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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누란왕국(樓蘭王國)의 멸망원인

by 중은우시 2006. 12. 10.

 

 

누란왕국은 실크로드지역에 존재했던 옛 나라이다. 누란왕국에 대한 최후의 기록은 한문목간에 기재된 건흥18년 즉 기원330년때이다. 목간에 기재하고 있는 것은 누란왕국의 국왕인 벌색마나(伐色摩那)에 관한 내용이고, 그는 321년부터 334년까지 국왕의 자리에 있었다. 누란문명이 몰락한 것은 아마도 이때 쯤일 것이다. 기원전2세기부터 역사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 누란은 4세기에 들어서 사라지고 말았다. 누란왕국이 멸망한 이유에 대하여는 학자들이 여러가지로 추측하고 있다.

 

첫째, "외족침입설"

 

누란왕국은 외족의 침입을 받아, 누란왕국은 연이은 전쟁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떠나버려 원래 취약했던 오아시스는 관리가 소홀해지졌다는 것이다. 또한, 오랜 전쟁으로 오아시스의 자원을 과도하게 이용하고, 수목을 심는데 게을리 하여 균형을 잃어버림에 따라 사막화가 진행되었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누란왕국은 흉노족의 침입을 받았고, 한나라에서는 누란에 대하여 남쪽으로 이주하라고 제안하여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누란족들은 이동하면서 서로 흩어지고 결국은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누란왕국의 새 왕인 위도기는 누란왕국에 수백년간 계속하여 침입을 받아온 이유가 누란왕국의 지리적인 위치때문이라고 보고, 누란고성을 버리고 남으로 이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만으로는 다 해석이 안되는 점이 있다. 누란왕국이 남으로 이전했다면, 침입자는 왜 누란과 같은 전략적 요새를 활용하지 않았을까? 왜 이 곳에서 살지 않았을까? 전쟁이 도시하나 마을 하나를 폐허로 만드는 것은 이해되지만, 나라 하나를 모두 없애버리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이 설만으로는 누란왕국의 수수께끼를 풀기 힘들 듯하다.

 

둘째, "하류와 실크로드 변경설"

 

이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타리무하(塔里木河)가 하류를 바꾸어서 남쪽으로 흘러 타이터마(台特馬)호수로 흘러들어가게 됨에 따라, 공작하(孔雀河)만이 나포박(羅布泊)으로 흘러들어, 수량이 많이 줄었고, 이로 인하여 나포박이 점차 축소 되었으며 결국은 말라버렸다는 것이다. 2002년 전국위성탐사고고회의에서 중국에서 처음으로 위성탐사결과를 분석하여 이 주장을 지지했다. 옛 공작하의 상류에서 두번에 걸친 산사태가 일어나서 물길을 막았고, 이로인하여 누란고성은 물이 끊어져 결국 버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실크로드의 길도 이에 맞추어 변경되어, 북쪽의 이오, 다하로 옮겨갔으며, 정치경제중심도 이전에 누란에 머물던 군대등이 북쪽으로 이전하였다는 것이다. 실크로드 통과역의 지위를 상실하고, 오아시스의 환경이 날로 악화됨에 따라 누란은 점차 황폐해지고 결국은 버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실크로드의 변경은 과거에 번성했던 도시가 쇠퇴하는 것까지는 이해되지만, 아예 도시자체가 멸망해버린 것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셋째, "자연환경변화설"

 

어떤 전문가는 노란왕국의 멸망은 강수량과 관계없고, 고산빙천(高山氷川)이 축소되면서, 하류의 수량이 감소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이 일대의 기후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지역의 환경이 악화되고, 토지사막화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누란고성의 유적지에서 얻은 한문간독을 보면, 누란의 병사들의 수량은 점차 축소되는 추세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점차 아껴 씀으로서 부족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양식부족의 주요한 원인은 환경악화, 생태균형상실, 수원부족이다. 출토된 문서에는 수량부족에 관한 이야기, 농사짓기 힘들다는 이야기, 물이 필요하다는 얘기, 물을 잘 관리해야한다는 얘기등이 나온다. 이런 것들은 모두 4세기경에 나포박지역의 자연환경이 오랫동안 악화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간시(干屍, 마른 시신)이 출토하는 것으로도 기후가 건조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기후악화설"

 

중국의 기상학자들은 여러차례의 현지고찰과 대량의 문헌사실을 살펴본 후에 기후악화설을 제안했따. 유명한 누란미녀(3800년전의 간시)에 대하여 해부연구를 할 때 사람들은 폐에 대량의 모래가 침전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당시에 기후가 이미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기후악화설은 현재 비교적 다수설을 점하고 있다. 이 설에 따르면, 3세기부터 6세기까지, 기후가 점차 습기있는 기후에서 건조한 기후로 바뀌었고, 강우량이 감소했고, 토지가 사막화되었다고 본다.

