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위쪽 사진은 좌로부터 두월생, 장소림, 황금영.
가운데 사진은 청방 소속인 상해의 인력거꾼들
아래 사진은 두월생, 장소림이 직접 극에 출연한 모습
옛날 상해의 암흑가에는 삼대보스로 이름난 황금영(黃金榮), 두월생(杜月笙), 장소림(張嘯林)이 있었다.
1. 장소림
1937년 10월하순, 전투상황이 악화되고, 장개석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보고, 상해를 떠나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암흑가의 3대보스가 일본군에 이용당하지 않도록 하여야겠다는 생각에서 두월생에게 전보를 보내어, 두월생에게 황금영, 장소림과 함께 상해를 떠나 홍콩으로 가도록 지시했다.
두월생은 황금영, 장소림을 만나서 자신은 지시에 따라 홍콩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황금영은 자신은 나이가 이미 70이 넘어 몸도 옛날같지 않고, 병도 있으니, 홍콩으로 멀리 갈 수가 없으니 그냥 상해에 남겠다고 하고, 다만 문을 걸어닫고 절대 일본군에 협력하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장소림은 이를 상해를 독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장소림은 상해에 남아 일본에 공개적으로 투항한 후, 즉시 제자들을 풀어, 여러 업종에서 일본인과 "공존공영"하도록 조치했고, 항일활동을 진압하였으며, 애국인사들을 체포, 살해하였다. "신아화평촉진위원회" 회장의 명의로 사람을 보내 일본군을 위하여 양식, 면화, 석탄, 약품등을 구해왔는데, 가격을 형편없이 깍아서 사가거나 심지어 무력으로 빼앗아 갔다.
장개석은 군통국장인 대립(戴笠)에게 명하여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다. 대립은 상해에 남아있던 군통상해구 구장 진공수에게 지시하여 장소림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진공수는 내부 사람을 이용하여 장소림의 보디가스인 임회부로 하여금 집행하도록 지시했다. 1940년 8월 15일 상해의 신문은 장소림의 사망소식을 전하였다. "어제 장소림이 총을 맞아 죽었다. 흉수는 장소림의 보디가드로 알려졌다..."
2. 두월생
항전후에 두월생은 상해시장의 자리를 항상 탐내왔다. 장개석은 그를 이용하고자 하였으나, 그를 제어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멀리하기도 하였다. 장개석은 내부에 명확하게 지시를 내려 "방회에 대한 기본적인 정책은 단속"이라는 명을 내려, 두월생이 다시 상해에서 자리잡을 수 없도록 하였다.
3대전투가 끝난 후에 두월생은 이미 장개석의 시대는 갔다고 느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생각했다. 비록 중국공산당에서 황염배등을 통하여 두월생을 회유하여 상해에 남도록 요청하였으나, 그는 스스로 자신이 20여년간 반공활동을 벌였고, 공산당과는 피의 채무가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여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두월생은 자유항구로 이름난 홍콩을 목적지로 선택했다.
대만으로 도망친 장개석은 일찌기 유홍균, 홍란우등을 보내서 두월생을 대만으로 데려가고자 하였으나, 두월생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러자 장개석은 "신경전"을 펼쳐 그를 겁주었다. 1951년 4월초, 홍콩의 국민당 특무요원은 두월생에게 "중국공산당에서 홍콩의 영국당국과 교섭을 하는데, 당신을 상해로 붙잡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중공의 특무들이 홍콩에 잠입하여 당신을 제거하고자 한다"는 정보를 흘렸다.
두월생은 이 말을 사실로 믿고, 매우 두려워하며 잠을 자지 못하였다. 깊은 신경쇠약과 심장병에 시달린 그는 7월에 중풍으로 온몸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8월 10일이후에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8월 16일에 결국 사망한다.
3. 황금영
삼대전투가 끝난 후 황금영은 홍콩으로 가지 않고, 상해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그가 믿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당중앙감찰위원, 송호경비사령관을 지낸 양호는 바로 412 반혁명정변때 공산당원들을 도살한 지휘자였고, 황금영과 같은 입장이었다. 항전기간동안 양호는 장개석의 총애를 잃어, 장개석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결국 주은래에 의하여 반장개석의 민주인사로 변신했다. 항전후에 양호는 상해에 살면서 상해지하당과 밀접한 연락을 유지했다. 중공상해국은 양호를 통하여 황금영에게 전하기를 반동파를 죽어라 따르지만 않겠다면, 예전의 잘못은 추궁하지 않고, 체포하지도 않고 인신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알린다.
황금영은 공산당의 약속을 믿고 유유자적하게 생활을 하게 되고, 제자들에게는 예전의 암흑가의 생활을 버리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지시한다.
그는 비록 예전처럼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보내기는 하였고, 먹고 입는데는 걱정이 없는 생활을 지내기는 하지만, 이미 예전과는 차이가 너무 많이 났고, 여기에 며느리인 이지청은 재산을 챙겨서 홍콩으로 도망까지 쳤다. 결국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병이 들었고, 1953년 6월 22일에 사망한다. 그의 나이 86세였다. 임종전에 그는 "나의 일생은 모두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가버렸다"고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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