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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의 제거부분을 둘러싼 논쟁

by 중은우시 2006. 3. 1.

 

제거전의 모습

 

제거후의 모습

 

청명상하도는 "중국제일명화"로 불리우는 대단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 대하여 서화감정가이면서 염황헌(炎黃軒)의 주인인 왕개유(王開儒)는 최근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주장을 하나 펼치고 있다. 즉, 1973년 고궁박물원에서 청명상하도를 다시 표구하면서, "후대에 보완하여 붙인 비단부분(補絹)" 한조각을 제거하였는데, 그가 연구하여 알아낸 바에 의하면 제거한 부분은 원래 '보완하여 붙인"것이 아니라 국보중의 국보인 북송 장택단(張擇端)의 원화라는 것이다.

 

그는 1990년대부터 청명상하도를 연구하여왔고, 이미 십여년이 흘렀다. 그는 일찌기 청명상하도를 복제하는 업무를 맡은 적이 있었고, 1997년에 복제에 성공하였다. 복제의 필요에 의하여 고궁박물관은 그를 위하여 청명상하도의 전화의 천연색사진을 찍어주었고, 복제가 완성된 후에 1998년 1월 9일에 고궁박물원 서화조의 청명상하도 기록에서 고궁박물원이 1973년에 제거한 이 보완하여 붙인 비단을 보았다.

 

왕개유는 당시에 청명상하도를 복제하기 위해서는 원화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제거한 부분도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고, 고궁박물원은 이를 허용했다. 사진으로 보면 이 보완하였다는 비단조각은 표구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색깔이 원작보다 약간은 진하다.

 

그렇다면, 고궁박물원은 왜 표구하면서 이 비단부분을 제거하였는가? 고궁박물원의 전 부원장인 양백달은 영보재의 화보 <<청명상하도>>의 서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원래 노인의 뒤에 있는 기둥의 곁에 일부분이 잔결되어 있었는데, 원래의 비단은 이미 잃어버렸고, 명말 청초에 표구할 때 남은 그림에서 날카로운 입의 소가 서있어서 입을 벌리고 소리치는 형상을 하고 있어 원화의 의미를 훼손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1973년 새로 표구할 때 떼어내서 자료실에 남겨두었고, 다시 복원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왕개유가 최근 자료를 뒤져볼 때, 무의식중에 1998년에 찍은 사진중에 발견한 것은 당시 제거된 이 비단조각에는 소위 "날카로운 입의 서있는 소"뿐아니라 기왓집의 한 부분, 흙담의 한부분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공개출판된 청명상하도의 복제품에는 날카로운 입의 서 있는 소 외에 기왓집의 일부분과 흙담의 일부분은 아직 존재하고 있다. 왕개유는 그 때 매우 놀랐다고 한다. 고궁의 전문가가 제거한 부분이 원화가 아니라고 하고 나중에 붙인 비단조각이라고 하고, 또한 이로 인하여 원화의 뜻이 훼손되어 제거하였다고 하면서, 왜 제거된 기왓집의 일부분과 흙담은 여전히 청명상하도에 남아있는 것일까?

 

왕개유에 따르면, 고궁에서 제거하기 전에 인민미술출판사에서 복제한 청명상하도와 비단조각을 제거한 후의 영보재가 출판한 청명상하도를 비교해보면, 영보재판의 기왓집과 흙담의 색깔은 분명히 옅어졌고, 먹의 색이 다르다. 왕개유의 판단으로는, 고궁박물원이 비단조각을 제거한 후에, 원화에 다시 제거한 기왓집의 일부분과 흙담을 그려넣은 것이라고 본다.

 

고궁박물원이 1973년에 다시 표구할 때, 제거한 것은 후대에 보완한 비단조각인가? 왕개유에 따르면 그가 확대경으로 자세히 제거된 비단조각을 연구하기 전에 인민미술출판사가 복제한 청명상하도를 살펴봤는데, 제거된 기왓집과 흙담은 주위의 부분과 하나로 연결되어 그려졌고, 중간에 끊어진 부분이나 후대에 보완하여 붙였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부분의 화면에서도 보완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상의 상황에 근거하여 왕개유는 1973년에 제거된 것은 보완한 비단이 아니라, 원화라는 결론을 얻었다.

