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 : 조맹부(趙孟頫)

by 중은우시 2006. 2. 6.

 

작화추색도.

 

작화추색도는 원나라때의 서화가인 조맹부의 작품이다. 명,청 시대에 민간에 전해지다가, 청나라때 황궁에 들어갔으며, 현재는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다. 작화추색도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중국 산동성 제남시의 북쪽에 있는 작산과 화산일대의 풍경이다. 1989년 10월 5일 대만정부는 횡으로 4개를 자르는 방식으로 작화추색도 우표를 발행하였다.

 

조맹부는 송태조 조광윤의 아들의 10대손이었다.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는 중국 한족의 마음을 회유하기 위하여 널리 송나라 황족의 후손들을 찾아서 관직을 주었다. 고향인 절강성 호주에서 지내고 있던 조맹부는 원나라 조정에 불려나가서 졸지에 1품의 관직을 얻게 되고, 천하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후세인들 중에서는 송나라 조광윤의 후손으로 원나라에 투항하여 벼슬한 것에 대하여 그다지 좋게 보지 않고 그를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의 서화에 있어서의 성과에 대하여는 거의 부정하는 사람이 없다.

 

조맹부는 33세에 관직에 나가 제남에서 생활한 적이 있고, 66세가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42세때 고향에 돌아온 적이 있는데, 거기서 22세인 주밀(周密, 자는 公勤)을 만난다. 조맹부가 그림에 적은 글에 의하면 "공근의 부친은 제(산동성) 사람이다" 그러나 조상의 고향이 산동인 주밀은 한번도 산동지방에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조맹부는 공근에게 제 지방의 산천을 알려주기 위하여 그림을 그려준다. 조맹부가 별 뜻없이 주밀에게 그려준 이 그림은 그 후 800년간 천하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작화추색도>>는 조맹부가 고향인 호주에서 산동제남의 기억을 되살려 그린 것이다. 제남이 아름다운 풍경과 강물, 호수, 나무, 농촌집들을 잘 그렸으며 멀리 두개의 산봉우리가 높이 솟았는데, 오른쪽에 뾰족한 산을 "화불주산(華不注山, 지금의 華山)", 왼쪽의 위가 평평한 것이 작산(鵲山)이다.

 

현재는 작산은 황하의 북쪽에, 화산은 황하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조맹부의 그림을 보면 두 산 사이에 황하와 같이 큰 강이 흐르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조맹부의 그림은 이전의 송나라때의 화가들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 것은 동원, 거연, 범관등이 그린 산수화는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산과 물과 나무였지, 현실에 존재하는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맹부는 실제의 산수를 보고 그것을 그렸던 것이고, 이것은 중국 산수화의 일대 변혁잉ㅆ다. 그런데, 왜 조맹부가 그린 제남의 산수의 모습이 실제와 다른 것일까?

 

그 해답은 황하는 물길을 자주 바꿨다는데서 찾아야 한다. 지금은 황하가 화산과 작산의 사이로 흐르고 있지만, 원나라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하가 모래가 쌓여 물길을 바꾸게 된 것이 역사상 큰 것만 26회, 그 중 대규모인 것은 5번이 있다. 네번째는 1128년으로 금나라가 남침하며 송나라가 남쪽으로 도망치기 위하여 황하를 무너뜨려 물길을 남쪽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다섯번째는 1855년으로 황하의 물이 높아져서 물길이 북상하고 다시 산동으로 바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즉, 조맹부가 있던 시절에는 이미 100여년전에 물길을 남쪽으로 바꾸어 황하는 제남으로 지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한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현재의 지도를 보면 작산은 화산의 서쪽에 있다. 그런데, 그림에는 작산이 화산의 동쪽에 있다고 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화가의 착각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