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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장선운(蔣先雲) : 장개석과 모택동이 가장 총애했던 제자

by 중은우시 2006. 10. 21.

 

 

장선운을 얘기하자면,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인중용봉으로 뛰어난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황포삼걸"의 첫째로 꼽히는 장선운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당시의 동창들의 회고에 의하면, 장선운은 항성과 같이 그가 어느 곳에 있던 그의 빛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선천적인 지도자감이었다고 한다.

 

호남 신전에서 온 장선운은 같은 고향출신의 두 사람과 함께 "황포삼걸"로 불리웠지만, 장선운의 자질은 하충한, 진건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리고, 장선운은 황포군관학교에서 기적과도 같은 기록도 세웠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그는 모든 과목시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요중개는 "군관학교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라고 불렀다.

 

그가 중국역사상 거인들과 맺은 관계를 보더라도 그는 전설적이다. 정선운은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장인 장개석이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평소에 학생들의 면전에서 웃음을 보이지 않는 장개석도 장선운을 만나면 매우 친밀한 태도를 나타냈다. 그런데, 장개석이 이렇게 총애하는 학생의 첫 스승은 공교롭게도 장개석의 최대적수인 모택동이었다. 장선운이 황포군관학교에 들어올 때 추천인이 바로 모택동인 것이다.

 

장선운은 모택동이 1921년 형양에서 당조직을 만들때 가장 먼저 입당한 당원의 한 명이었다. 20살도 되지 않아 수구산광구의 노동자운동에 참여했고, 노동자구락부의 주임을 맡았다. 안원대파업때는 장선운이 모택동과 이입삼의 가장 훌륭한 조수였다.

 

장선운이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간 이후 그는 항성처럼 많은 위성이 그의 주위에 집결했다. 중공황포지부가 성립되고, 장선운은 만장일치로 지부 서기로 추대되었으며, 좌익의 "청년군인연합회"도 장선운이 발기인 겸 지도자였다. 이후 황포군관학교출신의 공산당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장선운의 선전과 동원에 힙입어 가담하게 되었다.

 

비록 장개석도 장선운이 공산당의 주요간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재주를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 그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았다. 장개석은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장래에 혁명이 성공해서 군에서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황포군관학교는 그저 장선운과 같은 사람만이 지휘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선운은 장개석의 총애를 받았고, 황포군관학교의 동창들중에 승진이 가장 빠른 사람이었지만, 나중에 장개석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장개석이 공산당과 반목하는 "중산함사건"이 있은 후, 이중당원신분이었던 장선운은 공개적으로 국민당을 탈당한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이 피바람을 몰고오며 반공을 시작하자, 두 장씨는 철저히 의절하게 된다. 4월 17일 장선운은 무한에서 황포학생의 토장대회(討蔣大會, 장개석성토대회)의 주석이 되어, 30만의 사람앞에서 강개한 목소리로 장개석의 혁명배반을 성토한다.

 

북벌기간중에 장선운은 북벌군총부의 비서를 맡고, 나중에 제5단단장으로 보충된다. 광동, 호남, 강서에서 싸우고 무한에 도착한 후에는 당시 남창에 있던 장개석이 그의 재주를 아껴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부르고 제1사단장을 맡기고자 한다. 그러나 장선운은 받아드리지 않는다. 장개석은 그가 장선운과 함께 찍은 사진을 신문에 내기도 한다.

 

장선운은 장개석과 관계를 단절했지만, 공산당조직내에서는 충분한 신임을 얻지 못하였다. 당시 중공의 책임자중의 하나이던 장국도는 그를 의심하고 배척한다. 장선운은 당시 26사 77단장겸 정치위원을 맡고 있었는데, 고민하던 장선운은 자기의 강렬한 열망은 제2차북벌의 전장터에서 배출한다. 5월하순, 북벌군이 하남의 임영에서 몇배나 많은 봉군(奉軍, 봉천 즉 요녕출신 군벌)과 격전을 벌인다. 봉군의 장학량은 군단장 1명을 해임하고 여단장 1명, 단장 3명을 죽이면서 탱크, 비행기까지 동원하지만 패배한다. 그러나, 장선운은 바로 이 전투에서 진정한 장성으로 크지 못하고 5월 28일에 임영의 성아래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 때 그의 나이 2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