 

자기의 판단을 증명하기 위하여 왕개유는 중국방직과학원연구검사센터를 찾아갔고, 청명상하도의 전도의 천연사진과 제거된 부분의 천연사진에 대하여 견진물질이 동일한지를 검사받았다. 중국방직과학원연구검사센터가 발급한 검사증명에 따르면 "천연사진을 400배 현미경으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천연사진에서의 견직물의 형태효과가 구별된다는 점을 찾지 못하였다. 이외에 남은 사진에서 기와집 위쪽에서는 분명한 비단무늬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부착한 흔적이 아니라 긁힌 흔적으로 보인다"

 

왕개유는 "이번 검사증명에서 알 수 있듯이 고궁박물원이 제거한 것은 후대의 보완비단조각이 아니라 원래 청명상하도의 원본 비단이었다. 국보중의 국보인 북송 장택단의 진짜 그림부분인 것이다. 제거후의 화면은 원작의 품격과 어긋날 뿐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어 버렸다. 이로서 자손후대에 천고의 한을 남기게 된 것이다. 청명상하도는 고쳐져서는 안된다. 고궁박물관은 반드시 1973년에 제거한 부분을 다시 붙여야 하고, 국보를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려야 한다"

 

왕개유의 주장에 대하여 고궁박물원의 전문가들은 어떤 태도인가. 30여년이 흐른 후, 그 때 청명상하도의 표구작업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보완비단조각제거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당시 청명상하도의 표구작업에 참여했던 고궁박물원의 전 부원장, 문화재전문가인 양백달은 이미 80여세가 되었는데, 1973년에 청명상하도를 표구할 때, 확실히 거기에서 한 장의 뾰족한 입의 서있는 소를 그린 비단을 제거했고, 그 비단조각은 원화가 아니라, 마지막 표구시에 보완하여 붙인 것이다. 당시에 전문가토론회도 개최했었다고 말한다.

 

왕개유의 주장과 중국방직과학원연구검사센터의 검사결과에 대하여는 양백달은 그 비단조각은 원화와 완전히 달랐다. 보완한 비단조각인지여부는 당시에 한번만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방달 선생과 같은 전문가가 참여하였는데, 어떻게 원화를 잘못 제거할 수 있겠는가?

 

제거된 비단조각상의 기왓집과 흙담에 대하여는 왜 새로운 청명상하도에서도 나타나는지에 대하여는 양백달은 "그것은 잘 모르겠다. 미안하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하여는 대답할 수 없다. 현재 고궁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양백달은 그러나 그 비단조각이 원화가 아닌 것은 분명하고, 원화와 맞지 않아서 제거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했다.

 

익명의 고궁서화전문가는 단순히 사진을 가지고 제거한 비단의 질이 같은지 여부를 따지는 방법은 정확하지 않다고 의견을 얘기했다. 그 비단은 청명상하도에 어쨋든 보완되어 붙여졌던 것인데, 아무래도 가장 비슷한 비단을 가져다가 붙이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사진이라는 것이 실물과는 차이가 있는 법이기 때문에 사진이 비슷하다고 하여 실물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라는 의견을 얘기했다. 고서화감정은 아주 엄격한 학문이고, 고궁의 권위있는 전문가의 판단을 믿어주고, 민간에서 얘기되는 이런 저런 얘기는 믿지 말라고 하였다.

 

왕개유에 따르면, 고궁박물원의 서화기록에 따르면 1973년에 다시 표구하기 전에 청명상하도의 그림에 모두 80여곳을 보완하였고, 그림의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다. 표구과정에서 고궁박물관은 50여곳을 고쳤다. 당연히 이렇게 고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논쟁이 컸던 부분은 바로 그림전반부에서 제거한 소위 '보완비단조각'이었고, 제거한 부분은 고궁박물원이 여전히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