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는 일생동안 다섯명의 여인들과 결혼한다.
황후인 완용(婉容), 숙비인 문수(文繡), 그리고 담옥령(潭玉齡), 이옥금(李玉琴), 이숙현(李淑賢)...그러나, 그는 후손을 하나도 두지 못한다. 그 이유에 대하여는 몇가지 설이 있다.
첫째, 생리흠결설(生理欠缺說)
이것은 부의는 생리적으로 흠결이 있어서,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그를 반평생동안 모셨던 이국유(李國維)에 의하면 부의의 음식먹는 것, 물마시는 것, 옷입는 것, 옷벗는 것, 세수하는 것, 화장실가는 것까지 모두 모셨지만, 부의의 몸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욕구가 있었고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매일 부의를 진백했던 어의인 서사윤(徐思允)도 같은 견해를 말하고 있다. "부의의 신체는 매우 건강했고, 신장부위에도 병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왜 부의가 자식을 못낳는지에 대하여는 설명을 하지 못한다.
부의는 일찌기 친척들 앞에서 "일본인들이 그가 먹는 음식에 어떤 걸 집어넣었고, 이것때문에 그의 생식능력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만주국을 세우기 전에도 이미 10년이상 결혼생활을 하였고, 거기에서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의의 동생인 부걸은 에드워드 벨과의 회견에서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의는 생식능력이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벨은 부의의 생식능력상실을 그의 양위증을 치료하는데서 찾는다. 부의는 기자방문을 받고 1956년 12월에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만주국시절에 생활이 규칙적이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새벽 2,3시가 되어서 잠을 잤고, 잠자기 전에 호르몬주사를 맞곤 하였다" 당시의 기록에서도 만주국의 황실에서는 남성호르몬을 주기적으로 주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일 밤 궁내부근시처의 전수과장인 부소의 아들인 육은이 주사를 놓아주었다. 그는 부의가 가장 믿는 조카였고, 매번 주사를 놓기 전에 잡물질이 있는지 호르몬용액을 조사하곤 하였다. 부의가 청년시대에 너무 많은 호르몬주사를 맞았고, 이것으로 인하여 생식능력을 상실하였다는 것도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동성연애설
이국유는 부의가 동성애의 경향을 가졌다는데 대하여는 극력 반대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부의의 사람이 사는 도리에 대하여는 잘 몰랐고, 더구나 동성애에 대하여는 알지도 못하였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벨은 그가 쓴 <<중국의 마지막황제>>라는 글에서 부의가 양성동체라는 소문은 장춘과 일본에 널리 퍼져있다. 황궁간첩이 일본에 보고한 것에 따르면 이러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그들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부의는 동성의 청년들에 대한 흥미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의의 제수인 일본인 차아호(嵯峨浩)에 따르면 궁중에서 전해지는 말중에 부의의 정인이 남자하인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만주국시대의 영화배우였던 산구숙자(山口淑子)의 회고록에서도 "황제는 남색을 좋아했고, 황후완용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로 인하여 황후는 마약에 탐닉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의가 여자를 싫어하였다는 것은 기록상 분명해 보인다. 그는 여자에 대하여는 심리적으로 반감과 멸시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군적의 회고에 따르면 만주국 초기에 부의가 대련의 어떤 해변여관에 들렀는데, 거기서 여자들을 문앞에 대기시켜 무릎꿇고 맞이하게 하였다. 그런데, 부의는 이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크게 화를 내고 관계자들을 혼을 냈다고 한다. 그 이후 아무도 이런 방식으로 부의에게 아부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목단강에 갔을 때는 현지의 일본대화여관에 머물렀는데, 거기서도 젊고 예쁜 여자들이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의는 이 여자들이 거기 남자들과 시시덕거리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주인에게 여자를 모두 남자로 바꿔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부의는 자기가 여자들을 멸시하였을 뿐아니라, 주변 사람들이나 친척들에게도 항상 그렇게 요구하였다고 한다. 장춘역앞에는 당시에 매춘거리가 있었는데, 부의는 주변사람들에게 그곳을 드나들지 말도록 엄히 명을 내렸다고 한다. 육은이 머리를 깍으러 갔다 오겠다고 보고하면 "머리깍으면 바로 들어와라. 나쁜 곳에 들르면 안된다"고 엄히 당부했다고 한다. 한번은 어느 황족이 화류계를 드나든다는 소문이 들리자 부의는 황궁내에서 글을 읽던 조카들과 동생들에게 "절대 그 사람을 따라하지 말라. 나쁜 것은 배우면 나한테 맞을 줄 알아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국유도 한번은 휴가를 내서 시장에 물건을 사러갔을 때, 12,3살된 어린 조카가 같이 따라가겠다고 우겨서, 같이 조카딸을 데리고 시장을 보고 온 일이 있는데, 이 사실을 다른 사람이 부의에게 보고하였다고 한다. 부의는 사사로이 여인을 데리고 거리를 활보하였다는 이유로 이국유를 엄히 혼냈다는 것이다. 이국유의 변명 한마디 들어보지도 않고...
셋째, 신선집안설
이국유는 부의를 33년간 모신 사람이다. 그는 부의의 병적인 결혼생활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부의는 자신을 신선의 집안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부의의 부부생활은 원만하지 못했고, 완용의 비극도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이국유는 부의가 스스로를 신선집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대망상증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였다.
이국유의 회고록에 따르면 "부의는 확실히 황후, 비, 귀인들과 가까이 지내지못하였다. 그들과 같이 자는 것도 매우 드물었다. 일반 사람들은 아마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매일 부의를 접촉해본 사람으로서는 별로 이상하지 않다. 그 근원은 생리적 결함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부처의 지시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출가인들은 색즉시공이라고 하지 않는가. 신선과 부처를 믿고 매번 '백골관을 뛰어넘고자' 하였으며, 신선집안이 되고자 하였던 부의로서는 이러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육은의 회고에 따르더라도 이국유의 말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부의는 남녀관계에 있어서 우리를 많이 단속했다. 그는 말하기를 어떤 아름다운 여인을 마나더라도, 나중에는 모두 해골로 되는 것이므로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어떤 때는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를 만나면 이렇게 묻기도 한다. '분수에 어긋나는 일을 했느냐'고. 그때는 그를 진정한 천자로 보았으므로 거짓말을 할 수 없었고, 한 날을 했다고 하고, 안한 날은 안했다고 하였다. 그가 했다는 말을 들으면 다시는 중요한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일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국유에게는 네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매번 아이를 낳을 때마다 그에게 보고하면 그는 항상 '어떻게 또 자식을 낳았어?'라고 힐책하는 말투로 얘기하곤 했다는 것이다.
어떤 설에 의하더라도 부의는 건강한 남자로서의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지 못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신선의 도를 닦았다는 것은 결국 남자로서의 생식능력을 잃은 후에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말이거나 전설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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