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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중국의 의술명가 : 서씨가족

by 중은우시 2006. 10. 21.

삼국, 동진, 서진, 남북조시대에 정부에서도 의학교육을 하였으나, 세습되는 의술가문도 여전히 존재했다. 그 중에 서씨가족은 7대에 걸쳐 12명의 명의를 배출하였다. 그 중 서도도, 서문백, 서성백, 서지재, 서지범은 모두 궁정에 들어갔고, 어떤 사람은 태의서에서 일을 했으며, 어떤 사람은 고위관직을 받기도 하였다.  


서씨가족의 기업을 창업한 사람은 서희(徐熙)였다. 일찌기 남조의 송나라의 복양태수를 지냈다. 나중에 진망산에 숨어들어가서 은사가 되었는데, 하루는 도인을 만났다. 도인은 그에게 호로병을 하나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의 자손은 도술로 사람을 구할 것이고 부귀를 누릴 것이다" 서희는 호로병을 열었고, 안에는 <편작경경>이 한 권 들어 있었다. 그는 이 책을 깊이 연구하였고, 얼마되지 않아 의술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서희의 아들인 서추부(徐秋夫)는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역시 유명한 의원이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귀신의 병도 치료하였다고 한다. 서추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서도도와 서숙향이고 둘 다 의술이 뛰어났다. 


서도도(徐道度)는 내과 외과에 모두 뛰어났다. 그는 다리에 약간의 병이 있어서 일어나고 걷는데 불편하였다. 송문제는 그에게 황자의 병을 보도록 시키고, 그로 하여금 가마를 타고 궁에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서도도가 치료한 병들은 서도도의 손이 닿으면 모두 낳았다. 송문제는 감탄해서 말했다. "천하에 오절(五絶)이 있는데, 모두가 전당(錢塘)일대에서 나오는구나" 여기서 오절이라는 것은 당시에 금(琴)을 잘 타던 두도국(杜道鞠), 시를 잘 짓던 범열(范悅), 글에 뛰어났던 저흔원(楮欣遠), 바둑을 잘 두던 저윤(楮胤), 그리고 의술에 뛰어났던 서도도를 합쳐서 부른 말이다. 서도도는 <<요각약잡방>>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것은 세계 최초의 각기병을 치료하는 전문서적이다.


 


서숙향(徐叔響)은 침구, 소아과, 본초학등에 연구가 깊었고, 저술도 많이 했다. 


서씨가족은 4대에 이르러 서도도의 아들 서문백(徐文伯), 서숙향의 아들 서사백(徐嗣伯), 서성백(徐成伯)의 세 사람이 의술로 명성이 높았고, 아주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이로써 서씨가족의 명성은 최고봉에 이르게 된다. 서문백은 황제의 곁에서 어의를 지냈다. 그리고는 많은 병을 치료하였다. 송효무제때 태후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참기 힘들게 되었는데, 다른 어의들은 속수무책이어서 서문백을 불러왔다. 서문백은 진맥한 후에 "태후의 병은 분명히 "석박소장(石搏小腸)"입니다"라고 하였다. 요즘말로 하면 담결석, 비뇨계통의 질병이다. 이후 서문백은 소석탕을 이용하여 치료하였고, 태후는 금방 결석을 배출했고, 배는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다. 태후는 이로 인하여 서문백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송명제때는 한 궁녀가 요통을 앓았는데, 아플 때는 심장에까지 미쳤다. 병증이 한번 발작하면 기절할 지격에 이르렀다. 다른 의원들은 "육(肉)"으로 진단했으며 아마도 궁녀의 뱃속에 이물이 들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문백은 "발(發)"이라고 진단하고 두발로 인하여 일어난 병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기름을 사용하여 토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궁녀는 진짜 머리카락같은 물체를 토하게 되는게 길이가 3척이나 되었다. 토한 후에는 병이 완전히 낳았다. 또 한번은 송의 후폐제가 궁을 나가서 한 부인이 임신한 것을 보았다. 황제도 진맥을 할 줄 알아서, 진맥을 하고 난 다음에 "이 배에는 여자아이가 들었도다"라고 하면서 서문백에게 진맥하라고 하였다. 서문백은 "뱃속에는 두 명이 있습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입니다. 남자아이는 왼쪽에 있고 푸르고 검으며, 여자아이보다 약간 적습니다" 황제는 마음이 급해서 임산부의 배를 갈라보려고 했다. 서문백은 측은하게 생각하여 말하기를 "만일 칼을 쓰게 된다면 변고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침으로 조산을 시키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고는 족태음경과 수양명경의 두 곳에 침을 놓았다. 태아가 침을 놓자 나왔다. 두 아이가 이어서 나왔는데, 과연 그가 말한 바와 같았다.  


