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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전진교(全眞敎)의 칠대문파

by 중은우시 2006. 2. 10.

전진교는 전진도(全眞道)또는 전진파(全眞派)라고도 한다.

 

전진도의 시조는 소양자(少陽子) 동화제군(東華帝君)이다. 소양자는 법을 정양자(正陽子) 종리권(鍾離權)에게 전했고, 정양자는 다시 법을 순양자(純陽子) 여동빈(呂洞賓)에게 전하였으며, 순양자는 다시 유해섬(劉海蟾, 劉操)에게 전하고 다시 왕중양(王重陽)에게 전해졌다. 이들을 도교에서는 북오조파(北五祖派)라고 부른다. 전진파의 창시자는 왕중양이다.

 

왕중양은 섬서성 함양 대위촌 사람이다. 금 대정7년(1167년)에 종남산에서 산동의 녕해일대로 가서 도교를 전파했다. 먼저 마옥(馬鈺), 손불이(孫不二) 부부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전진암(全眞庵)"을 세운다. 이 때부터 제자를 받아들여 도를 전하는데, 그의 도를 배운 자들이 스스로 전진도사라고 칭하여, 세상에서는 전진도 또는 전진파라고 부르고 있다.

 

전진파는 유, 불, 도의 삼교합일을 주장한다. "삼교원융, 식심견선, 독전기전"을 종지로 하며, 주요경전으로는 <<도덕경>>, <<청정경>>, <<효경>>, <<심경>>등이다. 왕중양은 또한 <<전진입도십오론>>을 지었는데, 기본교의는 15개이다. 첫째, 출가주관, 둘째, 운유참방, 셋째, 학서해경, 넷째, 정연약물, 다섯째, 수조묘관, 여섯째, 주총림결반, 일곱째, 정양, 여덟째, 정심좌정, 아홉째, 조화오기, 열째, 연성, 열한째, 수성명, 열두째, 적공누행, 열세째, 초탈삼계, 열네째, 양생, 열다섯째, 초리범세.

 

나중에 왕중양에게는 일곱명의 제자들이 유명한데, 마옥(호 : 丹陽), 담처단(譚處端)(호: 長眞), 유처현(劉處玄)(호: 長生), 구처기(丘處機)(호: 長春), 왕처일(王處一)(호: 玉陽), 학대통(학大通)(호: 廣寧), 손불이(호: 淸靜)이 있으며, 이들은 각각 우선파, 남무파, 수산파, 용문파, 륜산파, 화산파, 청정파의 일곱개의 파를 개창하였다. 도교에서는 이를 북칠진파(北七眞派)라고 한다. 금나라 원나라 시기에 도교가 크게 흥하게 되는데, 특히 거처기가 개창한 전진 용문파는 이 시기의 도교를 최고의 성황으로 이끌게 된다.

 

전진 용문파(龍門派)

 

