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모검걸(毛劍杰)
김용이 지은 <<의천도룡기>>에 나오는 명교(明敎)는 도대체 일종의 허구인가 아니면 현실을 반영한 것인가? 명나라가 건립된 이후에도 그는 계속 존재하였는가?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일찌기 13세기에 거의 족적이 사라인 신비한 종교가 중국의 동남연해에서 여전히 완강하게 생존하고 있었다. 그는 바다를 건너온 것인가? 아니면 사막을 건너 온 것인가? 역사의 먼지는 모든 것을 덮어버렸고, 지금은 겨우 몇 개의 사원이 폐허로 남아 있고, 불완전하게 남은 책들이 남아 있다. 그래도 남아 있는 독특한 풍습은 여전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있고, 고대 명교의 천년흥망성쇠는 점차 빙산의 일각을 드러내고 있다.
절강성 온주의 창남현(蒼南縣)의 연해지방인 염정(炎亭), 괄산(括山) 일대에는 천년간 일부 독특한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 하얀 옷을 입고 죽은 자가 좋은 세상으로 가도록 기원한다든지, 일부 나이든 어민들은 매일 아침에 반드시 밥을 세입먹을때까지는 채소반찬을 먹고, 그 후에 고기요리를 먹는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일부 노인들은 지금까지도 아침에는 태양에 절을 하고, 저녁에는 달에 절을 한다.
현지인들의 조상연원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복건남부 또는 복건동부지역출신이며, 보편적으로 마조(媽祖)를 모시는데, 마조신앙에는이런 풍습은 없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다른 종교들에도 이런 풍습은 없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지금은 이미 사라진 종교가 유행하지는 않았을까?
1982년, 절강성의 제1차문물조사때, 사람들은 중화민국시대의 <<평양현지(平陽縣誌)>>에서 마을 사람인 공극표의 <<선진사기(選眞寺記)>>에 이런 기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진사, 위소린국지교자택언(選眞寺, 爲蘇隣國之敎者宅焉)"
--선진사는 소린국의 종교의 집(사원)이다.
그리고 선진사의 위치에 대하여는 "평양곽남행백십리, 유산왈붕산(平陽郭南行百十里, 有山曰鵬山, 평영의 성곽 남쪽으로 백십리를 가면 산이 있는데 붕산이라 한다)"에 있다고 되어 있다.
소린국은 바로 고대페르시아를 말한다. 소린국의 종교는 바로 마니교(摩尼敎)이다. 송나라 이후에는 중국화되어 마니교는 명교가 된다. "평양곽남"은 당시에 이미 창남현에 편입되었고, 현재의 금향(金鄕), 염정, 괄산 일대이며, 바로 내력이 불분명한 독특한 풍속이 전해지는 곳이다.
흰 옷을 입고 죽은 자를 위하여 기원하는 것은 명교도들의 백의백관(白衣白冠)의 풍습이 내려온 것이며, 채소요리를 세입 먹는 것은 바로 명교의 '장재(長齋)'풍속의 변통이다. 어민들은 오랫동안 바다에서 파도와 바람과 싸우므로 소식만 해서는 체질을 증강시킬 수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어야 한다. 그래서 세 입만 채소요리를 먹는 것으로 소식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명교는 수백년간 종적을 감추었고, 일찌감치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폐허나 남아 있는 기록중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밖에 없다.
1988년 설날, 평양현지의 주편집인인 임순도(林順道)는 창남 백사의 외삼촌 장정광(張正光)의 집에 세배를 갔다. 이때 명교에 관련된 기록을 얘기하니, 장정광 노인은 스스로 선진사를 찾으러 나섰다.
괄산의 하탕촌의 바깥에는 큰 새를 닮은 작은 산이 있는데, 장노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현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산 이름이 "붕산(鵬山)"이라고 했다. 바로 선진사가 소재한다는 산이름이다.
그러나, 붕산의 산자락에 여러 사원이 있었고, 하나하나 확인했는데, 선진사는 종적도 찾을 수 없었다. 선진사는 일찌감치 사라졌는가? 아니면 기록이 잘못되었는가?
이때, 논가운데 외롭게 서 있는 황색담장이 장정광의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논둑길을 따라서 가까이 가니 방문위에는 큰 글자로 "선진선사(選眞禪寺)"라고 쓰여 있었다. 절의 앞에 있는 폐당의 자리와 논의 경계선에 1미터 높이의 이끼가 가득한 석비(石碑)가 서 있었다. 비에는 바로 "선진사기(選眞寺記)"라는 글자가 보였다. 비문은 평양현지의 기록과 일치했다.
