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부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소련에서의 5년간 포로생활

중은우시 2006. 11. 15. 20:38

1945년 8월 19일, 소형비행기 하나가 심양공항에 신비스럽게 착륙했다. 심양공항을 점령한 소련홍군은 신속이 이 비행기를 포위하였다. 비행기문이 열리고, 화려한 옷을 입고, 당황한 표정의 남자가 비행기에서 걸어내려왔다. 그가 바로 마지막 황제 부의이다.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은 소위 "만주국"의 황제인 부의의 말일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10일후 그는 일본인들이 준비한 바에 따라, "황후" 완용, "복귀인" 이옥금과 다른 가족들을 버려두고 소형비행기를 타고 심양으로 갔다. 거기서 대형비행기로 갈아타고 일본으로 도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부의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소련군이 이미 심양공항을 점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와 시종들이 비행기문을 나서면서, 소련홍군의 포로가 되었다. 다음 날, 소련홍군의 호송하에, 부의등 9명은 소련으로 갔다. 적탑(赤塔)에 있는 모로카프카 수용소, 백력(伯力, 하바로브스크)에 있는 홍하자 간수소, 제45특별전범수용소등에 수용되었다. 이 곳에서 그는 5년간의 특수한 포로생활을 보냈다.

 

소련의 모든 수용소는 "황제" 포로를 다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소련은 신분이 특수한 부의에 대하여는 특별우대를 해주었다. 모르카프카 수용소는 그를 위해서 소형 파티까지 열어주고, 그에게 정책을 설명해주고, 그에게 어떤 요구사항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이후의 생활도 부의등의 예상을 전혀 벗어나는 것이었다. 소련측은 그들을 요양자처럼 대해주었다. 음식에 있어서 그들은 매일 4끼를 주었다. 아침에는 빵과 각종 과자, 커피, 차등을 점심은 최소한 요리 2개와 탕 1개를, 오후 3,4시경에는 오차로 간단한 식사를 주고, 저녁은 서양식이었는데, 소혓바닥, 소꼬리, 과일주, 과자등이 나왔다. 부의등은 알지 못했지만, 당시 소련의 경제생활은 상당히 어려웠고, 백성의 생활수준도 매우 낮았었다.

 

거주에서도 수용소는 부의에게 단독으로 방을 내주고 특별히 유선라이오를 설치해서, 음악과 러시아어뉴스등의 프로그램을 들을 수 있게 해주었다. 쉬는 시간에도 부의등은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고, 산보나,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처음에 소련특은 그들의 활동범위에 일정한 제한을 두었으나 나중에 제한은 점점 적어졌고, 부의는 산을 오르기도 하고, 강가로 가기도 하고, 나무숲은 마음대로 걸어다녔다. 움직이는 범위는 그가 만주국황제를 할 때보다도 오히려 넓었다. 더욱 심한 것은 소련측이 부의가 피아노를 칠 줄 아는 것을 알고 피아노도 한 대 그의 거소에 가져다 주었다.

 

이런 모든 것에 대하여 부의는 의외로 생각했고, 고마워했다. 부의는 그를 따라온 시종들에게 항상 황제로서의 모습을 보였고, 매일 그들의 문안을 받았다. 그는 하루종일 불경을 읽고 좌선수행하며, 점도 치면서 놀았다. 그가 이런 일은 하는 것에 대하여 소련군은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1945년 10월, 부의등은 하바로프스크 홍하자간수소로 보내어졌다. 여기의 조건은 모로카프카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생활은 아주 편안했다. 나중에 소련에의 교육방침에 따라 그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소련당사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일부 청소나 위생, 식품수령등의 노동에 참가했다. 그러나, 부의는 전혀 이런 노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나중에 부의는 다시 45특수전범수용소로 옮겨졌는데, 소련측의 그에 대한 우대조치는 계속되었다.

 

포로가 된 때로부터, 부의는 무서워했다. 그는 소련군이 그를 중국정부에 넘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그가 통치했던 만주국시절에 먼저 일본의 관동군사령관 본장번과 중국동북지방의 주권을 팔아먹는 <<일만의정서>>를 체결해서 동북의 모든 권리를 일본에 바쳤고, 이로써 동북지방은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는 전초기지로 도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회란훈민조서>>, <<국본전정조서>>등을 반포하여 추가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정책을 시행하였다. 그의 행위는 중국인민에게 많은 재난을 가져다 두었다. 그는 중국정부는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공산당과 국민당중에서 누가 이기든지 간에 자신에게는 좋은 점이 없다. 그저 소련에 남아 있을 수 있다면 목숨은 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로카프카수용소에 들어갈 때, 부의는 소련군에 대하여 한 가지를 요청했는데, 그것은 소련에 오래 머물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그는 동생 부걸을 시켜서 스탈린에게 편지를 쓰게 했는데, 그가 소련에 머물도록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편지는 소련군의 중령 보로코프의 손에는 넘겨졌지만, 회신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후 부의는 여러번 스탈린에 편지를 썼다. 그러나 모두 깊은 바다에 돌을 던진 듯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것은 부의로 하여금 매우 우울하게 하였다. 최상층을 접촉하는데 실패하자, 부의는 신변의 소련군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부의는 장춘에서 도망쳐 올 때, 몸에 적지 않은 보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주보, 비취, 장신구, 옥석, 시계등이 있었다. 그는 이런 보물로 소련군측의 환심을 샀다.

