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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염철회의(鹽鐵會議)

by 중은우시 2007. 1. 10.

염철회의시의 조정의 권력관계

 

한무제가 후원2년(기원전87년)에 사망하면서 어린 아들 불릉(弗陵)을 한소제(漢昭帝)에 앉혔다. 이 때 한소제는 겨우 8살이었으므로, 한무제는 유조(遺詔)로 곽광(霍光), 상홍양(桑弘羊), 김일제(金日제), 상관걸(上官桀), 전천추(田千秋)의 다섯 명을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임명하여 어린 한소제를 보필하게 하였다.

 

곽광은 표기장군 곽거병의 이복동생이다. 그는 십여세때부터 궁궐에 드나들었으며 한무제의 신임을 받았다. 한무제는 자신이 나이가 많고, 태자가 나이가 어린 것으로 인하여 자신이 죽은 후 아들을 도와줄 신하를 물색했고, 먼저 곽광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주공(周公)이 성왕을 업고 있는 그림을 그리게 한 후, 곽광을 불러, 주공이 되어 태자를 보필해달라고 부탁했다. 곽광은 김일제를 추천했다.

 

김일제는 원래 흉노족의 휴도왕의 태자였고, 곽거병이 흉노와 싸울 때, 휴도왕이 피살되고 김일제는 모친, 동생과 함께 포로가 되었으며 장안으로 보내어져 황제를 위하여 말을 길렀는데, 한무제가 그를 높이 평가하여 부마도위로 삼았다. 곽광이 그에게 주공의 역할을 하라고 추천받자, 자신은 흉노족이라는 이유로 사양하며 곽광의 조수 역할을 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곽광은 고명대신중에서 가장 주요한 의사결정자가 된다.

 

전천추는 당시 승상이었는데, 나이가 이미 많았고, 그다지 능력은 없었다. 상소문을 올린 것이 한무제의 눈에 띄어 한고조의 침묘의 고침랑에서 일거에 승상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승상이 된 후에 모든 일에 조심하였고, 곽광이 하는 일에 대하여 전혀 반대하지 않고 따랐다. 그는 곽광의 대변인에 다름이 없었다.

 

상관걸은 원래 황가의 말을 기르던 미앙사령이었다. 한번은 한무제가 병이든 다음에 말을 보러 왔는데, 말들이 마른 것을 보고는 매우 화가 났다. 그러나, 이 때 상관걸은 황제께서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는 말을 기를 마음도 생기지 않아서 그랬다고 한무제에 대한 충심을 표시한다. 한무제는 그를 처벌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시중, 태복으로 승진시킨다. 한무제의 사후 좌장군이 된다.

 

상홍양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한무제를 위하여 국가재정을 수십년간 담당한다. 그는 염철에 대한 정부독점을 추진하고, 화폐제도를 개혁하는등 여러가지 재정에 관한 조치들(균수법, 평준법)을 취했었다.

 

이렇게 하여 한무제가 남긴 5명의 고명대신중에서 전천추는 나이가 많이 들어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김일제는 다음해에 사망하여, 실제로는 곽광, 상홍양, 상관걸의 세 사람이 남았다.

 

곽광은 대사마, 대장군이며 고명대신이었고, 한무제가 임종시에 명확히 그에게 주공의 역할을 하여 한소제를 보필하라고 하였으므로, 한소제의 즉위후에 모든 대권은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상관걸의 아들인 상관안은 곽광의 딸을 처로 삼았다. 그들은 원래 인척간이었다. 상관안에게 딸이 있는데, 한소제의 누이인 악읍공주와의 관계를 활용하여 궁으로 보내어 황후가 되게 하였다. 악읍공주는 정부인 정외인(丁外人)이 있었는데, 상관걸부자는 악읍공주에 감사하는 마음에 곽광에게 정외인을 제후로 봉해달라고 청하게 된다. 그러나, 정외인은 악읍공주의 정식 남편이 아니므로, 곽광이 응하지 않았다. 상관걸은 원래 한무제때 이미 관직이 태복에 달하여, 지위가 곽광보다 높았는데, 손녀가 황후까지 되고, 부자가 모두 장군에 오르자, 곽광의 정권독점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상홍양도 자기의 자격이나 공로는 모두 곽광보다 위였지만, 곽광이 대권을 장악한데 대하여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아들을 위하여 관직을 요청했지만, 곽광이 거절했다. 그래서 곽광을 더욱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3명의 실력자들은 양파로 나뉘게 되며 상홍양과 상관걸이 연합하여 곽광의 권력독점에 대항하는 구도가 되었다.

