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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동관(童貫) : 중국역사상 왕으로 책봉받은 유일한 환관

by 중은우시 2006. 4. 18.

동관(1054-1126)은 자는 도부이고 개봉사람이다. 북송의 환관이었다.

 

동관은 전설과도 같은 희극과 비극을 고루 갖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일생동안 몇가지 중국최고기록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중국역사상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불멸의 기록이 될 것이고,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 중국역사상 병권을 장악한 시간이 가장 긴 환관

- 중국역사상 군권을 가장 크게 장악하였던 환관

- 중국역사상 가장 높은 작위를 받았던 환관

-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국가를 대표하여 외국에 사신으로 나갔던 환관

-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왕으로 책봉된 환관

 

중국역사상 환관(내시)의 총수가 얼마인지에 대하여 정확한 통계를 계산해낸 사람은 없다. 대충 계산한다면, 적어도 100만이상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사람들은 3,4백만은 될 것으로 추산하는 사람도 있다. 극단적인 사람은 심지어 천만명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수백만중에서 위와 같은 불멸의 업적을 가진 인물이 나타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송휘종은 미술방면에 천재적인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그가 신임하고 좋아하는 신하들은 대부분 풍채가 뛰어났다. 휘종황제 본인도 고대인들이 묘사한 바에 따르면,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잎술은 주사와 같으며, 풍모는 임풍옥수(바람앞에 선 옥으로 만든 나무)와 같았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멍청했던 것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어보인다. 전해지는 여러가지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대신 채경은 미목이 준수하였고, 풍도가 우아했으며 미남자였다고 전해진다. 다른 인물 왕보의 경우에도 풍채가 뛰어났고, 금발에 황금색 눈을 가졌다고 한다.

 

동관은 약간 다른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키가 크고 웅대하였으며, 피골이 강철과 같이 강하였고,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며 얼굴이 검은 색이고, 구렛나룻이 자라서 한눈에 보기에도 양기가 가득차고 전혀 거세한 환관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동관이 거의 20세가 되어서 환관이 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동관은 사람이 도량이 있고, 재산을 아끼지 않았으며, 손이 크고 통이 컸다고 한다. 마치 <<수호전>>에 나오는 의리를 주장하는 양산박호한과 비슷했다는 것이다. 단지, 그가 내세우는 의리와 재물을 쓰는 것은 선택적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후궁비빈, 환관, 궁녀, 황실에 접근할 수 있는 도사, 천자의 측근신하등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항상 그의 귀에 동관에 대한 좋은 말만 듣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외모는 이처럼 양강한 인물이, 마음씀은 매우 세심하여 황제의 심리를 매우 잘 읽었다는 점이다. 매번 황제가 생각하는 의도를 미리 읽고 쓸데없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아 황제가 더욱 좋아하였다.

 

동관이 환관이 되어 입궁한 후, 동향, 선배 환관인 이헌(李憲)의 문하에서 제자가 되었다. 이 이헌은 송나라 신종황제때의 유명한 환관이며, 서북변경에서 감군(監軍, 군사감독관)을 여러해 맡았고 여러 전공을 세웠다. 동관은 4년간 글을 읽은 적이 있어, 경서와 문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이헌을 따라 전선으로 나가서 군사적인 기초도 닦게 되어, 문무에 모두 착실한 기초를 다지게 된다. 게다가 그는 서북지방의 깊숙한 곳까지 몇번 들어가서, 서북의 산천형세도 익숙하게 익히게 된다. 이것은 환관중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이헌이 동관에 대하여 특별히 발탁하거나 보살펴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동관이 궁에 들어온지 20여년이 될 때까지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송휘종 조길과 같은 인물이 황제가 되지 않고, 신종황제가 20여년을 더 살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조용히 황궁속에서 살다가 죽어갔을 것이다.

 

시간적으로 보면, 휘종이 대권을 승계할 때, 동관은 이미 48세에 이르렀다. 이 나이는 바로 사람으로서 인생경험, 정력등이 최고조에 달해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휘종은 내정공봉관이라는 직위를 주고 항주로 보내서 글과 그림을 수집하도록 시켰다. 처음으로 승진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내정공봉관은 현재의 물자조달과장 정도에 해당하는 직위이고, 그다지 높은 관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직위는 콩고물이 많은 직책이었다. 동관은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이 기회를 이용한것은 의미심장하고 심지가 깊었다고 볼 수 있다.

