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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부의)

마지막 황후 완용(婉容)의 최후

by 중은우시 2006. 2. 28.

 

완용과 부의의 사진

 

 

청나라 부의의 부인인 마지막 황후 완용의 죽음에 대하여는 세가지 정도의 설이 전해지고 있다.

 

첫째, 부의의 견해

 

부의는 두번에 걸처 완용이 죽은 곳을 언급하였는데, 첫번째는 부순전범관리소에서 쓴 <<나의 전반생>>의 초고에서이다. 그는 "815이후 그녀(완용)는 비록 동북인민들과 같이, 진정한 몸과 마음의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병세가 이미 깊었고, 결국 하얼빈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녀의 매우 불행한 일생을 끝마친 것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완용은 일생동안 하얼빈에는 가 본 적도 없다. 그리고 하얼빈에서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두번째는 1960년대초에 <<나의 전반생>>을 정식출판할 때이다. 이 책에서는 앞에서 쓴 내용을 수정했는데, 다음과 같다. "815후에 그녀가 나와 헤어질 때, 마약에 이미 깊이 빠져있었다. 그리고 병약해서, 다음 해에 길림에서 병사하였다." 만일 길림이라는 것이 길림성이라고 한다면 괜찮지만, 길림시라고 한다면 맞는 말은 아니다.

 

둘째, 차아호(嵯峨浩)의 견해

 

부의의 동생 부걸의 일본인처 차아호는 그녀가 쓴 <<유랑왕비>>라는 글에서 그녀들이 연길을 떠난 후 부대는 다시 완용을 "중국과 조선의 국경선이 이쓴 도문(圖們)으로 데려갔다." "완용황후는 거기에서 혼자서 고독하게 죽었다"라고 적었다. 부대에서 완용이 이동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연길에 남겨두고 자무스로 보내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다른 곳인 도문으로도 보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연길과 도문은 겨우 2시간의 거리에 있어서 옮긴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셋째, 이옥금의 견해

 

이옥금은 회고록에서 그녀와 완용이 헤어지는 광경을 상세하게 적었다. 그 후에 그녀는 완용이 죽은 곳에 대하여 들은 바를 전했다. 그녀는 "부대가 장춘을 철수할 때, 이 가련한 중국의 마지막 황후는 할수없이 부대를 따라갔다. 그 때 장개석은 내전을 발동하여, 부대는 전중국해방을 위하여 남북에서 싸우고 있었으므로 그녀를 데리고 가기가 매우 불편하였다. 거기에 그녀는 당시에 병도 깊고, 혼자서 생활할 수도 없었다. 부대가 연길에 갔을 때 그녀를 거기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녀는 돈화(敦化)에서 죽었다고 한다. 돈화에서 죽었다는 말은 사실은 국민당중앙사의 신문보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당 중앙사의 보도에 따르면 "이 때 가짜황후 추홍(완용)은 이미 저번달 하순에 돈화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많이 들린다. 공산군이 장춘을 함락시킬 때, 그녀는 일찌기 통화에서 다시 여기로 온 적이 있다. 14년간 머물렀던 만주국의 수도에서 며칠간 더 있은 후, 공산군이 장춘에서 철수할 때, 그녀는 영길로 끌려갔고, 영길경찰국에서 대중에게 공개된 바 있다. 다시 돈화로 압송하였으며, 연길로 다시 보냈다. 현재 연길에서 다시 돈화로 보냈다. 병으로 죽고, 시종들은 일찌기 사방으로 흩어졌다. 8월하순에 이미 돈화에서 객사했다"

 

돈화는 길림성의 오래된 해방구였다. 국민당군대는 여기에 도착하지 않았다. 기자도 이것을 "많이 들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사실로 볼 수는 없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세가지 견해는 모두 틀렸다.

 

아직도 건재하는 목격자에 따르면 완용은 연길에서 죽었다. 이 목격자의 이름은 곽장발이다. 그는 1985년 11월 병으로 입원하면서 흑룡강성 임구현의 간부인 박형도와 병실에서 친구가 되었는데, 그들이 <<마지막황후와 황비>>라는 책을 이야기하다가 곽장발이 책속에 기재된 완용의 죽은 곳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는 자기가 목격한 바를 이야기해준다. 그 때 곽장발 노인은 이미 74세였고, 해방군이 장춘을 점령했을 때 만주황궁을 점령했던 병사였다. 그의 부대는 당시 철도부대라고 불리웠는데, 만주국의 포로들을 압송하고 관리감시하는 업무를 맡았다. 1986년 3월 20일 박형도는 이 사실을 <<마지막황후와 황비>>의 저자에게 글로 써서 보낸다. "곽장발에 따르면 완용은 당시에 분명히 연길 강북대옥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 책에서 말한 것처럼 병이 위중하였고, 거기다 당시의 생활조건이나 의료조건이 좋지 않았으므로 결국 옥중에서 죽었다. 죽은 후 그들은(곽장발등) 낡은 돗자리로 말아서 북산위에 버렸다. 황후였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당시의 상황이나 날자등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진자신, 우천진, 우천운의 세 사람은 완용의 사망지점과 시간에 대하여 조사를 한다. 그들은 아직 남아있는 몇가지 원시자료를 뒤져본 후에, 당시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들도 방문하여 만나본다. 여기에는 완용의 사체사진을 찍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얻는 증거로 그들은 완용은 장춘에서 철수해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1946년 5월 3일에서 6월 20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완용이 장춘에서 길림시로 옮길 때, 일찌기 길림시공안국의 간수소에 임시로 유치된 적이 있다. 당시 그녀는 병이 깊었고, 정신도 오락가락 하였으며, 혼자서 대소변도 못가렸다. 모두 따르는 시종들이 처리해야 했다. 그녀의 생명을 유지시기키 위하여 매일 그녀에게 적당량의 아편도 공급했다. 그녀가 길림시로 옮긴 것은 그녀가 황후였기 때문도 아니고, 그녀가 정치범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장춘에 있는 그녀의 친척들이 아무도 그녀를 부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용이 길림시로 옮겨온 지 얼마되지 않아 국민당군대는 장춘을 점령한다. 그리고는 길림시로 압박해왔다. 이 상황하에서 1946년 5월 23일 밤에 그녀는 다시 기차에 태워져서 연길시로 이동되고, 연길감옥(현재의 연길예술극장)에 안치된다. 6월 10일 다시 그녀와 차아호, 부검등 6명을 목단강으로 옮긴 후 다시 자무스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녀는 병이 이미 깊어 여행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나머지 5명만 옮기고, 그녀는 연길감옥에 남겨둔다.

 

5명이 떠난 후 10일만에, 그녀는 결국 세상을 떠난다. 죽은 후에는 연길시 남산에 묻힌다. 아직도 남아있는 등기부에는 "6월 20일 오전 5시 사망"이라고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