선진사는 산을 등에 업고 짓는 중국사원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선진사는 일찌감치 불교사원으로 바뀌어 있었고, 규모는 아주 작았다. 겨우 3칸짜리 평방과 스님 1인이 거주할 뿐이다. 절에는 마니교의 풍격을 지닌 건축물이나 옛물건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겨우 남아 있는 9개의 기둥만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임을 알게 했다.
이것은 누가 지었고, 언제 지었는가. 그리고 어떠한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왔는가?
<<선진사기>>를 쓴 시기는 원나라 지정11년(1351년)이고, 당시 현지의 팽씨집안의 팽여산(彭如山)이 절을 확장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선진사기>>는 반복하여 팽여산이 조상의 뜻을 받들어 절을 확장했다고 적고 있다. "절은 나의 조상이 창건한 것이다" "나는 다행히 선조의 유지를 어기지 않을 수 있었다" 1997년 1월, 임순도는 선진사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팽가보촌에서 1919년에 만든 <<팽씨종보>>를 발견했는데, 이 족보에는 <<선진사기>>의 전문이 수록되어 있었고, 또한 팽여산의 신세내력도 기재되어 있었다.
팽씨의 선조인 팽신(彭信)은 후진 천복5년(940년) 지금의 복건성 하포(霞浦)에서 창남의 금향 붕산으로 이주했다. 팽씨의 8대조인 팽중강(1143-1194)은 건도2년(1166년)에 진사가 되었고, 일찌기 국가감승의 관직에 올랐다. 팽씨가족은 이때부터 흥성하여 이후 벼슬을 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선진사를 처음에 지었을 때는 소박하고 누추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팽여산이 확장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다. 선진사는 팽시집안이 아직 흥성하기 전에 만든 거시다. 그러나 팽여산은 이 선진사가 어느 조상이 지었는지 어느 대에 지었는지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했다.
집안이 흥성하기 이전, 팽여산의 가까운 선조가 생활한 연대이전, 북송선화년도의 명교금지이전, 이 세개의 요소로 추산하자면 선진사의 건조연대는 아무리 늦어도 북송선화연간이전이 될 것이다.
한 지방에서 대규모의 신흥종교가 일어나는 것은 두 가지 원인에 기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나는 조직적인 전도이고, 다른 하나는 이민자의 유입이다.
지방문헌과 관련사료에 보면 명교의 전도사가 온주에서 활동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이런 점에서 이민이 온주지방에서 명교를 흥성하게 한 유일한 원인이 될 것이다.
명교는 페르시아에서 만리나 떨어진 온주까지 왔는데, 두 가지 경로를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비단길을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들어오고 다시 남으로 내려와 온주까지 온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해상비단길을 따라 천주(泉州)로 들어오고 다시 북건성을 거쳐 온주까지 북상한 것이다.
온주의 역사상 대규모의 이민은 세번 있었다: 당나라말기오대십국의 이민붐, 남송건도2년(1166년) 온주홍수이후 관청에서 대량으로 복건성사람을 이주시킨 일, 명나라말기 청나라초기에 복건남부의 이민자들이 절강성으로 들어온 일.
팽씨선조는 당나라말기 오대십국때 복건동부에서 이민온 것이고, 조상의 거주지는 복건성 하포일대이다. 이 곳은 당시 마니교가 유행하던 지방이다. 팽씨가족과 함께 창남현으로 이주해온 임, 온, 채, 진, 서씨가족의 족보에서 그들이 명교를 믿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명나라때의 하교원(何橋遠)이 지은 <<민서(閩書)>>의 기재에 의하면, 당무종때의 "회창멸불"사건때 마니교도 연대하여 금지당했다. 명교승려인 호록법사(呼祿法師)는 난을 피해 복건성으로 와서 계속 명교를 전파했다.
당시 해상비단길이 아주 번성하였으므로 많은 페르시아인, 아랍인들이 천주로 왔고, 복건성 절강성 일대에서는 명교가 성행하였는데, 이런 사람들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선진사의 소재지인 팽가산은 오늘날 금향진의 서쪽에 있다. 고대의 금향은 복건과 절강을 있는 교통요지인 횡양고도에 놓인 중요도시였다. 게다가 바다에 가까워 "양절(절강성)의 인후이고, 팔민(복건성)의 순치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리하여 명교가 해로를 통해 왔건 육로를 통해 전해졌건, 아마도 이 일대를 교두보로 삼았을 것이며, 다시 북으로 범위를 넓혀갔을 것이다.