 

다섯째, "수원고갈설"

 

일부 과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동,식물종의 고고학적 발견에 근거하여 이렇게 추측한다. 2,3천년전의 나포박지구의 기후는 현재의 기후와 큰 차이는 없다. 그러므로, 누란고성의 멸망의 핵심원인은 하류로부터 오던 물이 점차 감소하고 이로 인하여 자연환경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건조한 사막지구의 하류와 호수는 아주 불안정하다. 침식과 퇴적의 교체작용으로 수계(水係)는 주기적으로 변화한다. 즉, "이동하는 호수", "움직이는 강물"이론이 나오는 것이다. 나포박은 염수호이다. 여러 담수에서 물이 흘러들어오면서, 사람이 생존할 수있는 기본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지역적인 지리환경의 변화로, 기후가 건조해지고, 강우량이 감소하였으며, 나중에 상류의 사람들이 수원을 막아, 농사를 짓고 축산등의 용도로 사용하게 되면서 용수가 고갈되었다. 이로 인해 누란인들은 대거 이전했고, 고성은 폐허가 되었다.

 

여섯째, "세계고문명의 공동비극설"

 

인류의 활동은 자연의 조화를 파괴한다.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창조할 때는 놀라울 속도로 사막화를 진행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 누란사람들은 대형 토목공사와 독특한 매장인 "태양묘"를 만드느라 많은 나무를 베어냈다. 이것은 생태계의 변화를 가져왔다. "태양묘"의 겉모습은 매우 특이하다. 묘혈을 가운데 두고 한층 한층 모두 7층의 안은 가늘고 바깥은 굵은 원목을 박는다. 나무담장은 안에서 바깥까지 가늘고 굵은 것이 매우 정치하다. 전체 모양이 태양과 같다고 하여 태양묘라 부른다. 고고학발견자료에 의하면 이미 발견된 7개의 태양묘중에 사용된 나무는 모두 1만개이다. 수량이 대단히 많은 편이다. 인류가 활동을 하면 할 수록 오아시스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나게 된다. 이로 인하여 하류의 수량이 변하고, 전체 지역환경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사람의 활동이 자연환경을 파괴하면, 원래 취약한 오아시스의 생태환경은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로써 문명은 의지할 환경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인데, 어떤 학자는 이것이 세계고문명의 공통된 비극이라고 본다.

 

 

 

일곱째, "질병과 생물설"

 

발굴된 누란문화재중에서 이런 규정이 있다. "나무 한 그루를 벤 자는 말 1필을 벌로 내야 한다" "작은 나무 1그루를 벤 자는 소 1마리를 내야 한다" "나무 싹을 없앤자는 양 2마리를 내야 한다" 이것을 볼 때 당시 사람들이 나무를 보호하려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사람들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매우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일 돌연한 재난이나 사회적인 위기가 아니었다면, 누란왕국의 사람들은 자연을 보호하면서 계속 생활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누란인에게 가한 최후의 타격은 바로 전염병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생물에 의하여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개의 하류에서 들어온 곤충에 대하여 누란에는 천적이 없었으므로 악성번식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소멸시킬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비록 부근에서 군장갱을 발견한 바 있고, 안에는 남녀노소의 사체가 벽돌처럼 차례차례 쌓여져 있기는 하지만, 이 설은 아직 고고학계의 확인을 받지는 못했다.

 

여덟째, "정치, 경제 및 자연조건변화의 종합적인 이유설"

 

전세계의 역사를 보면, 전쟁의 원인은 자원의 경쟁이나 약탈로 인한 것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주면의 많은 하류는 간헐적인 자연하류이다. 사막지구에서 수자원은 고귀한 생명선이며, 이로 인하여 충돌이 발생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자연하류는 아주 쉽게 길을 바꾼다. 자연적인 이유로 인한 하류변경외에, 사람들이 하류를 바꾸기도 매우 쉽다. 하류의 근원지에 새로운 물길을 내는데에는 반나절도 필요하지 않다. 정치와 사회의 변화는 누란이 버려진 원인이다. 376년경, 누란성은 먼저 정치적으로 역할을 완전히 상실했다. 동시에 교통요지의 위치도 상실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상업이 무너지고, 인구가 격감하며, 농업이 중단되고, 누란성의 생존기초가 동요하였따. 충분한 노동력을 구비하지 못했으므로, 생태균형은 많이 파괴되었고, 매년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누란지역은 점차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을 잃어간 것이다.

 

중국과 외국의 학자들의 누란멸망에 대한 이런 의견들은 서로 완전히 모순되지는 않는다. 최소한 누란이 물이 말라서 멸망했다는 점은 대체로 일치한다. 다만 그 근거를 제시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종합적으로 이런 견해를 살펴보면, 오아시스의 사막화와 고문명의 멸망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만 인과관계의 인식에 있어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