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한 시대를 풍미한 경국지색의 여인은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소황후처럼 여러 황조를 거치면서, 계속 황제의 곁을 지켰던 여인은 드물다. 그녀는 13살 때 진왕비(晉王妃)가 된 이후에 계속하여 신분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수양제(隋煬帝)의 황후, 우문화급(宇文化及)의 숙비(淑妃), 두건덕(竇建德)의 총첩, 양대에 걸쳐 돌궐왕의 왕비, 마지막에는 당태종 이세민의 소용(昭容)에 이른다.
소씨는 남북조시대의 남조 양명제(梁明帝)의 황녀로 태어난다. 천보20년 2월 19일 묘시에 후량의 수도인 강릉에서 태어난다. 당시의 유명한 점술가인 원천강(袁天綱)은 일찌기 그녀의 용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자세히 그녀의 생신팔자를 추산해본 후 최후로 얻은 결론은 "모의천하, 명대도화(母儀天下, 命帶桃花, 황후가 되고, 도화운이 있다)"라는 것이었다.
소씨는 만구세때 수나라 궁중에 입궐한다. 궁중에서 글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쟁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배운다.
개황13년에 수문제와 독고황후는 상의한 후 아들 양광(楊廣)과 소씨를 결혼시키기로 한다. 양광의 나이 25세였고, 소씨의 나이 겨우 만13세때였다. 현재의 관습으로 본다면 13세의 신부는 너무 어린 것이지만, 당시에는 13,4세때 결혼하는 것이 매우 보편적이었다.
양광은 꽃처럼 예쁜 소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자 매우 아끼며 서로 사랑한다. 그리고 원천강이 일찌기 몰래 양광에게 "소씨의 명에는 황후가 되어 천하의 어머니가 될 상"이라고 해주었기 때문에 황제에 대한 꿈을 꾸게 된다. 양광은 소씨녀가 황후가 된다면 자기는 분명히 천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광은 야망이 컸고, 당시에는 태자가 아니었지만,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되려면 먼저 태자가 되어야 했다. 소씨가 있었기에 이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양광은 큰형인 양용으로부터 태자의 지위를 빼앗아오기 위한 계획에 착수한다. 양광은 태자였지만, 본부인을 냉대하고 첩을 아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하여 모친인 독고황후는 매우 못마땅해 한다. 독고황후는 일부일처제를 완고하게 주장했고, 남편인 수문제는 이로 인하여 다른 여인을 후궁으로 앉히지 못했었다. 양광은 매우 총명하여 고의로 모친인 독고황후앞에서 소씨만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총명한 소씨도 양광과 박자를 맞추어 주었다. 이들 부부의 7년에 걸친 노력으로 결국 독고황후의 결심을 얻어내어, 양용을 태자의 지위에서 폐출시키고, 양광을 태자의 지위로 올렸다.
양광이 태자가 된 후 1년후에, 무서운 독고황후가 병으로 사망했다. 독고황후는 1부1처제를 고집하는 여인이었고, 그녀를 무서워한 수문제는 평생 첩을 두지 못했었다. 그녀가 죽자 구속을 받지 않게 된 수문제는 주색에 탐닉하기 시작했고, 조정에 무관심했다. 조정대권은 태자인 양광에게 모두 위임했다. 사실상 인수2년이훙는 태자양광이 황제의 권력을 장악했고, 황제의 권력을 행사했다.
수문제 양경은 나이가 들어, 병으로 자리에 눞는다. 양광은 기회를 잡아 부친의 총비인 미모의 선화부인(宣華夫人)에게 수작을 걸고, 양광은 이를 듣자 슬퍼하면서 "짐승에게 대사를 의탁하였구나 독고부인이 나를 잘못돼게 하였다"고 탄식하였다. 수문제는 양광을 폐태자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양광에 의하여 독살당하게 된다. 오래지 않아 양광이 즉위하니 역사상 가장 황음무도하기로 이름난 수양제이다. 10여년의 짧은 기간동안 양광은 부친 양견이 쌓아놓은 수제국의 기반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게 된다.
소씨는 양광을 따라 자연스럽게 황후가 된다. 이것으로써 원천강이 말했던 예언은 들어맞았다. 이 때 양광은36세였다. 소황후는 겨우 24세였다. 수양제는 오랫동안 노려왔던 황제의 지위를 얻게 되자,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속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호색의 원래의 면모를 철저하게 나타내게 된다.
