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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양귀비)

양귀비(楊貴妃)를 황후(皇后)에 봉하지 않은 이유는?

by 중은우시 2006. 2. 9.

양귀비는 이름은 옥환(玉環)이고 호는 태진(太眞)이며, 현재의 섬서성 화양 사람이다. 양옥환은 대대로 관리를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의식주의 걱정은 없이 자랐다. 그녀는 아무런 걱정없이 금(琴)을 다루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며 지냈다.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인 환경속에서 자랐다. 양옥환은 미녀로 태어나 고대의 사대미녀로 손꼽히며 당현종 이융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당현종은 양옥환을 위하여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었다. 그녀가 부귀영화를 누렸을 뿐아니라, 그녀의 집안 사람들도 모두 고관대작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이처럼 그녀를 총애했던 당현종은 그녀를 단지 귀비에 봉하고, 황후에 봉하지는 않았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특히 황후자리는 이미 수년전부터 빈 자리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귀비는 왜 그렇게 총애를 받으면서도 황후에 책봉해달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당현종이 원래 자기의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처, 즉 며느리인 양귀비를 얻기 위하여 먼저, 그녀를 출가시켜 여도사가 되게 하고, 나중에 그녀를 후궁으로 삼았다. 예의범절을 중시하던 봉건사회에서 이런 패륜적인 여인이 천하인의 어머니로 모범을 보여야 할 황후에 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현종이 책봉할 수 없었을 뿐아니라, 양귀비도 요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므로, 죽을 때까지 황후에 봉해지지 않았다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런 견해에 의문을 나타낸다. 즉, 그런 입장은 송나라 이후부터는 적용할 수 있겠지만, 당나라에 적용하기는 힘들 거라는 것이다. 당나라는 비교적 남녀관계가 개방적이었고, 이러한 인륜도덕의 관념은 없었기 때문이다. 혼인관계는 비교적 자유로왔다. 예를 들어 당고종 이치는 부친인 당태종 이세빈의 후궁이었던 무측천을 후궁으로 삼았다가 후에는 황후에까지 봉하였다. 아들이 부친의 후궁을 황후로 삼았는데,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황후로 삼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견해는, 당태종이 양귀비를 황후에 봉하지 않은 것은 당현종이 아들인 수왕의 입장을 고려한 것과 양귀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는데서 찾기도 한다. 다만, 황후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둔다면, 일단 황제의 사망등 중대한 변고가 일어나면 궁정에 정변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당현종은 61세 생일을 지낸 후, 양옥환을 귀비에 봉했다고 한다.

 

비록 양옥환이 황후로 책봉된 것은 아니었지만, 궁중에서의 모든 예의는 황후와 동일했다. 당시의 지위로 보면 후궁중의 최고지위에 있었고, 삼천궁녀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양귀비로서는 황후로 봉해지든 아니든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