑국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야랑국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학설이 통일되지 못하고 분분히 나누어져 있는데, 네가지 주요한 이슈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야랑국의 강역과 중심지역은 어디였는가?
이 문제는 학자들간에 이견이 가장 많은 분야이고, 논쟁이 가장 치열한 분야이다. 통상적으로 국가라면 자기의 통치범위가 있고,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있어야 한다.
야랑국의 중심지역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10여개의 학설이 있다. 귀주성내의 안순, 동재, 육기, 망모, 혜수, 장순, 삼도등이 야랑국의 중심이라는 설도 있고, 운남의 선위, 광서와 호남에서는 자기 지역이라는 설도 있다. 각자 중심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는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야랑국의 주체민족은 누구인가.
여기에는 야랑국을 구성하는 가장 많은 인구가 속한 민족이 어디인지도 포함된다. 야랑의 족속에 대하여는 주로 4가지의 견해가 있다. 묘족이라는 설, 이족이라는 설, 포의족이라는 설, 걸로족이라는 설. 지금까지 4개민족은 모두 자신의 민족학회를 만들어서 야랑족이 자신들의 선조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고 있다.
셋째, 야랑의 사회성격은 어떤가?
야랑의 경제발전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평가에 근거하여 야랑국의 사회성격에 대하여도 크게 4개의 견해로 나뉜다. 하나는 노예제사회의 초기단계라는 설, 둘째는 원시사회의 말기단계라는 설, 셋째는 봉건사회의 초기단계라는 설, 넷째는 복합경제체제 즉 봉건사회의 정치, 경제적인 요소가 야랑국에 큰 영향을 주어 당시의 사회상태를 점진적으로 변경시서 일종의 과도적인 단계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넷째, 야랑국은 얼마나 오래 존속하였는가.
야랑국이 존재한 시간에 대하여도 학계에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야랑국이 멸망한 사건은 사서에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보편적인 견해는 야랑국이 300년가량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랑국이 언제 건국되었는지, 상한은 언제인지에 대하여는 전혀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 않다. 야랑국에 대한 남아있는 기록이 워낙 부실하다보니, 이점에 대하여도 의견이 여러가지로 나뉘고 있는 것이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부소장인 백운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네가지 수수께끼는 실제로 모든 야랑국에 대한 수수께끼가 모여져 있다. 역사연구는 단지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고, 절대 복원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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