강남의 풍경을 즐기기 위하여 수양제는 소주항주까지 이어지는 대운하의 건설을 지시하고, 그 후에 소황후와 많은 미녀를 데리고 강도를 여행한다. 수양제가 강남으로 갈 때 운하에 이러지는 배가 200여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기병디 연안에서 호위하고, 용선에서 노를 젓는 것은 모두 젊은 궁녀였다. 궁녀들의 화장분으로 운하를 채워, 향기가 수개월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치는 많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것이었고, 백성들의 원한이 곳곳에서 들렸다. 이로 인하여 대업12년 가을에 수양제가 소황후를 데리고 세번째 강도유람을 준비할 때, 여러 대신들은 모두 간언해서 "만일 다시 마음대로 유락을 즐긴다면 천하에 변고가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수양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인생에 자고로 누가 죽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영화를 마음껏 누리기만 한다면 나라가 망하든 백성들이 굶어죽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수양제는 천하의 미녀를 모으도록 하고, 삼천명의 여자들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하였다. 수양제는 마음대로 골라서 잠이 들었으니, 매일 신랑이 되는 것과 같았다. 밤마다 동방화촉을 밝히니, 군국대사는 전부 머리속에 없었다. 소황후는 이에 대하여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없어 <<술지부>>라는 글을 하나 지어 완곡하게 수양제에게 절제하고 몸을 생각하며 국정을 신경쓸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소황후도 현명했다.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고무상의 황제이므로 제약할래야 제약할 수 없었다. 그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것이 자기의 목숨을 유지하는 길이었다. 소황후가 이렇게 참았으므로 수양제는 그녀에 대하여는 매우 존경했고, 스스로 향락을 즐기면서도 소황후를 잊지는 않았다. 수양제는 풍류황제였고, 소황후는 적막하게 세월을 보냈다. 이 때 소황후의 나이 겨우 30세였다. 비록 영화부귀를 누리고 있었으나, 그녀의 마음은 비어 있었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해산전의 호위교위인 우문화급의 젊고 잘생기고, 당당한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점점 그녀의 적막한 마음을 뒤흔들었고, 그녀는 스서럼없이 그에게 추파를 보내고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우문화급은 사실 일찌기 이 아름답고 고독한 황후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고귀한 신분으로 인하여 경거망동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저녁, 궁녀들이 모두 쉬고 있을 때, 마음이 갑갑하여 잠이 들지 못하던 소황후는 대청으로 걸아나왔다가 바로 당직을 서고 있던 우문화급은 만났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면서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이 두 사람의 마음은 통했고, 이후 그들은 자주 밀회를 가졌다.
좋은 세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천하가 대란에 빠졌다. 태원유수인 이연(당고조)이 병사를 일으켜 장안을 공격해왔다. 우문화급과 그의 형인 우문지급은 양주에서 병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병사를 이끌고 이궁으로 들어가 수양제를 침전에서 교살하였다. 그 때 수양제의 나이 50세때였다. 이러한 황당한 수양제의 비참한 최후였다.
이 때 우문화급은 이미 우둔위장군으로 승진해 있었다. 오랫동안 단독으로 소황후와 함께 하지 못하였다. 그는 신속히 수양제를 죽였는데, 이것은 하루빨리 소황후와 함께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소황후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병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자기 남편을 죽인 자가 바로 자기의 옛날 정인이었을 줄은. 그녀는 우문화급이 배은망덕한 것을 원망하며, 수양제를 황제의 예로 장례지내줄 것을 요청한다. 우문화급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고, 일체의 장례를 마친 후, 소황후는 우문화급의 첩이 된다.
우문화급은 소황후를 얻은 후에는 정치적으로 확장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이 때 중원일대에서 병사를 일으킨 두건덕이 세력을 신속하게 늘여간다. 그의 병마는 계속 승리를 거두면서 강도를 핍박한다. 우문화급은 버티지를 못하고 계속 패퇴한다. 마지막으로 소황후를 데리고 위현으로 물러나서 지키게 된다. 급히 스스로 허제(許帝)에 등극하고, 소황후를 숙비에 봉한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위현은 함락된다. 그들은 급히 요성으로 도망친다. 두건덕의 군대는 계속 추격하여 마지막으로 요성을 함락시키며, 우문화급을 죽인다.