용문파는 왕중양이 개창한 전진칠파중 발전이 가장 빨랐으며, 영향력이 가장 큰 최대의 파이다. 북칠진자의 하나인 구처기가 전한 것이다. 구처기는 자가 통밀(通密)이고, 산동성 등주 서하 사람이다. 대정6년(1166년)에 나이 19세인 그는 세상의 헛됨과 화려함을 깨닫고, 집을 버리고 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곤륜산에 들어가 수련했다. 다음 해 왕중양이 산동 녕해에서 전진암을 열였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도를 배웠다. 왕중양이 죽은 후, 묘를 3년간 지킨다. 그 후 섬서성 반계에서 6년간 고통스럽게 수련한다. 나중에는 용문에서 다시 7년간 수도한다. 이에 그의 도력은 날로 증진되었다. 정우2년(1214년) 그는 산동의 양안아의 농민반란군을 설득하여 진압한다. 그는 수행을 오래하여, 설득력이 강하였으며 전진도가 일반 백성들에게 호소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것은 당시 금, 남송, 몽골의 세곳의 통치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하여 서로 사신을 파견하여 구처기를 모셔가고자 한다. 원태조 14년(1219년) 징기스칸이 아무강의 남쪽에서 그를 청했다. 그는 고희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1220년 1월 윤지평(尹志平)등 18명의 제자를 이끌고 산동래주에서 출발하여 하북, 북경, 신강, 소련을 거쳐 아무강(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 이른다. 만여리의 길이었고, 2년여의 시간을 소비한다. 결국 1222년 4월 5일 징기스칸의 군막사에 이른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북쪽의 아무강이다. 태조 징기스칸은 그에게 치국의 방략과 양생의 도를 묻는다. 구처기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경천애민(敬天愛民)이 근본이며, 몸을 수양하는 것은 청심과욕(淸心寡慾)이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태조는 그 말을 옳게 여겼고 그를 신선으로 존경한다. 그는 다음해(1224년) 3월 북경으로 돌아온 후 천하의 도교를 관장하게 된다. 이 때부터 그의 몸값은 엄청나게 뛰어 오른다. 그가 거주하던 태극궁(현재의 북경 백운관)은 북방 도교의 중심이 된다. 이 이후로 전진 용문파는 천하에서 제자들이 몰려드는 가장 이름난 문파가 된다. 구처기가 죽은 후에는 그의 제자인 윤지평, 이지상(李知常)이 차례로 물려받는다. 그들은 도관을 크게 건설하여, 북방지역의 많은 도관들을 세워 원나라때 도교가 가장 흥성하게 된다. 구처기는 <<현풍경회록>>을 지었으며, 그의 제자들이 그의 말을 모은 <<장춘조사어록>>이 있고, 유작으로는 <<반계집>>, <<명도집>>, <<섭생소식론>>, <<대단직지>>등이 있다.

 

전진 우선파(遇仙派)

 

북칠진자인 마옥이 전하였다. 마옥은 금나라때 도사이고, 원래의 이름은 종의(從義)였다. 자는 의보(宜甫)인데, 나중에 이름을 옥으로 바꾸었다. 자는 현보(玄寶)이고, 호는 단양자이다. 산동 녕해 사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지방에서 세력가였고, 대정7년(1167년)에 왕중양이 산동녕해에 와서 전파할 때, 집안의 만관의 재산을 버리고 그를 따라나선다. 왕중양이 죽기 전에 전진도의 비결을 마단양에게 전수해준다. 그는 전진교의 직접적인 계승자가 되어, 법을 전한다. <<동현금옥집>>, <<신광찬>>, <<점오집>>등이 있다. 원세조 쿠빌라이는 그에게 "단양포일무위진인"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전진 남무파(南無派)

 

북칠진자의 일인인 담처단이 개창하엿다. 담처단의 자는 통정(通正)이고, 호는 장진자(長眞子)라고 한다. 산동 녕해(현재의 산동성 모평)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경전과 역사서를 두루 연구했고, 초서외 예서가 뛰어났으며, 효와 의리를 중시하였다. 일찌기 마비증세를 앓아서 약으로 치료하지 못하였는데, 1167년 왕중양이 산동성 녕해로 와서 전도할 때, 왕중양에게 가서 치료를 요청했고, 결국 병이 다 나았다. 이후 왕중양을 모시고 일심으로 도를 닦았다. 왕중양이 죽은 후 그는 이수, 낙수지역에 은거하여 전진 남무파를 전파한다. 원세조는 <<장진운수온덕진인>>이라는 호를 내린다. <<남무도파종보>>에 따르면, 담처단을 제1대종사로 하고, 제5대인 양리신(楊理信)에 이른다. 그는 명초에 활동하며, 다시 호현종, 마미선, 유지동, 주묘초, 진선후, 주입강으로 이어지며 제12대종사인 허취건에 이르러서는 명말이 된다. 저서로는 <<수운집>>이 후세에 전한다.