 

막 소련에 도착했을 때, 한 소련군관이 부의의 시계를 보고 마음에 들어 했다. 그것은 백금으로 된 장방형 시계였고, 가격이 적지 않았다. 장교는 시계를 차지 않은 자기의 손목을 내보이며, 부의를 보고 웃었고, 부의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시계를 장교에게 벗어주었다.

 

하라보프스크 간수소에 있을 때, 소련은 그를 대신해서 물건을 보관해주겠다고 요구했다. 등기할 때, 간수소의 소장은 목걸이가 아주 예쁜 것을 보고 아주 부러워하며 말했다. "내가 만일 이런 목걸이 하나를 내 처에게 선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의는 당장 그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하루는 소련현지의 내무국(경찰)에의 국장이 부의를 별장으로 초청하여 식사했다. 부의는 소련에서 왜 이렇게 포로를 위해서 연회를 베풀어주는지 몰랐다. 그 국장을 만났을 때, 부의는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국장은 그에게 소련이 비록 승리했으나,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올해는 가뭄을 만나서 수확이 좋지 못하여 곤란이 많다. 부의가 귀중품을 기증해주면 곤란을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겠다는 말을 했다.

 

간수소로 돌아온 부의는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하고 고민했다. 보물을 다 내놓자니 그것은 너무 아깝고, 안내놓자니, 소련에 남으려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최종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협의한 후에 금그릇, 금병등 일부 가치는 적지만 면적이 큰 물건들을 기증했고, 나머지는 숨겨두었다. 어디에 숨기는 것이 적당할 지를 고민하다가 마침 그들은 영화기의 상자를 찾아서 넣어두었다. 부의의 시종인 이국웅이 공구와 철사를 가져와서 상자에 한 겹을 더 만들어 468개의 보물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일부 기증하기는 아깝고, 넣어둘 수는 없는 보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예를 들어 부의의 조카인 육섬은 보석으로 만든 팔지, 다이아몬드 소매단추, 한자루의 진주를 받았다. 이국웅은 다이아몬드 하나와 사파이어모자장식, 조모록 모자장식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도 각각 3,4개씩 받았다. 나중에 장소가 바뀌면서 부의는 이것들이 소련군에 발견되고, 소련정부를 속였다는 죄명을 쓸 것을 두려워하여, 일부 보석은 없애 버렸다. 그는 사람을 보내여 다이아몬드, 팔찌를 강에 버리고, 일부 진주는 화로에 넣기도 하였다. 1950년 8월 부의가 귀국할 때는 일부 남겨둔 보석을 중국으로 가져와서 중국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부의가 아무리 잘보여도 마지막 피난처를 얻지는 못했다. 소련에서는 그를 소련에 남겨주겠다고 약속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전체 포로생활기간중에 부의는 시종 불안해 했다. 매번 중국말을 하는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공산당이나 국민당에서 파견해서 자기를 접수하러 오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놀라고 온몸에 식은 땀을 흘렸다.

 

1946년 봄, 여름이 교차할 때, 소련내무국은 부의이하의 만주국 대신들에대하여 심문을 시작했다. 일본관동군이 어떻게 만주국정부를 장악했는지, 부의는 어떻게 천진에서 동북으로 가서 황제가 되었는지 등등이다. 부의는 소련이 왜 이렇게 하는지 몰랐었다. 1946년 8월 소련이 그를 원동국제군사법정에서 증인으로 서게할 때 비로소 그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원래 그를 증인으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부의는 소련군의 압송하에 블라디보스톡에서 수상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 도착한 후 원동군사법정의 미국법관 크라이모어과 중국법관 매여오를 만났다. 법정상에서 부의는 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노예로 삼으려는 계획과 실시과정을 증언했다. 그는 상세하게 9.18사건후 천진일본주단군사령관 향추호평이 어떻게 강제적으로 그를 여순으로 데려갔는지, 관동군 참모장 판원정사랑이 어떻게 그를 여순에서 장춘으로 강제로 데려가 만주국황제가 되게 하였는지를 증언했다. 그리고 어떻게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감시를 받았고, 권리도 없었고, 심지어 개인의 인신자유도 없었음을 증언했다.

 

부의가 일본인들이 그의 처 담옥령을 살해했다고 증언할 때는 감정이 폭발하여 손으로 증언대를 두드리기도 하였다. 천황 히로히토가 그에게 천황신기보검과 거울을 보내주었다는 것을 말할 때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내가 이 물건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집안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이것은 우리 세대의 치욕이다"라고 하였따. 일본전범 변호사는 이것은 일본천황의 조종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부의는 큰 소리로 반박했다. "나는 그들을 강박한 적이 없다. 내 조상을 그들의 조상으로 삼았다" 이 말은 법정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8월 16일부터 부의는 연속 8일간 출정하였고, 원동국제군사법정에서 개인으로 증언을 가장 길게 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증언을 마친 후, 그는 다시 수용소로 돌아갔고, 계속 특수포로생활을 하였다.

 

1950년 7월 30일, 소련측은 부의에게 귀국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이때도 부의는 여전히 제45특별전범수용소의 통역에게 소련에 남고싶다는 희망을 전했다. 그러나 통역은 그에게 "만일 현재도 장개석의 중국이라면 아마도 소련에서 돌려보내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모택동의 중국이다. 당신이 소련에 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31일, 부의는 귀국열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