팽씨같은 집안이 대대로 명교신앙을 전승한 것은 바로 당시 온주의 명교신앙이 흥성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중국성립이전까지 평양, 창남등지에는 소수의 농민이 여전히 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온주의 명교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북송시대이다. 계통적인 교리와 규범적인 숭배의식을 갖추었으며, 당시 온주의 12만호의 인가중에서 정규적인 명교사원이외의 "재당(齋堂)"이 40여곳에 이르렀다. 소위 "재당"이라 함은 민가에 설치한 신도들의 취합처이다.
이미 확인된 정규의 명교사원은 선진사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폐허로 변해서 더 이상 추적할 수가 없다.
원나라사람인 진고(陳高)의 <<죽서루기(竹西樓記)>>에 의하면, "온주의 평양에는 한 지방이 있는데 염정이라고 한다....잠광원이라는 곳은 명교의 부도가 있는 것이다" 잠광원은 중화민국초기의 <<평양현지>>를 만들 때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염정진의 홍가촌에 사는 91세된 노인 홍문광에 의하면, 이런 절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성과 현에서 사람들이 와서 잠광원이라는 곳을 찾은 적은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홍가촌 대저자연촌 대강산 산록의 한곳에 대나무숲이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잠광원의 유적지라고 본다. 앞부분에는 민가가 있고, 뒤에는 청나라때의 고묘가 있다.
<<죽서루기>>에는 당시 잠광원 주변에서 명교가 전파되는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당시 잠광원에는 명교의 상급승려인 석심상인(石心上人)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하루종일 현지의 사대부들과 "우러러 하늘이 넓음을 쳐다보고, 고개를 숙여 숲과 계곡이 그윽함을 보았다"고 한다. 현지 사대부들도 석심상인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명교신앙에 대하여도 긍정적으로 보았다. 당시 명교를 믿는 자들 중에는 복건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명교교도들의 계율은 아주 엄격하였다. 절대로 소식(素食, 채식)을 해야 하고, 매일 1끼를 먹으며, 낮에는 태양에 절하고 밤에는 달에 절하였으며, 매일 저녁 정확한 시간에 마니광불(摩尼光佛)을 참배해야 했다. 선진사와 잠광원의 유적지가 확인되기 전에 학계에서 인정된 마니교사원유적지는 복건 진강 화표산초암(華表山草庵)이었다.
현재 한 곳(선진사)는 면모를 바꾸어 불교사원이 되었고, 다른 한 곳(잠광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명교사원의 건축양식이 어떠했는지는 그래서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이때, 세번째 유적지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평양의 북쪽에 있는 서안 조촌진 허오촌에 있는 절로 이름이 "명교사(明敎寺)"이다. 서안시에서 2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비록 "명교사"라는 세 글자만으로는 이것이 명교사원이라고 인정하기 곤란하다. 다만 허오촌의 명교사의 산문은 두공(斗拱)이 없는 서양식구조이며, 문위의 "명교사"라는 세 글자 위에는 태양과 그 광선을 도안으로 남겨두었다. 이것은 명교가 숭상하는 광명이라는 의미와 일치한다. 이것은 절강성남부에 현재까지 명교의 특징을 남기고있는 유일한 종교건축물이다.
현지의 기재에 의하면, 명교사는 904년에 건축되었다. 당나라말기, "조애(曹靄) 형제가 복건의 장계 조씨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했고, 쌍룡계옆에 명교사를 지어 법과 교리를 널리 알렸다"고 되어 있다.
이 절도 여러차례 중건되었다. 32년전에 현임주지인 명녀사태(明女師太)가 절로 들어왔을 때, 겨우 산문 하나와 모옥(띠집)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중에 띠집도 비바람에 무너져 버렸다.
명교사원임을 증명할만한 신물은 없는가? 명녀사태가 비장하고 있는 물건들 중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두 개의 해바라기조각편이다. 이것은 모두 산문의 꼭대기에서 떨어져 부서진 것들이다.
