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때 나대경이 쓴 <<학림옥로(鶴林玉露)>>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어느 사대부가 개봉에서 첩을 한 명 사왔다. 그 첩은 스스로 채태사(蔡太師) 진에서 포자주(包子廚, 만두를 만드는 부엌)에서 일했다고 하였다. 어느날 첩에게 포자(만두)를 만들라고 하였던, 그녀는 못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포자주에서 일했다면서 어떻게 포자도 못만드냐고 힐문했더니, 대답하기를 "첩은 포자주에서 양파를 까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의 채태사가 바로 북송말기의 대신인 채경(蔡京)이다. 우리는 <<수호전>>, <<금병매>>, <<대송선화유사>>등의 고전소설에서도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일찌기 큰 권력을 가지고 천하의 재산을 탐하였고, 송휘종과 함께 놀았으며 북송왕조를 망국으로 이끈 그의 최후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굶어죽은 것이다. 이와 같이 특이한 인생경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주방에서 일했다는 첩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태사부의 주방에는 양파까는 사람이 있었으니, 마늘까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미나리 고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칼로 채를 써는 사람등 각종 사람들이 다 있었을 것이다. 요리원재료에 대하여 이정도이니, 나머지는 얼마나 전문화되어 있을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채경(1047 - 1126)은 복건성 선유 사람이다. 자는 원장(元長)이고, 송휘종때 육적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보수파인 사마광의 면역법의 폐지를 적극옹호하여 중용되었다. 이후 소성연간에는 다시 변법파의 면역법시행을 적극 옹호하여 계속 중용된다. 송휘종이 즉위한 후에는 삭탈관직되어 항주에 머문다. 환관인 동관이 서화진보를 찾아 남하하였을 때, 채경은 이 환관에 잘보여 다시 재상이 되어 조정에 들어간다. 그러나 송휘종은 그를 매우 신임한다.
조정에서 매번 채경에 반대하는 무리들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면 송휘종은 어쩔 수 없이 외직으로 쫓아버리기는 하지만, 얼마되지 않아 원래의 관직에 복귀시키고는하였다. 그가 등극한 숭녕원년(1102년)부터 채경은 상서 우복야 겸 중서시랑을 맡기시작하여, 정강원년(1126년)에 관작이 삭탈될 때까지 20여년동안 송휘종은 그를 4번 파면했다가, 4번 다시 기용했다. 마지막에 채경의 나이 이미 80이 되어 귀도 멀고 눈도 멀게 되었을 때도, 이 치매기있는 노인을 자기가 죽을 때까지 가까이 하였던 것이다.
어떤 지도자라고 가볍게 믿고 잘못을 저지르며 사람을 잘못쓰곤 한다. 사람을 잘못보거나, 눈이 멀거나 가짜모습에 속거나 잘못된 의사결정도 한다. 쓰레기를 좋은 물건으로 보기도 하고, 형편없는 씨는 좋은 씨라고 농가에 보내기도 한다. 위선자를 군자로 보기도 하고, 야심가를 후계자로 지명하기도 한다. 이건 모두 가능하다 그러나, 한번, 두번은 있을 수 있지만, 세번씩 그러는 경우는 적다. 더구나 송휘종은 네번이나 잘못보았다. 정말 방법이 없다.
좋은 황제가 좋지 않은 재상을 만나더라도 국가에 큰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좋지 않은 황제가 좋은 재상을 만난다면 국가는 마찬가지로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좋지 않은 황제가 좋지 않은 재상을 만나면 국가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북송의 멸망은 좋지 않은 황제 송휘종의 손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좋지 않은 재상의 손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채경을 얘기하자면 송휘종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시사에는 일류였고, 회화에도 일류였다. 그의 서예는 수금체(瘦金體)라고 하여 독특하다. 황제로서는 하급이었다. 하급중에서도 하급이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황제가 그림을 못그려도 좋고, 시를 못써도 좋고, 금을 연주하지 못해도 좋은데, 다만 백성들에게 재난만 가져다주지 않으면 된다.
<<수호전>> 제2회를 보면 이런 소개가 있다. 송휘종에 대하여 "신종천자의 열한번째 아들이다. 철종황제의 동생이다....매우 총명하고 잘생긴 인물이다. 부랑한 자제의 풍습과 놀이는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 할 줄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좋아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금기서화, 유석도교, 모르는 것이 없고, 공을 차고, 금을 연주하고, 대나무를 고르고,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인물이 황제가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18세 되던해 형님인 철종이 죽고, 자식이 없는 바람에 그가 황제에 오른다. 이것은 하늘에서 떡이 굴러떨어진 것과 같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고, 황음무도했다. 여기에는 채경, 동관과 같은 신하들도 한몫을 했다. 결국 북송은 망하고, 송휘종과 송흠종 부자는 포로로 붙잡혀, 결국 죽는다.
북송이 끝장나자 채경에게도 마지막이 온다. <<송사>>에 따르면 "흠종이 즉위하자, 채경을 유배보내싸. 담주에 이르러 죽었다. 나이 80세이다" "비록 길에서 죽었지만, 천하 사람들은 형벌을 제대로 받아서 죽이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비록, 백성들이 아무도 그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고, 그에게 뺨을 올려붙이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를 죽일 수 있는 절묘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가 귀양가는 동안에 채경에게 쌀한톨, 기름한방울, 채소 하나는 말할 것도 없고, 빵하나, 만두하나, 포자하나도 주지 않았다. 아무도 통지한 바 없고, 포고를 붙인 바도 없고, 명령을 내린 바도 없었지만, 사람들이 일치하여 이렇게 하는 바람에 채경은 어쩔 수 없이 굶어죽게 된 것이다.
왕명청의 <<휘진후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길 도중에 시장에서 먹고마시는 물건을 모두 팔려고 하지 않고, 욕을 했고, 어디를 가나 욕을 들었다. 그래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인심을 잃으니 이런 지경에 처하는 구나" <<선화유사>>에는 채경이 최후로 담주에 이르러 사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그리고는 굶주려 죽었다."
八十一年往事 팔십일년동안 일을 했는데
三千里外無家 삼천리 바깥으로 오니 아는 사람이 없네
孤身骨肉各天涯 외로운 몸은 가족들이 모두 천하각지로 흩어졌고
遙望神州淚下 멀리 중원대륙을 바라보니 눈물이 흐르는구나
金殿五曾拜相 금전에서 일찌기 다섯번 재상을 지냈고,
玉堂十度宣麻 옥당에서도 열번이나 자리를 지냈었는데
追思往日漫繁華 옛날에 좋았던 시절이 생각나지만
到此番成夢話 이 지경에 이르니 모두 꿈만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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