 

염철회의의 개최

 

두연년은 두주의 아들인데, 곽광의 심복이었다. 한소제 시원6년(기원전81년), 그는 곽광에 이렇게 건의한다. "현재 상황이 좋지 않다. 일부 농민은 타향에 유랑하고 있다. 효문제때의 정국을 회복하여, 절약근검을 제창하고, 관용과 화합을 이루어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 곽광은 그의 건의에 동의하여, 각 군국으로 하여금 현량과 문학 60여명을 추천하게 한 후, 수도로 모아서 회의를 개최하며, 민간에 어떤 고통이 있고, 국가는 어떤 대책을 취하여야 하는지 문제를 토론하게 하였다.

 

현량(賢良)은 이미 명성을 얻은 유생이다. 문학(文學)은 어떤 학문에서 일정한 성취를 얻는 명사이다. 그들은 모두 국가의 관리가 아니고, 민간의 유명인사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60여명의 현량, 문학중에서 이름을 남긴 자는 무릉(茂陵)의 당생(唐生), 노국(魯國)의 만생(萬生), 여남(汝南)의 주자백(朱子伯), 중산(中山)의 유자옹(劉子雍), 구강(九江)의 축생(祝生)등이다.

 

승상 전천추는 이번 회의의 주재자였다. 그는 발언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그저 쌍방이 격렬하게 변론할 때, 절충하고 조정하는 말을 했다. 정부측면에서의 주요발언자는 어사대부 상홍양이었다. 그는 모두 114번 발언한다. 회의에 참가한 자는 이외에 승상부의 소속관리인 승상사와 어사대부에 소속한 관리인 어사들이 있다. 그들은 전천추와 상홍양의 조수로 참가한 것이다. 그러나 회의상에서 어사의 발언은 19번, 승상사의 발언도 15번이 있다.

 

이번 회의는 두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전단계는 정식토론회이다. 회의가 끝난 후, 현량과 문학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승상과 어사대부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갔는데, 정식토론회때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면서 다 하지 못한 말이 있어서, 작별인사하는 자리에서 다시 변론을 진행하였다. 이것은 비정식토론회라고 볼 수 있다.

 

이번 회의에서 토론된 문제는 아주 범위가 넓었다. 정치문제로서는 형벌을 중하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덕교(德敎)를 중시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있고, 군사문제로서는 흉노를 공격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이 좋은지의 문제가 있다. 더 많이 토론된 것은 한무제가 시행한 염철, 균수, 주곽, 화폐제도, 산민고민(算緡告緡)등의 일련의 재정경제정책이었다. 한선제때 여남사람인 환관(桓寬)은 당시의 회의기록에 근거하여 <<염철론(鹽鐵論)>>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번 회의를 일반적으로 염철회의라고 부른다.

 

이번 회의에서 상홍양을 대표로 하는 정부측이 한 편이고, 현량문학을 대표로 하는 민간측이 한 편이다. 서로 변론을 아주 격렬하게 벌였는데, 실제로는 한무제시기에 시행된 각종 정책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였다. 상용양은 한무제의 각종 정책을 옹호하였고, 이런 정책이 계속 진행되기를 바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현량문학은 한무제의 각종정책을 반대하였고, 전면적으로 평가하고 수정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곽광은 회의에 출석하지 않았으나, 이번 회의를 매우 중시했다. 그는 상홍양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명확했다. 이것은 그가 집권한 후 시행한 정책을 보면 한무제의 윤태조(輪台詔)이후의 정책에 따른 것을 알 수 있고, 상홍양의 의견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그러나, 곽광이 현량문학의 의견과 같이 한무제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수정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현량문학의 주장처럼 염철, 균수등 관영사업을 전면적으로 폐지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저 군국의 주곽과 관내철관을 없애는 정도로 하였다. 그는 현량문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흉노에 대하여 감화정책을 쓰고, 방어와 저항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변방의 경계를 강화했다. 그러나, 곽광은 이번 회의를 통하여, 현량문학의 급진적인 정서를 활용하여, 자기의 정치적 적수를 비난하고 타격을 가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래서, 이번 회의는 정치적으로 말하면, 곽광에게 유리하고 상홍양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회의에 참가한 현량문학들에게는 대부등의 관작을 부여한 것만을 보아도 곽광이 그들을 우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논쟁사항