해바라기는 명교와 직접관련이 있는가? 임순도에 의하면, 그도 본 적은 없지만, 통상적인 이치로 보자면 태양숭배와는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확인될 수만 있다면 이 해바라기조각편이 명교의 사원이라는 실물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선진사, 잠광원, 명교사를 불문하고, 모두 이미 쇠퇴하고 황량한 분위기임을 느낄 수 있다. 명교가 온주에서 그렇게 전성기를 누렸는데, 무엇때문에 다시 쇠퇴한 것일까?
마니교는 그 자체가 불교의 교리를 흡수하여 창립된 것이다. 전파과정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마니교전도사들이나 경전번역자들은 마니교의 교의와 의식을 불교화 하였다.
694년, 페르시아승려인 불다탄(拂多誕)은 마니교경전인 <<이종경(二宗經)>>을 가지고 중국으로 왔으며, 이때 마니교는 정식으로 중국에 유입되었다. 마니교는 중국에 들어온 초기에 적극적으로 불교와 도교에 의탁하여 생존하려는 전략을 택했다. 돈황문서인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보면, 노자가 서쪽으로 가서, 페르시아에서 마니의 화신이 되어 설법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동일한 주장이 중국도교의 전적에서도 나타난다.
마니교는 스스로 도교에 의탁하려 했고, 도교도 적극적으로 마니교를 흡수하여 도교의 한 갈래로 삼으려고 했다. 당시 조정은 명교의 경전은 <<도장(道藏)>>에 포함시켰다.
당나라때 "회창멸불"이후, 마니교는 중국화된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바로 "명교"이다. 명교는 바로 완전히 중국화된 민간마니교이다. 교의는 "이종삼제이론(二宗三際理論)"에서 "청정광명대력지혜(淸淨光明大力智慧)"의 여덟글자로 바뀌었다.
불교에 의탁하면서 자신의 교의를 간략하게 함으로써 민간에서 널리 전파되게 된다. 송나라때부터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관청에서는 금지하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했다. 그래도 명교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복건, 절강 일대에 국한되어 전도가 이루어졌다.
원나라때 명교는 합법적으로 전도할 권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다른 민간종교들과는 차이가 많았다. 전통적인 비밀활동형식의 "결사"도 공개적으로 바뀌거나 반공개적으로 되었다.
원나라때 명교교도의 또 다른 활동방식은 바로 세상과 담을 쌓는 사원식수행이었다.
<<죽서루기>>에 나오는 명교도는 내향적이고 경건하여 엄격하다. 이는 오랫동안 명교도는 행적이 궤이하고 선동당하기 쉽고 일을 잘 일으킨다는 대중들이 가진 이미지와는 큰 차이가 있따. 그들은 사원식수행을 하던 명교도들이었다.
역대로 농민반란에 참여하고 관부에 반항한 명교도들은 주로 민간비밀결사조직이었다. 이런 민간비밀결사조직은 왕왕 다른 민간종교신앙도 같이 받아들였다. 역대의 봉건왕조의 통치자들이 보기에 비밀결사인 민간종교신도는 반란분자와 동일했다. 그리하여 모조리 악마로 몰아버린 것이다.
근래에 어떤 사람은 방랍(方臘)의 반란은 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 중요한 이유는 명교도들은 백색을 중시하는데, 방랍의 반란군은 홍건(紅巾)을 표식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과학원의 마서사(馬西沙), 한병방(韓秉方)의 두 교수는 <<중국민간종교사>>라는 책에서, 방랍의 반란군이 홍건을 맨 것은 바로 미륵교등 다른 민간종교와 결합한 결과라고 본다. 이후 원나라말기의 백련교도의 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초기, 복건절강의 두 곳은 이미 중국에서 명교가 유행하는 유이한 곳이 되었다. 이때 온주의 명교는 여전히 활발했고, 관청의 주의를 끌었다. 절강안찰사인 웅정(熊鼎)은 핑계를 잡아 명교를 금지시킨다. 명나라 황제는 이후 지시를 내려"...명교, 백운종회등의 우두머리는 교살형에 처하라"는 영을 내려 명시적으로 명교를 금지시킨다.
공개활동의 권리를 박탈당한 명교는 마침내 명나라 중기이후 점차 불교나 기타 종교와 섞이게 되어, 외부적으로는 알아보기 어렵게되었다.
명교가 불교에 의탁하여 완강한 생명력을 유지해 왔는데, 결국은 불교에 의탁하는 것으로도 쇠망으로 가는 추세를 뒤집지는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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