 

항주에서 동관은 그 곳에 좌천되어 와 있던 채경과 친밀하게 지내며, 아침 저녁으로 만난다. 이 때, 채경은 그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그가 아끼던 왕휘지의 글까지 동관에게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가 항주의 민간에서 수장하고 있던 몇개의 진품 글과 그림등을 획득할 수 있게 도와준다.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 두명이 교묘하게 진품들을 손에 넣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채경의 첩을 황제게게 바칠 미인이라고 속여서 한 명문세가의 수중에서 두 개의 고서화를 얻어낸다든지 하는 것등이다. 어쨌든 그 중에는 휘종황제가 꿈에도 갖기를 원하던 주문구(周文矩)의 진품 중병회기도(重屛會棋圖)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 업무처리에 대하여 휘종황제는 아주 만족한다. 그래서 동관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사실상, 이 기간동안 항주에서 서화를 모으면서 여러가지 못된 짓들도 하게 되며, 이것은 당시의 신하들이 올린 상소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관을 비난하는 글들도, 모두 황제에게 가져다준 기쁨을 상쇄할 정도는 전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무서운 일은, 채경과 동관이 서로 도우는 깊은 우의를 다졌다는 점이다.

 

이번 항주행에서 동관은 아주 열심히 황제가 좋아할만한 그림과 글들을 채경으로 하여금 창작하게 하여 황제에게 바치게 하였다. 개봉으로 돌아온 후 그는 손크게 궁중의 비빈, 조길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도사, 황제신변의 측근신하와 황제의 신임을 받던 양사성등에게 선물을 바쳤고, 채경이 개봉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당시 동관의 몇몇의 심복들은 매우 곤혹스러웠다. 사부가 왜 이처럼 외지에 좌천되어 있는 인간을 열심히 도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동관은 그들에게 "현재의 재상은 나는 눈에 두지 않는다. 그와 가까워지려면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매우 힘을 들여야 할 것이다. 내가 제대로 봤다면,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의 재상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실은 동관의 보는 눈과 내공은 초일류라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1년이 되지 않아. 채경은 3급을 뛰어 재상의 자리에 앉는다. 이 점은 동관에게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채경이 국정을 주재한 후의 중대한 조치의 하나는 바로 동관을 추천하여 서북의 감군으로 보낸 것이다. 그 뜻은 청해, 감숙지구의 땅을 수복하는 것이다. 당시에 발생한 한 가지 사건은 동관의 성격을 짐작하게 해준다.

 

동관이 감군을 맡은 후에, 대군을 따라 황천에 도착했다. 그들은 여기서 제사를 지내고 서약하는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 후에 전투를 시작할 때, 돌연 황제의 조칙을 받는다. 원래 황궁에 불이 나서, 황제는 전쟁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다는 징조로 받아들이고, 급히 전투를 중지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동관은 조칙을 받은 후에,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신발속에 집어넣었다. 군중의 장수들이 그에게 황제가 뭐라고 썼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동관은 황제께서는 우리가 하루빨리 성공하기를 바라고 계신다고만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동관은 자세를 낮추어, 장수들과 잘 호흡을 맞추었고, 승리로 이끌었으며, 서북부족의 반란을 잘 진압하였다. 네개 주를 수복한 경축대회때, 장수들이 기뻐서 논공행상을 논의할 때, 동관은 두가지의 매우 체면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된다.

 

경축연회에서, 그는 천천히 황제의 그 조칙을 꺼내서, 군중의 장수들에게 보게 한다. 사람들은 보고나ㅓ, 모두 깜짝 놀란다. 장수는 놀라서 그에게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물었다. 동관은 "그 때는 사기가 막 올라 있을 때였는데, 전투를 중단시키게 되면 나중에 어떻게 다시 싸우겠는가"라고 하였다 장수는 다시 "만일 졌으면 어떻게 하실려고 그랬습니까?"라고 하자, 동관은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시에 그대들에게 이 조칙을 보여주지 않은 이유이다. 패전했다면 나 혼자 죄를 뒤집어쓰면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장수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모두 그에게 감복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나 군령은 엄해서 만일 어기면 진짜 목이 달아날 일이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관은 또 하나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일을 벌인다. 전투개시후,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던 장수가 하나 죽었다. 당시에 이 장수의 처는 이미 세상을 떠났었다. 그가 전사한 후 그의 외동아들이 거리를 떠돌아다니게 되었고, 거지가 되었다. 동관은 명을 내려 그를 찾아오게 하고, 이 아이를 양아들로 삼는다. 그리고는 내 친자식처럼 잘 돌보아, 성인을 만들겠다고 발표한다. 전장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감동하게 되고, 동관은 자기들이 목숨을 바칠만한 상사라고 믿게 된다. 이 때부터 동관은 서북의 군대에서 자신의 위신을 세운다. 아쉬운 것은 이 동사민으로 이름을 바꾼 아들은 자란 후에 동관을 도와 적지 않은 나쁜 짓을 하게 된다는 것이고, 1127년에 "6적"을 제거할 때, 동관과 함께 참수당하게 된다.