 

염철회의에서 주로 토론된 사항은 세가지이다.

 

첫째, 염철등 관영정책에 대한 득실문제

 

현량문학은 이런 관영정책에 반대했다. 그들은, 국가는 농민에게는 농업생산에 종사하게 장려하여야지, 농업을 버리고 공상업활동에 종사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국가가 염철, 주곽, 균수를 관영으로 하는 것은 이런 이익나는 사업을 자기의 수중에 장악하겠다는 것이며, 대량의 인력과 물자를 공상업에 종사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다(與民爭利). 이렇게 되면 사회의 순박한 기풍이 무너진다. 그리고 평준, 균수법은 농민에게 자기가 생산한 물건을 싸게 팔고, 다시 고가로 자기가 생산하지 않은 물건을 사서 국가에 바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농민의 부담이 증가되고 관청은 언제든지 화물을 매입할 수 있어, 물가상승이 조성되며, 이것은 상인들이 매점매석을 하는데 유리하고 생성의 생활에 불리하다. 염철을 관영으로 한 후 생산농구는 대부분 사용되ㅣ 못하고, 품ㅈㄹ이 떨어지고, 가격은 높아, 농민들이 사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무도구로 농사를 짓고 손으로 풀을 뽑으며 어떤 때에는 염철을 사려면 먼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관리들은 자주 강제로 사게 만들어 농민들이 아주 불편해 한다.

 

상홍양은 염철등 관영사업에 대하여 일부 지방관리가 국가규정에 따라 집행하지 않아서 일부 폐해가 있는 것은 알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현량문학들이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관영사업은 국가에게 있어서 이익이 많고 폐해가 적으며, 좋은 관리를 선발하여 폐해를 없애야 하며 계속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흉노에 대항하기 위하여는 변방을 공고히 하여야 하고, 재민을 구제하여야 하는데, 이는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만일 이런 관영사업을 벌여서 국가수입을 증가시키지 않는다면, 결국 농민의 세금부담이 늘어날 뿐이고, 더욱 농민의 부담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국가가 경영하지 않으면, 호족세력들이 이런 공상업을 독점하게 될 것인데, 그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낼 뿐아니라 지방할거세력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통일에도 불리하다.

 

둘째, 흉노의 화전정책문제

 

현량문학은 흉노에 무력을 쓰는데 반대하였고, 화친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흉노는 멀리 막북에 있으며 그들의 교란행위에 대하여는 주로 덕화(德化)하여야 하고, 그들에게 재물을 좀 더 주고, 그들과 화친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보았고, 무력을 사용하여 해결하는데 반대하였다. 무력으로 항거하면 쌍방이 모두 사상자가 발생하며, 국가의 대량의 인력과 물자가 대외전쟁에 사용되어야 하므로, 장병의 희생뿐아니라, 백성의 부담을 증가시키고, 국가에는 좋은 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무제가 흉노에 대하여 여러차례 대규모 전쟁을 진행한 것이 모두 몇명의 일벌이기 좋아하는 신하들이 고의로 적정을 과장하고, 한무제를 속여서 전쟁의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하였다. 이번 전쟁으로도 흉노를 약화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서한의 국력만 약화시켰으므로 이들의 책임을 추궁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상홍양은 현량문학의 주장을 단연코 반대하였다. 그는 서한은 흉노와 평화롭게 지내고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흉노가 아침저녁으로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이며, 여러차례 화친을 파괴하고, 변경을 침입하여 교란시켰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한무제는 어쩔 수 없이 흉노에 반격하는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며, 비록 전쟁에서 일부 장병이 희생되었고, 대량의 재물이 소모되었지만, 여러차례 흉노의 대군을 격파하여 일부분은 투항하였고, 일부분은 북으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국가의 변경은 안녕을 되찾았다. 한무제가 흉노에 반격하여 취득한 공헌은 매우 크고, 앞으로 그 명성은 천년을 이어질 것이다. 어떻게 이를 일컬어 득불상실(得不償失,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많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셋째, 덕치와 법치의 문제

