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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조보(趙普) : 송태조 조광윤의 군사

by 중은우시 2006. 2. 9.

조보(922-992) 자는 칙평(則平), 조적은 유주 계현, 나중에 부친을 따라 낙양으로 옮김.

 

조보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말은 "반부논어치천하(半部論語治天下, 절반의 논어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다)"이다. 그는 말년에 논어 이십권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하여 생긴 말이다.

 

어릴 때부터 관료업무를 배웠고, 지혜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이 좋았다. 나중에 주(周)에서 조광윤의 막료가 된다. 한번은 조광윤의 부하가 시골사람 백여명을 체포하여, 도적으로 지목하고 참할 것을 건의한다. 조보는 그 중에 무고한 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심문을 해보도록 요청하였다. 결과적으로 십중팔구는 무고한 양민이었다. 이로 인하여 조광윤은 조보를 크게 칭찬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광윤의 부친이 병으로 쓰러졌다. 조보는 조석으로 약을 올리며 그의 음식과 잠자리를 모두 돌보았는데, 주도면밀하면서도 신중하였다. 조광윤의 부친은 감동을 받아 조보를 같은 집안으로 생각했고, 조광윤도 그를 충성심과 지모를 모두 갖춘 드문 인재로 보고 자신의 손발과 같이 생각하여 그를 항상 곁에 두었다.

 

확실히 조보는 충성심과 지혜가 모두 뛰어났고, 시기를 잘 읽었다. 북송의 개국공신일 뿐아니라 북송의 기초를 쌓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군사중에서도 최상급의 군사였던 것이다.

 

진교병변(陳橋兵變)

 

조광윤은 진교병변을 통하여 후주로부터 정권을 탈취하고 송왕조를 건립한다. 이번 사변의 주모자는 조광윤이지만, 계획에 참여하고, 내외로 연결시킨 자는 바로 조보였다. 959년 주나라 세종이 병으로 죽고 갓 7세의 아들이 즉위하자, 조보는 군사를 손에 움켜쥔 조광윤이 황제위를 빼앗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비밀리에 행동에 들어간다.

 

960년 1월 1일, 후주의 여러 신하들이 새해를 맞이하느라 바쁠 때, 북방에서 갑자기 전쟁보고가 올라온다. 요나라 군과 북한의 군이 남하한다고 하였다. 후주의 신하들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고, 급히 조광윤에게 군사를 주어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이틀 후 조광윤은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고, 조보, 조광의(조광윤의 동생으로 후에 송태종)는 좌우에서 보필한다. 그날 저녁 대군이 진교역에 주둔하였다. 밤에 조보와 조광의는 먼저 군심을 선동한다. 황상이 유약하니 우리가 죽을 힘을 다해 싸워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조광윤을 천자로 모신 후에 북벌하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 동시에 사람을 보내 변경의 석수신등의 사람들에게 준비할 것을 지시한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장수들을 모아 다음 날 아침에 조광윤의 장막을 둘러싸고 천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한다. 조광윤은 놀란 것처럼 하면서 일어나니,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와 미리 준비한 황포(황색옷은 황제의 상징)를 입히며, 절을 하고 만세를 부른다. 이후 변경으로 군사를 돌려 '선양'을 받아 황제위를 취득한다.

 

조보는 그 공으로 우간의대부가 되고 북송의 개국제일재상이 된다.

 

천하통일

 

북송을 세운 후 북쪽에는 강대한 요나라가 있고, 태원에 위치한 북한도 있었다. 남쪽에는 남당, 오월, 후촉, 남한등의 정권이 할거하고 있었다. 어떤 전략으로 통일을 실현할 것인가. 이것은 송초의 군신들이 가장 머리아픈 문제였다. 재상인 조보는 천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온 힘을 다하여 계책을 짜내었다. 조보는 천하의 형세를 분석하고 장단점을 비교한 후, 요의 국력이 강대하므로 먼저 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고, 대신 남쪽의 할거정권들을 세력이 미약하므로 격파하기 쉽다고 보았다. 이에 근거하여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전략방침을 세운다. 조광윤이 북한도 약한데 왜 남쪽을 먼저 치느냐고 묻자, 북한이 비록 약하지만 산서쪽의 지세를 이용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그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막아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북한을 먼저 쳐서 얻으면 우리가 그 북방의 적들을 모두 막아내야 한다. 차라리 북한을 그대로 두고, 우리가 남쪽의 여러 나라를 칠 때까지 북방의 오랑캐들을 막아내도록 놔두고, 남쪽을 다 치고난 후에 북한을 쳐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며, 송태조는 흔쾌히 받아들인다.

 

조보의 "선남후북"전략에 따라 송은 한편으로 일부 군사를 북방과 서북방에 보내어 북한과 요의 침입을 방어하도록 하고, 주력부대를 남쪽으로 파견하여 수십년의 전쟁을 통해 남방을 통일한다. 979년부터는 북상하여 북한을 멸망시키고 오대십국의 분열국면에 종지부를 찍는다.

 

안방정국

 

조광윤은 정권을 빼앗은 후, 항상 부하장수들이 자기가 한 것처럼 자신에게서 권력을 빼앗아갈까봐 걱정하여 밤에 잠을 자지 못하였다.  이균, 이중진의 반란을 진압한 후, 조광윤은 즉시 조보에게 이에 관한 것을 계획하도록 하였다. 조보는 당나라 이래로 나라가 어지러운 것이 변방의 군사력이 너무 커지고, 임금의 힘이 약하고 신하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변방이 군사, 토지, 사람을 모두 가지고 있는 현상을 바로잡고자 한다. 이에 따라 조보는 "그 권한을 빼앗고, 그 돈과 양식을 제어하며, 정예병사는 회수한다"는 삼대방침을 세운다.

 

조보의 건의에 따라 송태조는 중앙군의 최고사령관직인 전전도점검인 모용연조를 해임하고 산남산서절도사로 보낸다. 이후 이 직위에는 아무도 임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깊이 믿는 석수신등의 사람에게서는 병권을 회수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자들은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조보는 "그들이 배반하지 않을 것은 저도 압니다. 그러나 신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 장수들은 부하를 잘 다루지는 못합니다. 만일 그 부하들이 잘못 마음을 먹게 되면, 그들도 부득이하게 따를 수밖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송태조는 깨닫는 바가 있어, 조보의 계획에 따라 석수신등의 장수를 소집하여 술을 내리면서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술잔을 주고 병권을 내놓게 하다)의 스토리를 만든다. 이후 절도사등의 직위도 문관이 대신 맡게 하는 등 무관들의 역량을 약화시키게 된다.

 

조보의 이와 같은 문신을 중시하고, 무신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정책은 송나라의 중앙집권과 천하통일에 도움을 주게 된다.

 

조보는 승상으로 있으면서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였으며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번은 조보가 어떤 사람을 관리로 추천하였는데 태조가 허가하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아뢰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또 올리니 태조가 화를 벌컥내며 올린 글을 찢고 땅바닥에 버렸다. 조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묵묵히 무릎을 꿇고 찢어진 글을 하나하나 모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붙인 후에 그 다음날 다시 올렸다. 그러자 태조는 전날의 실태를 깨닫고 그가 추천한 자를 임용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임용된 자는 후에 일을 아주 잘 처리하여 태조가 만족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