 

전진 수산파(隨山派)

 

북칠진자의 하나인 유처현이 개창하였다. 유처현의 자는 통묘(通妙)이고, 호는 장생자이다. 산동 동래(현재의 산동 액현) 사람이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모친에게 효성을 다하여 모셨다. 영화부귀를 꿈꾸지 않고, 스스로 수양하며 지내기를 좋아했다. 대정9년(1169년) 왕중양이 마단양등 제자를 이끌고 액현에 전도하러 왔을 때,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 때부터 왕중양을 따라 산동, 하남을 걸식하며 수련했다. 왕중양이 죽은 후, 그는 홀로 경락에 은거하여 마음을 고요히 하고 연성하였따. 그리고 전진 수산파를 전하였다. 1188년 창양에서 재초를 주재할 때, 단을 설치하고 기우제를 지냈는데 과연 영험이 있었다. 금장종때 총애를 받았으며 일찌기 그가 수행하는 곳을 "영허(靈虛)"라고 이름붙여주었다. 원세조는 그를 "장생보화명덕진인"으로 봉했다. 저작에는 <<황제음부경주>>, <<황정내경옥경주>>, <<무위청정장생진인지진어록>>, <<선락집>>등이 있다.

 

전진 륜산파(崙山派)

 

북칠진자의 하나인 왕처일이 개창하였다. 왕처일의 호는 옥양자이고, 전양자(全陽子)라고도 한다. 산동 녕해 사람이다. 금 대정8년(1168년)에 왕중양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산동 문등현 운광동에 은거한다. 그는 "여름에는 태양을 받고, 겨울에는 눈을 안고 자는"수련을 9년동안 하여 크게 도를 깨친다. 금대정 28년(1188년) 황궁으로 들어가 만춘절의 초사를 주재한다. 금장종이 장생의 도에 관심이 많아 양생의 도와 성명의 이치를 물었다. 도가는 청정무위해야 하도 내단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였고, 황제가 좋아할만한 말은 하지 않았다. 금선종 정우오년(1217년)에 성수옥허관에서 우화등선한다. 전진도 륜산파를 전하였다. 원세조는 "옥양체현광도진인"으로 봉했다. 저서에는 <<운광집>> 4권, <<서악화산지>>등이 전한다.

 

전진 화산파(華山派)

 

북칠진자의 하나인 학대통이 개창하였다. 학태고(학太古)의 이름은 대통이고 호는 광녕자이다. 산동 녕해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부유했고, 현지에서 가장 부자였다. 어려서부터 역서를 읽기를 즐겼었다. 금 대정7년(1167년)에 왕중양의 제자가 된다. 곤륜산, 화산등에서 수련하며 전진 화산파를 전한다. 원세조는 그를 "광녕통현태고진인"으로 봉한다. 제자인 범원희(范圓曦), 왕지근(王志謹)등이 화산파를 전한다. 평생의 저작으로는 <<삼교인역론>>, <<시교진언>>, <<심경해>>, <<구고경해>>, <<주역삼동계간요석의>>, <<시부>>, <<잡문>>, <<악부>> 및 <<역도>>등이 있으며, <<태고경>> 15권을 간행했다. 또 다른 송나라때의 진박(陳搏)이 전한 화산파가 있는데, 도교에서는 "노화산파"라고 부른다.

 

전진 청정파(淸靜派)

 

북칠진자의 하나인 손불이가 전한 것이다. 손불이는 호가 청정산인으로 마옥(마단양)의 처이다. 산동 녕해 사람이다. 그녀는 녕해의 호족인 손충익의 딸인데, 1119년에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바가 있었으며, 마옥이 진선의 재목인 것을 알고 그에게 시집을 간다. 금대정7년(1167년) 왕중양을 만나 제자가 된다. 나중에 남원에 전진암을 짓고 제자들을 받아들인다. 원세조는 그녀을 "청정연진현허순화원군"으로 봉한다. 저작에는 <<불이원군법어>>, <<손불이여단시>>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