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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장개석의 진포뢰(陳布雷)와 모택동의 전가영(田家英)

by 중은우시 2006. 4. 14.

진포뢰는 장개석의 막료이다. 1935년부터 장개석의 시종실 제2실 주임, 국민당 중앙정치회의 부비서장,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부비서장, 최고국방위원회 부비서장등의 직위를 역임했고, 오랫동안 장개석을 위하여 원고를 초안해왔다. 그래서 장개석의 "문담(文膽)"이라고 불리웠다.

 

전가영은 모택동의 정치비서이다. 1948년부터 1966년까지, 그는 모택동을 18년간이나 쫓아다녔다. 1950년대에 모택동의 이름으로 나온 크고 작은 저작들은 대부분 전가영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택동의 "필혼(筆魂)"이라고 불리웠다.

 

진포뢰와 전가영은 비록 다른 당파에 속해있고, 서로 다른 지도자를 모셨고, 생활역정이나 정치적인 길은 서로 달랐지만, 두 사람은 중국근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어용문인이다. 그리고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들의 자살은 모두 중국역사에서 전환점에 서 있던 시점에 이루어져서 중국역사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진포뢰가 자살한 1948년은 성풍혈우(腥風血雨, 피비린내나는 바람과 피의 비가 내림)와 풍운동탕의 시대였다. 그가 자살할 때, 요심전투(遼瀋戰役, 요녕심양전투)는 이미 끝났고, 회해전투(淮海戰役, 국민당에서는 徐蚌會戰이라고 부른다)가 격렬하게 진행되던 때였다. 이 때 장개석의 국민당정권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국민당 고위층에 속해 있던 진포뢰는 다른 중국인들보다는 더욱 깊이 이미 국민당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유서를 남기고 자신이 자주 복용하던 수면제를 먹고는 생명을 끊었다. 진포뢰의 죽음은 중국사회의 위기를 미리 경보한 것이면서, 자기의 생명으로 곧 관에 들어갈 왕조를 전송했다.

 

전가영의 자살은 1966년이고, 중국역사상 또 한번의 뒤돌아보기 싫은 시대이다. 역사에서 10년동난이라고 부르는 문화대혁명이 막 시작되었고, 그는 밧줄 하나로 자신의 젊은 생명을 마감했다. 가영의 죽음은 진포뢰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이상이 파괴되고난 후에, 현실사회생활에서 무한히 절망한 것을 보여준다. 그의 죽음은 무언의 비판이었고, 문화대혁명에 조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중국역사상 두 사람의 유명한 지식인의 죽음은 비록 그들 각자의 주인을 각성시키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고귀한 생명으로 역사상 후인들을 위하여 두 개의 커다랗고, 깊이 생각하여야 하는 의문부호를 던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