두건덕은 소황후를 포로로 잡는다. 소황후의 미색과 고귀한 기질과 온유한 모습은 두건덕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두건덕은 즉시 그녀를 첩으로 삼는다. 그도 소황후를 얻은 후, 중원을 정복하려던 처음의 마음은 잊어버리게 된다.
두건덕의 본처인 조씨의 질투는 매우 대단했고, 자주 그들을 난감하게 하였다. 그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있을 때 불쑥 나타나서 두건덕과 소황후의 좋은 일을 방해했다. 그러나 두건덕은 방법이 없었다.
이 때 북방의 돌궐족의 세력이 신속하게 커져간다. 중원을 노리게 된다. 원래 멀리 돌궐의 왕에게 시집갔던 수양제의 여동생인 의성공주는 이연이 이미 장안에서 황제를 칭한다는 말을 듣고, 또한 소황후의 행방을 수소문해서는 사자를 보내어 낙수에서 소황후를 맞이한다. 두건덕은 감히 돌궐인들과 정면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할수없이 소황후와 황족의 사람들을 사자에게 내놓게 된다.
전란으로 인하여 소황후는 한시도 편안하게 지내지 못하였다. 그녀의 남편과 정부는 모두 살해당하였고, 그녀는 밤마다 악몽을 꾸며, 자주 악몽으로 잠을 깼다. 그녀는 의욕도 잃고, 거의 계속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녀의 시누이가 그녀를 맞이했을 때, 그녀는 멀리 떠라고자 하였고, 멀리 몽고사막으로 간다. 그녀를 상심하게 했던 중원대지를 떠난 것이다. 그녀는 완전히 다른 황경하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는 돌궐사자를 따라 중원을 떠나 대막으로 향한다.
돌궐왕은 소황후를 보자 한눈에 빠져버린다. 그는 천하의 아름다움이 모두 이 여자의 몸 하나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소황후는 돌궐원의 비가 된다. 이제 생명도 그녀의 것이 아니고, 그녀의 운명은 그녀 스스로 어찌할 수 없었다. 그저 운명에 따를 뿐이었다.
나중에 돌궐왕이 죽자, 지리카한이 왕위를 잇는다. 돌궐의 풍속에 따라 노왕의 처첩인 의성공주와 소황후는 다시 신임 돌궐왕의 첩이 된다. 비록 소황후가 의성공주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새 돌궐왕은 소황후에 빠지게 된다.
10년후, 당태종 정관4년에 당나라는 대장군 이정을 보내어 돌궐을 무너뜨리고, 소황후를 데려간다.
이 때 소황후는 이미 48세의 나이였다. 당태종 이세민은 겨우 33세였다. 소황후가 들어오자, 이세민은 그녀에게서 조금도 나이든 느낌을 받지 못한다. 이세민은 한번에 그녀에 빠지게 된다. 재주가 뛰어나고 일세의 영웅인 이세민은 보통의 어린 여자보다 보다 성숙하고, 보다 깊이가 있는 소황후를 좋아하게 된다.
이세민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소황후를 소용에 봉한다. 이로써 소황후는 사디 대당천자 이세민의 애첩이 된다. 이세민은 수양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정치에 힘을 쏟는다. 그리고, 매우 검약하게 생활한다. 그러나, 소황후가 궁중에 왔을 때는 파격적으로 한번의 성대한 연회를 열어 그녀를 환영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다. 당태종은 이 연회가 매우 성대하다고 느껴 옆에 있던 소황후(소소용)에게 "그대는 이 장면이 수나라 궁전과 비교하여 어떻다고 느끼는가?"라고 묻는다.
사실, 이 정도는 수나라 궁전의 호화사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소황후는 그저 조용하게 "폐하는 나라를 열고 큰 일을 하는 군왕인데 어찌 망국의 군주와 비교하겠습니까"라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당태종은 깜짝 놀란다. 그리고는 즉시 그녀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낸다. 그는 소황후가 용모만 뛰어날 뿐아니라 이치에도 밝고 말솜씨도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로써 그는 그녀를 더욱 귀하게 여긴다.
소황후는 당나라 궁중에서 18년의 조용한 세월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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