서숙향의 아들인 서성백(徐成伯)은 황제의 중용을 받았다. 북위의 헌문제는 그가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는 병자들을 장막 뒤에 있으라고 하고는 서성백에게 병자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서성백으로 하여금 장막을 사이에 두고 병자들을 진맥하라고 시켰다. 서성백은 진맥을 한 후에, 명확하게 병자들의 증세를 알아냈고, 병자의 얼굴색과 병의 증상도 아주 정확하게 묘사했다. 헌문제는 그의 의술에 크게 찬탄하고 그에게 관직과 작위를 주었으며, 자신의 곁에 있도록 하였다. 나중에 효문제가 외부에 순행갈 때, 갑자기 중병에 걸렸었다. 서성백은 밤낮을 달려가서 효문제의 곁으로 갔고,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여 효문제의 병이 낫게 하였다. 이후부터 효문제는 잔치를 베풀때면 항상 서성백의 자리를 상석으로 준비해주곤 하였다. 그리고 문무백관에게 서성백이 뛰어난 의술로 자신을 구했던 것을 자랑하곤 하였다. 서성백은 양생에도 뛰어나서, 장생단약을 만드는게 열중했고, 숭산에 1년간 은거한 적도 있었다. 이 때 황제에게 연년익수의 금단을 만들어 바쳤다. 그 자신도 자주 양생약을 먹었으며 80이 되어도 머리카락이 검었고, 정력도 충만했다고 한다.


 서숙향의 또다른 아들인 서사백(徐嗣伯)도 난치병을 치료하는데 고수였다. 남제(南齊)의 한 장군이 추위를 두려워하는 병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연단이 유행하여 이 대장군도 오석산을 먹었었다. 오석산(五石散)은 자석영, 적석지, 종유석, 백석영, 유황등의 다섯 가지 석약으로 만든 단약이었다. 이것으로 자기의 한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석산을 먹고나서는 추위를 더욱 무서워하게 되었다. 서사백은 아주 독특한 치료법을 사용했다. 눈이오는 추운 날에, 대장군으로 하여금 발가벗은 몸으로 차가운 돌맹에위에 앉게 하고는 사람을 시켜 한통의 찬물을 대장군의 머리에 부었다. 이 냉수가 대장군의 몸에 부어지자 차가움에 뼈골이 시렸고, 대장군은 그대로 기절하였다. 옆에 있던 가족들이 도저히 더 볼 수가 없어서 서사백에게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서사백은 만일 대장군의 병을 낫게 하고 싶다면 가족들은 관여하지 말라, 내 스스로 언제 멈춰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한다.  백여통의 냉수를 부은 후에, 대장군이 움직일 수 있게 되고, 등에는 열기가 나왔다. 다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대장군은 앉아서 찬물을 마시고 싶어했다. 이렇게 대장군의 항증은 서사백의 보기드문 치료방법으로 완전히 낫게 되었다.


 서씨집안의 제5대에는 서문백의 아들인 서웅(徐雄)과 서성백의 아들인 서천(徐踐)이 가업을 이었다. 두 사람도 유명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부친에 비하여는 손색이 있었다.


 서씨집안의 제6대에는 서지재(徐之才)와 서지범(徐之範)이 나와서 서씨집안에 또 한번의 휘황한 시절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서웅의 아들이다. 서지재는 5살때 효경을 읽고 13살때 태학생이 되면서 '신동'으로 이름을 떨친다. 처음에는 남제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나중에 북위의 포로로 잡히면서 북위, 북제에서 벼슬을 한다. 일찌기 대장군, 상서, 좌복야, 상서령등의 관직을 지내고 서양군왕에 봉해진다.  서지재는 의술도 뛰어났다. 특히 약재학과 산부인과에 조예가 깊었고, 일찌기 <<뇌공약대>>, <<약대>>를 저술한다. 약을 선, 통, 보, 사, 섭, 활, 조, 습, 경, 중의 10제로 구분하였다. 그는 <<가전비바>>, <<소아방>., <<명원가록>>등의 책을 지었다고 하는데, 전해지지는 않는다.  서지범은 북제의 상약전 어의로 관직이 태상경에 이르렀다.

 

서씨집안의 제7대에는 비교적 이름있는 자로는 서지범의 아들인 서민재(徐敏齋)가 있다. 그는 박학다식했고, 아주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서씨집안의 의술이 점점 몰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