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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청명상하도 : 작가 장택단은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06. 3. 11.

장택단(張擇端)의 신세내력은 사서에 어떠한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다.

 

천백년이래로 계속하여 수수께끼로 내려왔다. 일부 학자들은 장택단을 북송 사람이라고 하고, 어떤 전문가들은 남송 사람이라고 하고,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장택단이 금나라때 사람이라고 한다.

 

장택단이 남송사람이라는 전문가는 주로 명나라 말기의 서화가인 동기창이 <<용태집>>에서 <<청명상하도>>에 대한 추측을 기재한 것에 근거한다. "남송때 변경의 경치를 그리워하며 그린 것이다" 청나라때의 손승택은 <<경자소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청명상하도는 남송인이 옛 수도의 번성을 추억한 것이다"

 

장택단이 금나라때 사람이라는 전문가는 <<청명상하도>>에 가장 먼저 발문을 쓴 사람이 금나라때 사람이라는 것이다. 남송과 북송, 양송화원에는 모두 장택단에 관한 글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더 많은 전문가들은 <<청명상하도>>에 대한 연구와 고증을 통하여 장택단을 북송 사람이라고 본다. 현재 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는 <<청명상허도>> "석거보급삼편본", 뒷면에 가장 빠른 것은 금나라때 장저의 발문에서 장택단의 신분을 "한림"이라고 하였고, 나아가 장택단이 경사에 유학하였고, 원래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였다. 장저의 발문은 장택단의 신세에 대한 가장 빠른 기재이고 유일한 기재이다. 그가 언급한 향씨가 누구인지는 이미 고증할 수 없고, 향씨가 지은 <<평론도화기>>라는 책에는 기록이 없다. 이것은 전문가들이 연구하고 고증할 많은 공간을 남겨둔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금나라때 장저의 발문에 따르면, 장택단이 북송인이라는 관점은 가장 설득력을 가진다.

 

지금까지, 개봉의 민간에는 장택단과 청명상하도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개봉의 상국사는 남북조시대인 천보6년에 지어지기 시작했으녀, 북송태종시기에 상국사는 가장 번성하게 된다. 부지가 540무이고, 승원이 64개, 전각이 웅장하며, 꽃과 나무가 무성했다. 그래서 "금벽휘영, 운하실용(황금색과 파란색이 서로 빛나고, 구름과 노을이 빼어남을 잃을 정도였다)" 방대한 상국사의 기둥그림에는 대량의 화가들이 필요했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 북송 동경의 상국사안에는 사원회화를 그려 살아가는 민간화가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청년화가는 스스로 말하기를 수도인 동경성의 번화한 풍경을 그림속에 옮겨올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청년이 바로 산동 제성에서 온 장택단이었다. 장택단은 상국사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하루는 송휘종 조길이 황가의 시위대의 호위하에 상국사에 향을 올리러 왔다. 송휘종은 상국사에 재주가 뛰어난 젊은 화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재상 채경에게 명하여 상황을 파악하도록 시킨다. 송휘종 조길과 재상 채경은 그림을 좋아할 뿐아니라, 그림의 고수들이었다. 송휘종 조길은 재상 채경에게 장택단을 한림도화원으로 부르도록 하고, 친히 명하여 장택단에게 북송 동경의 번화한 풍경을 그리도록 한다.

 

장택단은 궁중한림도화원에 불려왔다. 그러나 그가 요청한 것은 황궁안에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었고, 조용한 농가에서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이었다. 송휘종 조길은 장택단의 요구를 받아준다. 그리고는 채경에게 명하여 장택단을 위하여 동경성의 교외에 있는 농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조치한다. 이때부터 장택단은 밤낮으로 그림을 그린다. 누가 생각했겠는가? 북송 동경의 번화한 풍경이 동경성 교외의 구석진 농가에서 창작완성되었다는 것을.

 

재상 채경은 장택단의 그림을 송휘종 조길에게 보일 때, 송휘종 조길은 장택단의 그림에 무척 기뻐하며, 이때부터 <<청명상하도>>는 송휘종 조길에 의하여 황궁내부에 수장된다.

 

북송이 멸망한 후, 송휘종 조길과 아들 송흠종 조환은 금나라에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끌려간다. 북송 궁중에 보관되어 있던 청명상하도 및 6000여건의 예술품도 금나라에 노략된다. 송휘종 조길의 11째 아들인 송고종 조구는 항주에서 황제에 오른다. 장택단은 송고종 조구에게 국가의 원한을 잊지 않도록 하고 금나라에 항거하게 하기 위하여, 문을 걸어닫고 다시 한 번 <<청명상하도>>를 그려 송고종 조구에게 바친다. 송고종 조구는 부친인 송휘종 조길과 달랐다. 그는 그림에 흥미가 근본적으로 없었으므로, 그림을 돌려보낸다. 장택단은 그림을 길게 펼치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는 홧김에 그가 그린 청명상하도를 불살라버린다. 다행히 집안 사람들이 그 중의 절반을 구해낸다. 장택단은 오래지 않아 우울함에 빠져 죽는다. 장택단이 두번에 걸쳐 청명상하도를 바친 이야기가 진실인지는 이미 고증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전설에서 장택단은 국가와 백성을 생각하는 애국화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