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논쟁/조조무덤논쟁

조조(曹操) : 칠십이의총(七十二疑塚)

중은우시 2006. 3. 1. 11:55

 

조조묘의 위치도

 

조조는 아마도 <<삼국연의>>에서 가장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인물일 것이다. <<삼국연의>>에서 나관중은 조조를 성격상 의심이 많은 효웅으로 그렸다. 죽은 후에 자신의 묘가 원수들에 의하여 훼손될 것을 걱정하여, 죽기 전에 명을 내려 자기를 위하여 72개의 의총(疑塚,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무덤)을 만들게 하였다고 전한다.

 

오랫동안 조조의 묘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민간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첫째, 조조는 생전에 업성의 서쪽, 즉 현재의 하북성 자현 경내에 72개의 의총을 만들었다는 설.

둘째, 조조는 물속에 묻었다는 설. 그는 장하의 강바닥에 암도를 설치한 후 기관을 세워서 도둑의 침입을 막았다는 것이다.

셋째, 조조의 사후에 업성에 묻지 않고, 하남성 중부의 허창성 밖에 묻었다는 설

넷째, 조조는 업성의 동작대등 삼대의 아래, 즉 현재의 삼대촌에 묻었다는 설

 

이 네가지 전설중 두번째와 네번째는 가장 괴상한 것으로 보인다. 업성에는 일찌기 민요가 전해진다는데 "장하의 물이, 삼대에 부딪쳤다. 삼대를 쓰러뜨리니 조조의 붉은 관이 나왔다" 그러나 이런 설들은 고고학적으로는 전혀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또한 청나라때의 야사의 기재에 따르면 한 어부가 장하의 바닥에서 큰 석판을 발견하였고, 석판아래에는 석문이 있으며 석문의 안에는 돌침대가 있고, 돌침대 위에 누워있는 시체가 바로 조조라는 기재가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에 관련된 증거는 전혀 없다.

 

최근 하북성의 역사, 고고학자들이 대량의 사료를 고증하고 현지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조의 묘가 대략 하북성 자현(磁縣)의 시촌영향(時村營鄕) 중남부, 강무성향(講武城鄕) 서부, 및 하남성 안양현 안풍향의 약 5평방킬로미터 안에 있는 것으로 결론내렸다. 한단시의 역사학회 회장인 유심장(劉心長)은 "시촌영향 중남부에서 강무성진 서부, 다시 안풍향에 이르는 이 주위 5킬로미터내는 위치는 물론이고 지형까지도 사료에 기재되어 있는 조조의 묘의 위치와 들어맞는다"고 주장한다.

 

유심장에 따르면, 조조는 생전에 자기가 죽은 후의 묘지에 대하여 명확하게 지시를 내려두었다 그의 유령(遺令)에서 명확하게 "업의 서강(西岡, 서쪽 언덕) 위, 서문표(西門彪)의 사당 가까운 곳에 묻으라"고 하였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바로 이 5평방킬로미터지역이 유령에서 말한 방위의 묘사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조조는 또한 유령에서 자손들에게 자기를 농작물이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에 묻어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 방원5평방킬로미터지역은 지세가 높고 물을 끌어들일 수 없으며, 땅도 척박하여 확실히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므로 조조가 말한 바에도 부합한다.

 

이외에 조조는 유령에서 자기의 후손들이 동작대에 올라서 서쪽을 바라보았을 때, 자기의 묘지가 보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동작대에 대한 고찰연구에 따르면, 동작대의 유적지에서 서쪽을 보면 바로 이 방원5평방킬로키터가 일목요연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심장은 조조가 생전에 비록 황제에 등극하지는 않았으나, 묘지의 선정은 매우 엄격했었는데, 자현, 안양현의 이 토지는 지세등이 능묘를 건설하기에 매우 적합했다. 즉, 당시의 소위 '풍수'의 요건에 딱 들어맞는다.

 

업성은 바로 하북성 임장현 일대이고 서쪽은 자현의 시촌영향과 강무성진에 맞닿아 있다. 업성은 '건안문학'의 발상지이고, 유명한 동작대, 금봉대, 빙정대의 삼대가 있는 삼대촌이 있다.

 

서문표는 전국시대 업성의 수령이었다. 그가 처음에 업성으로 왔을 때에는 사람이 적고 땅은 척박했으며 백성들은 '하백취부(河伯娶婦, 강의 신에게 여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서문표는 교모하게 무당을 쫓아내고, 지방호족등 세력을 몰아냈다. 이후 서문표는 직접 강을 측정하고, 백성을 동원하여 장하십이거를 팠다. 이리하여 척박하던 농토는 옥토로 바뀌었다. 이리하여 부유하게 된 업성은 당시 위나라의 주요한 도시로 성장한다. 서문표가 이 지방에서 많은 사람의 존중을 받아서 현지의 사람들은 그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고고학자들은 서문표의 사당에 대한 위치를 여러 사료를 통하여 고증한 결과, 그의 사당이 있는 위치도 바로 이 방원5평방킬로미터의 범위내라는 것이다.

 

어느 시인은 "살아서는 한나라의 적통을 끊더니, 죽어서도 의총을 만들어 사람을 속이는 구나..사람들이 의총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헷갈리지 않는다.....72개를 모두 파내면 그 중의 하나에는 그대의 시신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읊은 적도 있다. 삼국연의등 문학작품에서도 조조를 한나라황실을 음모로 빼앗은 인물로, 그리고 72의총을 만들어 살아서는 하늘을 속이더니, 죽어사도 사람을 속인 간사하고 음험한 인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심장은 "조조가 사람들에게 도굴될 것이 두려워, 72의총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사료에 따르면, 당나라때 이전에는 조조의 묘지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이 점은 당태종 이세민이 묘지를 지나면서 제사를 지내준 것에서도 분명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북송이후 조조의 묘의 구체적인 위치를 사람들이 모르게 된 것이다.

 

일대효웅으로서 왜 묘지의 위치가 이렇게 쉽게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까? 유심장에 따르면, 이것은 조조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격은 삼국연의에 그려진 것처럼 간사하고 세상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유령>>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자기의 묘는 척박한 땅에 써달라, 그리고 장례규모에 대하여도 상세하게 요구하는데, "평상시에 입던 옷으로 그대로 염을 하고, 금옥진보는 부장하지 말라"고 한다. 즉, 평소에 입고 있던 그대로 묻어주고, 금은주보를 집어넣지는 말라는 것이었다.

 

조조는 자기의 묘에 큰 돈을 낭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죽은 후 몇년의 시간이 흐르자 능위의 제전은 이미 훼손되었다. 귀중한 금은주보등을 묻지 않았으므로, 도굴범들이 도굴할 이유도 없었다. 거기에 전쟁이 계속되고, 황조가 바뀌면서 조조의 묘는 아무도 위치를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이다.

 

"조조의 묘지 근처에는 확실히 적지 않은 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조사를 해본 결과, 이것은 소위 72의총이 아니고, 원래 조조의 것이 아니었으며, 북조시대의 귀족, 황실친척, 왕공대신들의 묘였습니다. 조조는 장례를 검소하게 지낼 것을 주장했고, 스스로 그것을 실천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많은 돈을 들여 72의총을 만든 것으로 오인되고, 음험하고 간사한 주요한 하나의 방증으로 이해되는 것을 보면 문학작품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조조가 죽은 후에 일종의 비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