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다이순(진대손, 陳垈孫)은 1900년에 태어나 1997년에 사망한 중국 경제학계의 태두인 분이다. 이 분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그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소문이 있다.
진대손은 복건성 복주시 사람으로 1920년에 청화대학을 졸업하고 1926년에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27년부터 청화대학에서 경제학과 교수를 지냈다. 1952년 대학구조조정으로 북경대학으로 옮겨 교수를 지냈다.
진대손이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데 대하여 2003년 5월 23일자 <<문회독서주보>>의 <<진대손선생의 한마디 말>>이라는 글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젊었을 때 그는 친구한명과 동시에 한 예쁜 여학생을 쫓아다녔다. 이 여학생은 두 사람 사이에서 도저히 선택을 할 수 없었고, 그냥 미국에서 누가 먼저 박사학위를 받아오면 그와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진대손은 결심을 하고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 정적은 약속을 어기고 먼저 귀국하여 그 여학생과 결혼을 해버렸다. 진대손이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을 때는 이미 그 여학생은 친구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이에 충격을 받아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비록 이 글에서 이름을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이 소문의 주인공이 진대손 교수와 주배원(周培源) 교수와 그의 부인 왕제징(王蒂澄) 여사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주배원 교수는 중국 물리학계의 태두로서 노벨상을 받은 학자를 길러낸 유명한 인물이다.
소문에는 여러 버전이 있는데, 미국에서 박사학위는 진대손이 먼저 받았으나, 귀국하는데 시간이 걸려, 학위를 늦게 받은 주배원이 먼저 귀국하여 결혼하였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진대손의 외조카인 당사복(唐斯復)에 따르면, 그 이야기는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는 1920년에 진대손이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고, 이 때는 주배원과 왕제징을 몰랐다는 것이다. 진대손이 1926년에 미국을 떠나 유럽에서 반년을 머물다가 1927년 2월에 중국으로 돌아왔고, 1927년 8월에 청화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주배원은 진대손보다 2년 늦게 귀국하여 1929년부터 청화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어 서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대손이 왕제징여사를 만난 것은 1931년이라고 한다. 1931년 진대손의 일기에 의하면, "오늘 배원의 여자친구인 왕소저를 만났다"라고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1950년경 진대손은 당사복과 북경시 숭문문을 갔을 때 낡은 집 하나를 가리키며, 전에는 저기가 서양물건을 파는 가게였는데, 주배원이 나에게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을 사는데 같이가자고 한 적이 있다."고 한 바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위에서 적은 내용의 소문이 학교에 돌게 되어, 당사복의 어머니(진대손의 여동생)은 "오빠, 들리는 소문이 사실이야"라고 물으니, 진대손은 "쓸데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는 것이다. 같은 때, 주배원의 딸도 어머니인 왕제징에게 "엄마 그 말이 진짜예요"라고 물으니 "사람들이 하는 쓸데없는 소리는 듣지 마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주배원과 왕제징 사이에는 네명의 딸을 두었다.
진대손과 주배원부부와의 우정은 50여년을 이어졌고, 이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30년대의 청화대학에서 전란중의 서남연합대학 그리고 50년대이후 문혁중의 북경대학에서 그들은 계속하여 동료였고, 서로 왕래가 많았으며, 믿음이 두터웠다. 주배원의 큰 딸은 진대손의 양녀이고, 4명의 딸은 모두 진대손에게 "진빠(진씨 아버지라는 의미)"라고 불렀다. 주배원의 딸의 기억에 따르면 "우리들 기억속에는 진빠는 키가 크고 몸이 당당하며, 걸음걸이도 안정되고, 자상하면서도 깊이 뚫어보는 눈빛을 가지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남아있다. 부친은 항상 진빠를 gentleman이며, 학문이 뛰어나고, 사람이 관대하고 후덕하며, 정직하다고 말해왔다. 엄마는 진빠가 옛날얘기를 할 때, 얘기를 들으면 배꼽이 빠질 것같은데, 본인은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고, 아무 말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한다고 하였다. 우리 집에는 아이가 많았고, 어머니는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서 집안에 돈 쓸 일이 많았고, 돈이 부족했다. 자주 진빠가 돈을 도와주곤 하였다." 진대손도 주배원 집안과의 우정을 중시하였고, 시간이 나면 주백모(周白毛, 주배원이 머리카락이 희었기 때문에 진대손은 주백모로 불렀다)집에 갔다.
진대손에 얽힌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본인들만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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