 

현량문학은 모두 유가의 신도들이다. 그들은 인정(仁政), 덕치(德治)를 주장했다. 엄격한 형벌과 백성을 임의로 해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들은 한무제때의 법률은 너무 번잡해서, 관리들이 임의로 남용할 수 있어 백성들 중에 범법자가 많아졌다. 그러나 백성들은 자신이 무슨 법을 위반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한무제는 혹리(酷吏, 잔혹한 관리)들, 두주(杜周), 장탕(張湯), 왕온서(王溫舒)등을 임용하여, 법률도 무시하고 임의로 무고한 백성들을 해하였다. 수시로 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고, 일족을 멸하였으니, 인심이 흉흉하고, 불안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그들은 경고하여 말하기를, 이렇게 계속한다면, 진나라가 멸망한 전철을 되밟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상홍양은 반대의견이었다. 그는 치민의 도리는 교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치를 집행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법치로 백성을 교화하고,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 해야할 지를 알도로 하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를 알고록 하여야 한다. 엄격한 법집행만이 백성들이 법이 무서운 줄을 알아, 법을 위반하지 않게 하여, ㅅ회질서가 안정된다. 만일 법망이 느슨하면, 간악한 백성들이 빈틈을 뚫고 들어와 사회의 불안정을 일으키게 된다. 그는 또한 현량문학들이 혹리에 대하여 지적하는 것에 대하여 그들의 치적에 대하여는 긍정적인 점이 많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는 혹리들도 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였고, 범법자에 대하여 뇌성벽력과 같이 엄하게 처벌하고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으며, 그들이 다스리는 지방에서 도적을 막고 간악한 짓을 못하게 하는 좋은 정치적인 치적을 거두었었다고 보았다.

 

상홍양과 현량문학들이 논쟁한 세가지 주제에 대하여 보면, 현량문학들은 한무제의 일련의 정책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이었다. 비록 한무제가 만년에 공포한 윤태조에서 정책정으로 이미 큰 변화가 있었지만, 윤태조이후의 변화된 상황을 가지고 그 이전의 조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의견은 상홍양이 받아들일 수 없을 뿐아니라, 곽광을 포함한 한무제의 중신들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상홍양이 일어나 전면적으로 현량문학들의 의견을 반박한 것은 한무제의 일련의 정책의 정확성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량문학들은 모두 기층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농민의 고통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한무제시기의 일벌이기 좋아하는 정책으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끼친 해악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들의 의견에는 일반민중의 목소리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한무제가 윤태조를 내린 이유이기도 하다. 상홍양에게 있어서 그는 한무제의 신변에 있었으며, 한무제의 재정경제정책을 직접 의사결정하고 집행한 사람이다. 그는 이런 정책이 국가에 얼마나 유익한 것이었는지를 몸으로 느낀 사람이다. 그러나, 인민에게 가한 해악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한무제가 윤태조를 반포한 이후, 여전히 과거정책이 사회에서 불러일으킨 모순을 인식하지 못했고, 일관되게 한무제의 과거방침을 따라가고자 했다. 이것은 사상이 현실에 낙후된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염철회의에서 자주 현량문학들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할 말이 없어지는 상태가 벌어진 것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상홍양의 이미지는 염철회의상에서 마치 하나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쉰 목소리로 있는 힘을 다해 소리지르는 늙은이와 같다. 그의 목소리에는 비록 적지 않은 진리가 담겨 있지만, 그러나 앞서가는 발걸음에 묻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