 

이번 전투의 승리는 대송제국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제국이 이미 오랫동안 군사적으로 뛰어난 전투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을 때였고, 이로 인하여 전국민의 사기는 떨어질대로 떨어져 있을 때였다. 전연지맹으로부터 송은 요나라와 형제지국의 맹을 맺게 되며, 이후 동북, 북부지방은 평정된다, 그러나 서북지방은 계속하여 송에게는 두통거리였다. 중국역사상 유명한 대신 범중엄도 여기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모래바람을 맞아본 적이 있다. 그래서, 동관은 다시 송나라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르게 된 것이며, 영웅처럼 조정상하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다.

 

이후 동관은 자주 서북지방에 나타나고 그 지역의 군사를 주재한다. 병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승리를 이끌게 되는데, 적석군을 수복하는데 현재의 감숙 귀덕과 조주 즉 현재의 감숙 임조이다. 이 때부터 동관은 명실상부한 송나라의 기둥이 되어 서북지방의 금방 무너질 것같은 형세를 버티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또 하나의 의견은 원래 서북지방은 땅이 척박하고 사람도 가난해서 가만히 놔두어도 별문제될 것은 아니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채경과 동관이 공을 세우기 위하여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곳에서 병사를 일으키고, 전투를 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송나라조정은 어찌되었든 군사상에서의 승리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관 2년 즉 1108년에 동관은 채경과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유는 황제가 동관에게 "개부의동삼사"를 수여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 관직은 재상급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재상이 외부에 나가 절도사를 맡을 때 쓰던 것이므로 매우 존귀한 것이었고, 그 의미는 지위와 영예가 모두 이미 재상에 상당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에 이 관직은 한번도 환관에게 주어져본 적이 없었다. 채경은 "동관은 환관의 몸으로 절도사를 맡는 것오 이미 과분한데, 다시 재상에 해당하는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라고 하게 되며, 채경은 재상으로서 그 조칙을 받을 것을 거부하고, 이에 황제도 그냥 없던 일로 해버리게 된다.

 

실질적으로, 채경의 동관에 대한 불만은 이미 오래 묵은 일이었다. 그는 동관이 자기의 재상으로서의 존엄과 권력을 침범한다고 느꼈다. 원인은 오랜동안, 동관이 서북지방의 장수를 선발할 때, 이미 정부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접 황제로부터 명을 받아왔다. 어떤 경우에는 그저 동관이 먼저 임명하고 다시 후속절차를 밟은 적도 있었다. 이것은 정부를 책임진 재상으로서의 자존심에 매우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동관도 당연히 화가 났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게 된다. 상당히 냉정하게 정세를 분석한다. 다음해인 대관3년, 1109년에 동관은 일거에 채경을 재상의 지위에서 끌어내리게 된다. 이 때 그는 세가지 방면의 힘을 동원하게 된다. 하나는 궁중은 자기의 제자등을 동원하여 비빈과 황제에게 힘을 써서 채경이 한 나쁜 일들을 그들에게 계속 말하게 한다. 둘째는 조정에 채경과 거리가 있거나 원한이 있는 관리들을 이용하여, 간관으로 하여금 채경을 탄핵하도록 한다. 셋째는 황제가 가장 믿는 도사를 내세워서 황제에게 보고하게 한다. 즉, 태양에 흑점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주공께서 신하를 멀리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길하다고 한다. 휘종은 상당히 놀란다. 채경이 몇차례 독대를 원하지만 매번 거절당한다. 그러자 채경은 사직서를 올리고, 황제는 즉시 명을 내려 그를 좌천하여 태일궁사로 삼는다. 다시 그를 항주로 내려보낸다.

 

이에 이르러, 동관은 완승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그는 승리후의 기쁨을 오랫동안 맛보지는 못하게 된다. 원인은 뒤를 이은 재상인 장상영이 황제에게 사치를 줄이고, 토목공사를 그치라는 등의 진언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휘종이 처음 황제위에 올랐을 때, 장상영이 재상을 맡은 적이 있는데, 당시의 청년황제는 그를 매우 무서워하였다. 그래서 궁전을 수리할 때도, 재상이 오면 피하고 숨어있으라고 명하였을 정도이다. 나중에 장상영은 채경에 의하여 간신의 목록에 올랐지만, 이것은 누구나 채경이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0여년이 지났고, 황제는 이제 많이 컸지만, 장상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일관되게 자기의 충직과 광정으로 황제와 국사를 논하였으며, 황제는 그를 매우 두려워 하였다. 그의 방식은 동관의 방식과는 차이가 컸다.

