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부의)

청나라 마지막 황제 - 부의(溥儀)

by 중은우시 2005. 7. 1.


(부의는 중화인민공화국성립후 사상개조후 1962년 李淑賢이라는 평범한 여자와 결혼한다. 위 사진은 두 사람의 결혼사진임)

 

부의의 일생은 그의 신세내력과 연결되어 있다. 대청제국의 황제라는 출신신분은 그를 보통사람으로 생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세 살때 자희태후(서태후)에 의하여 광서제의 뒤를 이은 황제로 정해졌고, 이것은 그의 비극적인 일생의 시작이었다. 만주족 귀족들은 그에게 만주족으로서 대청제국을 재건하는 꿈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이미 봉건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했고, 부의의 일생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스스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숙명은 바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대청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역사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었다. 이를 완수하기 위하여 그는 예전의 적들과도 손을 잡았다. 만주지방에서 만주국을 세움으로써 그는 명목적으로는 대청국을 재건하는 꿈을 이룩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조상들의 적과 손을 잡음으로서 얻은 것이었고,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일본의 꼭두각시로서 이룩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설립한 만주국은 대청제국의 일부분이 아니었고, 오히려 일본제국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대청제국을 위하여 복수하고자 한 것이고, 그 대상은 바로 그를 배신한 중화민국 국민당정부였다.

 

중화민국 국민당정부는 대청제국을 배신하였다. 1912년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총리대신의 신분으로 융유황후등에게 선통제(부의)의 퇴위를 핍박하면서 청황실에 대하여 우대조건을 제시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원래 주전파들이 많았고, 이들은 부의의 퇴위를 반대하고 있었다. 원세개는 융유황후를 협박하면서 만일 계속 미루기만 한다면 아마도 민국정부가 청황실에 줄 수있는 우대조건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줄어들 것이라고 하였다. 융유황후는 결국 대세가 기운 것으로 판단하고 원세개의 퇴위조건을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시 청황실의 실력으로 보아서, 신해혁명이 그렇게 빠른 시일내에 성공할 수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민국정부와 청황실이 체결한 협약중에 우대조건은 명확했다.

첫째, 대청황제의 퇴위이후 존칭은 여전히 유지하며 폐지하지 않는다. 중화민국은 외국군주를 대하는 예의와 마찬가지의 예의로서 서로 대한다.

둘째, 대청황제의 퇴위이후 연간예산은 매년 4백만냥으로 한다. 화폐개혁후에는 4백만위안으로 하며, 이 돈은 중화민국에서 지급한다.

셋째, 대청황제의 퇴위이후 잠정적으로 자금성에 거주한다. 향후 이화원으로 옮기며, 시종인원등은 종전과 동일하게 계속 쓰도록 한다.

넷째, 대청황제의 퇴위이후 그 종묘능침은 영원히 제사지낸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수비병사를 보내어 적절하게 보호한다.

다섯째, 덕종숭릉의 미완성공사는 제도에 맞추어 적절하게 완공한다. 그 완공전례는 구제에 맞추어 동일하게 실시한다. 이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는 중화민국이 지불한다.

여섯째, 예전에 궁내에서 일하던 일체의 인원은 그대로 쓸 수 있다. 다만, 이후 환관을 다시 모집할 수는 없다.

일곱째, 대청황제의 퇴위이후, 원래의 사유재산은 중화민국이 특별히 보호한다.

여덟째, 기존의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에 편제되고, 인원수나 급여는 종전과 동일하게 한다.

 

동시에 "만몽회장(滿蒙回藏) 각 민족대우의 조건"(7개조로서 각민족의 대우는 한족과 동일하게 한다; 원래의 재산과 왕공세습작위는 보호한다; 팔기들의 생계를 보장한다; 종전의 영업, 거주등의 제한은 일률적으로 폐지한다; 종교신앙을 존중한다등)과 "청황족대우의 조건"(4개조로 왕공세습작위를 보유한다; 그 사유재산을 보호한다; 국민과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 병역을 면제한다)도 반포하였다.

 

융유황후는 이 여덟조의 우대조건을 보고, 1911년 12월 25일(양력 1912년 2월 12일) 선통제의 퇴위조서를 반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민국정부는 이 여덟조를 지키지 않았다. 선통제의 퇴위이후, 황실의 능묘는 계속 도굴당하였는데 민국정부는 보호노력을 거의 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 조상의 능묘가 도굴당한다는 것은 효를 통치의 근본으로 삼았던 청황실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것이 민국정부가 부의를 배신한 첫번째가 된다. 다음으로, 원세개는 중화대제국 황제취임식을 자금성에서 거행하는데, 이것은 부의에 대한 불경이고 민국정부가 부의를 배신한 두번째가 된다. 1925년 풍옥상은 병사를 보내 부의를 자금성에서 쫓아내고, 이화원을 몰수하여 민국정부소유로 하는데, 이것이 민국정부가 부의를 배신한 세번째가 된다. 그리고 국민정부군의 손전영은 황실능묘를 도굴하고 자희태후의 유체를 벌판에 버려두는데, 이것이 민국정부가 부의를 배신한 네번째가 된다. 손전영은 자신의 죄상을 감추기 위하여 자희태후의 순장품중에서 야명주 하나를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에게 바치고, 장개석은 도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이것은 민국정부가 부의를 배신한 다섯번째가 된다. 일본국이 침임하여 청왕조의 발상지인 만주지방을 점령하는데도, 장개석은 그냥 내버려두고 수수방관하였다. 이것이 민국정부가 부의를 배신한 여섯번째가 된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민국정부는 부의를 배신하였고, 8개상의 우대조건을 지키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의가 일본국의 꼭두각시로 만주국을 세우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민국정부의 배신이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였다고 보인다. 물론, 부의는 옛 청나라 신하들의 복벽(復辟, 황제의 위를 회복하는 것)에 동의하여 자금성내에서 재등극하는 해프닝을 벌인 일은 있었고, 이 사건은 풍옥상이 부의를 자금성에서 쫓아내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