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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홍학(紅學) : 홍루몽연구의 변천

by 중은우시 2006. 3. 4.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을 홍학이라고 부르는데, 최소 건륭18년(1753년)부터 시작되었다. 홍학자들은 오사운동을 계기로 구홍학과 신홍학으로 구분한다.

 

1. 구홍학의 주요학파

 

평점파(評點派)

 

중국문학사에서 평점파의 기원은 명나라 중기때부터이다. 김성탄(金聖嘆)이 <<수호전>>의 피를 달고, 모종이 <<삼국연의>>의 피를 달고, 장죽파는 <<서유기>>의 피를 달았다. 나중에는 하나의 고정적인 격식을 갖추었다. 각권의 앞에 피서, 제사, 독법등이 있고, 매회에 회전 회후의 미피, 협피, 피주등이 있다.

 

지연재는 최초로 김성탄을 배워 <<석두기>>(홍루몽)에 평점을 붙인 평론가이다. 그는 대량의 평점식의 평어를 썼고, 이로 인하여 석두기는 <<지연재중평석두기>>라는 명칭을 얻었다. 지연지의 비문은 홍루몽의 초본의 원글과 함께 이어져 내려왔다.

 

평점파의 대표인물은 청나라때의 왕설향, 장신지, 요섭등의 사람이고 이 사람들은 권점, 평어추가등의 형식을 통하여 또한, 정위원, 고악이 보완한 120회본 홍루몽에 평점을 진행하였다.

 

색은파(索隱派)

 

색은파는 정치색은파라고도 한다. 소위 색은이라는 것은 글자문면에 대한 탐색을 통하여, 글속의 진짜 사람, 진짜 사건을 찾아내는 것이다. 색은파는 건륭,가정시기에 경학고증풍의 영향을 받아, 하나의 학파를 형성했다. 색은파의 주요한 수단은 여러 번잡한 고증을 거쳐, 소설의 스토리와 인물중에서, 숨겨진 사건, 숨겨진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색은파의 개산조사는 주춘(周春, 1729-1815)이 꼽힌다. 주춘은 홍루몽을 금릉 장후의 집안일을 썼다고 하였다. 이런 관점은 후대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색은파가 후대에 미친 비교적 큰 영향은 "명주의 집안일이라는 설"(나란싱서의 집안일이라는 설), "청세조와 동악비의 이야기라는 설"(또한 푸린과 동소완의 사랑이야기라는 설), "만주배척설"등이 있다.

 

색은파는 청말민국초에 성행하였다. 주로는 역사상이나 소문에서의 사람이나 사건을 홍루몽에서의 인물이나 이야기에 비유하는 것이다. 대표작으로는 왕몽완, 심병암의 <<홍루몽색은>>, 채원배의 <<석두기색은>>, 및 등광언의 <<홍루몽석진>>등이 있다. 지금까지도 이러한 류의 글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제영파(題詠派)

 

제영파는 책속의 인물의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에 착안하여, 제영파의 사사, 부, 찬, 어떤사람들은"영화부귀는 쉽게 흐르고, 인생은 꿈과 같다"는 인생관, 불가의 "색공"관념과 "몽환"사상. 어떤 사람은 책속의 '풍월번화"와 "사랑이야기"를 붙잡아 대거 "번화"한 풍경과 "향염"의 사랑을 그리면서 앙모와 사념을 토로하는 것이다.

 

왕국유(王國維).

 

구홍학가중에서 평점파고 아니고, 색은파도 아니며, 제영파도 아니면서 일파를 이룬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왕국유이다. 왕국유는 최초에는 철학과 미학의 관점에서 홍루몽의 예술가치를 비평한 홍학가이다. 왕국유는 먼저 철학과 미학의 이중이룬을 기초로 문학비평체계를 건립하고, 다음으로 헛된 것을 버리고 진실을 추구하는 고증정신을 제출하여 홍학의 연구가 구홍학의 수수께끼찾기식의 견강부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2. 신홍학

 

고증파(考證派)

 

신홍학의 주요한 인물은 호적(胡適)이다. 그는 1921년에 <<홍루몽고증>>이라는 글을 쓴다. 다음 해 다시 <<발홍루몽고증>>을 쓴다. 이 두 편의 문장에서는 고증파홍학의 개파작품으로 인정된다. 호적의 "고증"은 홍루몽의 연구에 신천지를 개척해주었다. 호적은 철저하게 채원배를 대표로 하는 색은파 홍학을 비판했다.

 

그는 첫번째 문장에서 "나는 우리가 "홍루몽"의 고증을 하는 것은 단지 이 두개의 문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가 고증이 필요하 두개의 문제가 가리키는 것은 작가와 판본이었다. 이것이 바로 호적이 홍루몽고증에 선을 그은 대상과 범위였다.

 

1930, 40년대

 

1930년대에는 홍학이 점점 호적의 고증, 저자, 판본의 작은 범위에서 벗어났다. 적지않은 연구자들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 일련의 새로운 과제를 제출했다. 홍루몽의 시대배경, 주제사상, 예술특징, 인물형상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는 연구의 중심이 인물형상, 심리상태의 분석으로 옮아간다. 1940년대말에는 주여창이 <<홍루몽신증>>을 내놓았는데, "하나의 홍루몽과 그 작가 조설근에 대한 자료고증서이다" 그리고 홍학의 역사상 처음으로 지연재의 비문에 대하여 중시하기 시작했다.

 

비홍운동(批紅運動)

 

1954년에 유평백의 <<홍루몽연구>>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이어서 호적파의 주관유심주의학술사상과 문예사상에 대한 비판이 전개된다. 이 비판운동에서는 신노홍학의 많은 관점이 모두 비판받는다. 1953년부터 1963년까지 어떤 사람은 이 시기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홍루몽을 연구한 시기라고 한다. 주요한 표지는 "조설근서거이백주년기념전람회"를 개최한 것을 들 수 있다.

 

홍학현황(紅學現況)

 

1976년이후, 홍학연구의 내용은 갈수록 넓어졌고, 분화도 더욱 구체적이 되었다. 사람들은 홍학의 개념에 대하여 다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주여창은 "현학(現學)", "지학(脂學)", "판본학(版本學)", "탐일학(探佚學)"을 홍학중의 사대지주(四大支柱)라고 불렀다. 많은 홍학가들은 홍학을 "조학(曹學, 外學)"과 "홍학(紅學, 內學)"으로 나눈다. "조학"은 조설근의 집안, 전기, 문물등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홍학"은 홍루몽의 판본, 사상내용, 인물창조, 예술성과, 책으로 만드는 과정등을 연구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유심무가 진가경을 통하여 홍루몽을 연구하는 것을 스스로 "진학(秦學)"이라고 이름붙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