 

정화원년 즉 1111년에 동관은 검교태위에 오르고, 무관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다. 이 때 동관은 황제의 지원하에 당시까지 전례가 없던 일을 하게 된다. 그는 부대사의 신분으로, 황제와 국가를 대표하여 요나라에 간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것은 동관이 계획한 것이라고 한다. 원인은 이 때 서북전선에 전쟁이 없었으므로, 동관은 조용히 있다가, 동북방에 있는 요나라에서 무슨 기회를 찾을 수 있을까 하여 갔다는 것이다.

 

비록 동관의 명망이 중천에 뜬 해와 같았지만, 결국 이것은 황제와 국가를 대표하여 외국에 사신으로 가는 일이었다. 대신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몸이 완전하지 못한 자가 황제를 대표하여 사신으로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그렇게 되면 다른 나라가 송나라가 보낼 사람이 없어 환관을 보냈다고 멸시할 것이라고 진언하였다.

 

누가 알았겠는가? 당시 송휘종은 동관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거란인들이 우리나라에 동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동관이 여러번 전투에서 승전한 것을 알고 한번 보고싶어하였다. 마침 기회가 되어 그를 파견하여 요나라의 상황을 살펴보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관직을 태위로 올려 단명전학사인 정윤중을 정사로 하고, 태위인 동관을 부사로 하여 요나라에 국사로 방문하게 된다. 여기에서 휘종황제의 낭만적이고 경박한 일면을 볼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세속적이고 전통적이고 틀에 얽매인 것을에 속박받기를 싫어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술은 낭만이 필요하지만, 정치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법도와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휘종황제의 이러한 낭만은 제국의 멸망과 수천만명이 집을 잃고 목숨도 잃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래지 않아, 동관은 결국 개부의동삼사의 직함을 얻는다. 이것은 역사적인 전통을 깨뜨린 일이었다. 즉,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또 얼마지나지 않아 동관은 추밀원사로 임명받는다. 전국에서 황제 바로 다음의 최고군사수장이 된 것이다. 이것은 환관이 추밀원을 맏는 선례를 이룬다. 이후 태보, 경국공이라는 작위를 받는다. 동관은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직위에 오르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채경을 "공상(公相)", 동관을 "온상([女+溫]相)"이라고 불렀다. 온은 할머니라는 뜻이다.

 

이 "온상"은 이후 20여년간 송나라의 병권을 장악한다. 그는 송휘종의 총애를 받아 권력이 정점에 이르게 된다. 조정의 많은 고위관리들은 모두 그의 문하에 들어오게 되고, 그의 낯빛을 보고 행동하게 된다. 그의 집에는 방문하는 관리들이 끊이지 않았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선화2년 1120년에 휘종은 동관을 선무제치사로 하여 15만의 병사를 이끌고 방랍의 농민반란군을 진압한다. 450여일동안 작전을 하여 농민군 7만여명을 죽인다. 동관은 그 공으로 태사에 봉해진다.

 

선화7년 1125년에 동관은 금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공격한다. 그는 연의 땅을 수복한 공으로 광양군왕에 봉해지며, 대군을 이끌고 변강을 방어하며, 태원에 주둔한다. 이 해에 신종황제의 유훈인 연나라 땅을 수홉하는 자에게는 왕의 작위를 내린다는 뜻에 따라 그에게 왕을 봉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금나라 병사들이 1125년 남송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서북지방을 지키고 있던 동관은 저항을 포기하고, 급히 도망쳐 개봉으로 돌아온다. 금나라는 싸우지도 않고 옛 연나라땅을 차지한 후, 계속 남진한다. 놀라서 어쩔 줄 모르던 송휘종은 그 아들인 조환에게 억지로 황제위에 오르게 하는데, 바로 송휘종이다. 태상황인 휘종은 남쪽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휘종이 개봉을 지키도록 명한 동관은 목숨이 아까워 병사를 이끌고, 임시로 모집한 수만면의 승첩군을 데리고 남하하여 태상황을 따라간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여러 사람의 공분을 사게 되며, 흠종은 결국 동관에게 10가지 죄를 물어 죽이고 만다. 그 후,얼마되지 않아 개방은 무너지고, 휘종과 흠종은 포로로 붙잡히며, 북송은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